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신후 이놈. 규림이 밥도 사주고 공연도 보고 했으면 좀 좋아?”
갑자기 제게 날아온 비난에 신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그동안 프쉬케 인수 건으로 바빴던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끝났으니 오늘 밥 한 번 할 수 있겠구나.”
“볼일 보고 바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예끼 이놈, 네 놈은 뭐 밥도 안 먹고 사냐? 걱정하지 마라 규림아. 이놈이 이렇게 일에 빠져도 내 말은 잘 듣는다.”
“아니에요. 오빠, 아니 민 이사님 바쁘시면 전 괜찮아요.”
오빠라는 소리에 신후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본 규림이 얼른 말을 바꿨다.
처음 신후를 보았을 때 민 회장이 신후를 보고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서 규림 역시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하지만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 오빠라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는 신후의 지적에 고쳤다.
“괜찮긴. 밥 안 먹고 사는 사람도 있더냐? 게다가 네가 잘 먹어야 그게 다 신후 돕는 게지.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신후한테 밥도 사 달라고 졸라.”
“네, 회장님.”
“회장님은 무슨. 할아버지라고 불러.”
“네, 할아버지.”
규림이 다소곳하게 신후의 눈치를 보며 대꾸했다.
“어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생각하고 있으려무나.”
답답한 규림의 태도에 신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탁 트인 파란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파란 하늘 사이로 흩날리던 쪽빛 원단들. 그리고 그 사이 언뜻 드러나던 부드럽게 웃던 얼굴.
그러다가 찬바람이 쌩쌩 이는 눈으로 쏘아보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날 꿈속에 보았던 상처를 보고 초연을 닦달했다.
초연은 꿈과 현실을 헷갈리지 말라고 쏘아붙였고, 그제야 신후는 정신을 차렸다.
꿈에 정신을 팔려 여자를 몰아붙인 것이다.
그렇다고 비 오는데 차에서 내려갈 줄이야.
그 역시 차에서 내려 잘못했다고, 태워준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초연은 길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버렸다.
그 성질머리로 어떻게 험한 세상을 살려고 그러나.
그러다가 문득,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울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를 내던, 울던 여자는 이상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깊어졌다.
***
같은 시각 K 종합병원 1층 로비.
“하……. 말도 안 돼.”
참담한 현실에 초연은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평소보다 더 작아진 듯한 초연의 모습에 재윤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내가 괜히 연락처 줘서 희망 고문시켰나 보다. 미안해.”
오늘 초연은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 모임의 관리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
재윤이 그 길을 따라나선 참이었다.
K 종합병원의 병원장이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 모임의 관리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병원장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데스크 직원은 여태껏 이런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찾아오는 손님은 만나주지 않는다며 안타까운 눈길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혹시나 문 앞을 지키고 있으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몇 시간을 지키고 있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혹시 가족이 혈우병 D타입입니까?’
‘그걸 어떻게……. 혹시 병원장님 아시는 분인가요? 아니면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 모임 관련된 분이신가요?’
‘그건 아닌데……. 몇몇 분 아는 분들이 있긴 하죠. 어떻게. 소개해 드릴까요?’
‘정말요? 네. 만나 뵙고 싶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근데 그분들이 아무나 수혈을 해드리진 않고……. 그분들 역시 소중한 피를 제공해드리니까 보상은 해드려야 합니다.’
‘네. 얼마든지 해드릴 생각 있습니다.’
현재 혈우병 D타입 환자들이 출혈이 생겼을 때 급하게 처방되는 약 역시 비급여 품목으로 몇백만 원에 호가한다.
하물며 이 약은 출혈 후 치료의 목적이지 예방의 목적은 될 수 없다.
만약 큰 사고가 나서 병원에 도착하는 동안 많은 출혈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치료제도 소용없게 된다.
그러니 더