〈12〉
“저도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일? 초연이 눈으로 물었지만 신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병은 그의 병이기 이전에 〈MJ 인터내셔널〉 위험 요인이었다.
그러니 상대방이 설령 초연이라 할지라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초연의 옆에는 재윤이 있었다.
저 사람을 뭘 믿고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말한단 말인가.
그가 대답 없는 사이 초연의 시선이 규림에게 닿았다. 그가 병원에 온 이유를 규림에게서 찾는 시선이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규림이 얼른 자기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김규림이라고 합니다. 〈MJ 인터내셔널〉 디자이너입니다.”
디자이너와 회사 이사가 병원에서 주말에 만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초연의 표정도 점점 굳어졌다.
“근데 여자분……. 괜찮으세요? 안색이 창백하신 게 좀 불편하신 것 같은데.”
순진하게 염려하는 여자의 눈빛에 초연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다.
신후가 누구를 사귀든 말든, 누구와 결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괜찮습니다.”
“괜찮긴. 곧 쓰러질 얼굴인데. 그러지 말고 잠깐 쉬었다 가요. 병원에 아는 사람 있으니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신후가 말했다.
“됐습니다. 가면서 쉬면 돼요.”
‘재윤 씨 가자.’ 초연이 재윤을 보고 눈짓했다.
재윤의 팔뚝을 붙잡고 부축받는 초연의 모습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의 말은 삐딱선 타기 바쁘면서 저 새끼 말은 참으로 잘 듣지.
“참 이초연 씨는 별것도 아닌 일에 다 고집을 부립니다. 아픈 것 같아 조금 쉬어가라는 말이 그렇게 못 들을 말입니까?”
“그러는 민 이사님도 바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별 시답잖은 일에 다 참견을 하시네요?”
그녀의 어투에서 묘하게 빈정거리는 느낌이 났다.
두 사람의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사람은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이었다.
먼저 항복을 한 건 초연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민 이사님도 바쁘실 텐데 이만 가보시죠.”
정중히 말해보았지만 신후는 고집스레 제 자리를 지켰다.
예전에 같이 살 때 신후의 당당함과 제멋대로인 기질은 어디서 왔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천애 고아에 보잘것없는 남자로만 생각했는데도 그의 태도에서는 거침없는 오만함이 묻어있었다.
이젠 알았다.
민신후라는 남자는 태생적으로 오만하게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따라주는 위치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어느 누가 〈MJ 인터내셔널〉의 차기 회장인 그의 말을 무시할까.
그러니 제까짓 것의 의견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다.
초연은 자신이 아무리 싸워도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저희가 먼저 가야 민 이사님도 움직이시겠네요. 그럼 이만.”
고개를 까딱, 신후에게 인사를 건넨 초연이 다시는 볼 일 없다는 식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저분들 누구세요?”
규림이 물었지만 신후의 귀에는 그녀의 질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고 몇 시간이든 맞서 싸울 것처럼 굴던 초연이 순식간에 나긋해진 순간, 그는 무언가 가슴 속에서 쑥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할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멀어져가는 초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최고의 침선장인을 섭외해야지.”
톡톡,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창문 밖 풍경을 보던 그가 대꾸하자 강 비서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안경을 추켜 올렸다.
“딴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제법이시네요.”
“이사 자리는 딱지치기로 딴 줄 알아.”
하지만 실은 강 비서의 말대로 신후는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며칠 동안 병원에서 마주쳤던 초연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일로 엮일 뻔한 여자, 이제 일로 엮일 일 없으니 생각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초연과 재윤의 모습에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도대체 서울엔 왜 온 것인지, 게다가 재윤은 왜 함께 움직인 것인지.
청도에서는 재윤에게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더니 서울까지 같이 올라올 정도면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가까운 사이인 건가 싶다.
혹시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둘 사이가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남자에게는 손톱만큼의 여지도 줄 것 같지 않던 여자가 그런 식으로 남들의 눈을 피해 신호를 주는 건가 싶어 배신감도 느껴졌다.
물론 데이트가 아닐 수도 있다.
둘을 마주친 게 병원이니 둘이 같이 누군가의 병문안을 왔을 수도 있고, 둘 중 누가 아파서 보호자의 자격으로 왔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저 편한 쪽으로 생각해보았지만, 그 역시 가슴이 뻥 뚫릴 만큼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었다.
전자라면 결국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상대방을 보일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고, 후자라도 자신의 아픈 모습을 보여줄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근데 최고의 침선장은 이미 파리에서도 몇 번 쇼를 개최하셔서……. 최고가 아니면 의미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별것 아닌 것들을 최고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건 우리 몫이지. 다른 염색장인, 침선장인들 접촉 준비해.”
“모두 다요? 직접 가시게요?”
갑자기 늘어난 일에 강 비서가 울상을 짓는 강 비서를 한참 바라보던 신후가 입을 뗐다.
“강 비서.”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신후의 시선에 강 비서가 얼른 대답을 고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니, 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내 차.”
“아, 뒤범퍼 수리 맡긴 차 말씀입니까?”
“그쪽에서 연락 온 거 있나?”
“한 번 왔습니다. 보험 쪽 처리를 안 하니 직접 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수리 비용이 얼마인지 대충 알려달라고요.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가 아닌 강 비서에게 연락했군.
그래도 뻔히 차주가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아닌 먼저 준 명함으로 연락을 주었다는 사실에 입맛이 씁쓸했다.
초연이 자신을 얼마나 마주치기조차 싫어하는지 또 한 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겨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강 비서가 기겁했다.
“설마 서민들 상대로 차 수리비를 뜯어낼 생각이신 겁니까?”
“됐어, 나가봐.”
신후가 귀찮다는 듯 손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강 비서가 나가려 여는 문틈으로 누군가 불쑥 몸부터 들이밀었다.
“하하하, 민 이사. 자리에 있었군. 내가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려고 집에도 안 들르고 왔단 말이야.”
지은의 동생인 정지명 상무였다.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선 정 상무는 출장이 아닌 휴가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두꺼비 같은 인상에 더욱 기름이 흘렀다.
정 상무는 그의 지시로 프랑스 현지 공장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쪽 공장들 상황은 어떻습니까.”
“으응, 자네 보고서대로 고급 봉제 인력이 좀 빠져나가기는 했는데 우리가 다시 고용한다면 2/3는 다시 돌아올 것 같아.”
“다행이군요.”
어차피 그가 다 아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 정 상무를 보낸 것이니 크게 다른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오트 쿠튀르 패션쇼 건은요?”
“으응, 뭐 아틀리에랑 숙련공 고용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걸 아니까 별말 안 하는데 메인 디자이너, 브랜드 공동 창립자는 이범규 염색장의 작품으로 옷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그 건은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치, 그랬지. 내가 그래서 민 이사 뜻을 알렸지. 내가 하아아도 어필을 하니까 그쪽에서도 전통 한복 쪽으로 살짝 관심을 돌렸어.”
무척이나 어렵게 일을 성사시켰다는 듯, 정 상무의 얼굴이 상기됐다.
어서 빨리 자신의 업적을 칭찬해달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살짝 관심을 돌렸다라……. 그러면 그쪽에서는 아직도 전통 한복보다는 천연 염색 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나라 전통 한복으로는 오트 쿠튀르 쇼에 선 디자이너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과 뭔가 차별화된 걸 바라……. 응? 그게 아니라 결국 내가 전통 한복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니까?”
“네. 돌리긴 했는데 결국 마지못해 돌린 거고, 실은 그쪽이 천연 염색 쪽을 더 선호한다, 그거 아닙니까.”
“그, 그렇지.”
이상하지만 내용을 정리하면 대충 그랬다. 정 상무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고민할 것 없군요.”
신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말일세?”
“그쪽에서 한국 전통 염색에 관심이 있다면 최고의 작품으로 보답해야죠.”
“아니, 민 이사. 그게 아니라 내가 전통 한복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니깐?”
정 상무가 애타게 신후를 불렀지만 이미 신후는 방을 나선 후였다.
***
“어서 오세요.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러 여기까지 먼 길 오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종아리를 반쯤 덮는 생활 한복을 갖춰 입은 초연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를 따라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의 경쾌한 목소리가 늦여름 마당을 한가득 채웠다.
오늘 수업은 천연 염색 박물관에서 주최하는 천연 염색 체험 수업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미리 접수를 받고 한 달에 두세 번씩 초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은 꽤 인기가 높았다.
특히 2박 3일 구성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그녀의 집에서 한옥 체험도 하고, 염색도 하면서 주변 트래킹 코스까지 마련되어 있어 여행 상품으로도 반응이 좋았다.
학교 개학을 앞두고 가족 단위로 찾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초연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미소가 걸렸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동질감이 주는 행복.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천연 염색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한가지만으로 초연은 모인 사람들이 그저 좋았다.
초연은 며칠 전 보았던 신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예쁘고 화려한 여자.
〈MJ 인터내셔널〉의 디자이너라고 했던가.
여자가 그를 바라보던 시선이 단순히 상사와 부하직원 같지는 않았다.
연인 사이일까? 깊은 사이? 혹은 이제 시작하는?
그렇게 잘나고 멋진 남자에게 애인이 없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그를 본 후 한 번도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가끔 그를 떠올리면서 결혼을 했을까, 여자친구는 있을까, 그의 삶이 궁금한 적은 있지만 직접 만난 후로는 어이없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괜한 배신감과 질투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그는 그의 삶을 살고,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 간단한 이치를 잊고 그의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저, 선생님. 오늘 참가자들 명단이요.”
박물관에서 파견된 보조 선생님이 그녀에게 명단을 건넸다.
오늘 체험 학습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연락처 등 간략한 정보가 적혀있는 종이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출석을 부를 테니 한 분씩 손을 들어 답해주세요.”
여기저기 어색하다는 웃음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 한 분씩 본인이 직접 자기소개를 할까요? 어차피 2박 3일 동안 같이 지낼 분들인데 서로서로 인사를 하면 좋을 것 같네요.”
이미 예상했던 반응에 그녀가 반쯤 웃으며 능숙하게 대처하자 그제야 사람들이 그냥 출석을 불러달라 요청을 했다.
출석을 부르는 건 단순히 참가자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연이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매치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2박 3일 동안 그들을 잘 통솔하기 위해서는 그녀 역시 사람들의 이름을 익혀야 했다.
이렇게 출석을 통해 이름을 확인하고, 그다음부터 초연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려 노력했다.
처음엔 한꺼번에 수십 명의 이름을 외운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여러 번 수업을 반복하며 여유가 생길수록 이름을 외우는 것도 쉬워졌다.
“나희순 씨, 오동철 씨, 김미홍 씨…….”
출석부의 이름 한 번, 얼굴을 확인하며 사람들을 기억했다.
그사이 사람들 역시 서로서로 눈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신…… 후 씨?”
기계적으로 종이를 읽던 초연의 말끝이 흐려졌다.
설마 아니겠지.
동명이인이길 바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제가 좀 늦었군요.”
천천히 문을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동명이인이 아닌, 초연이 알고 있는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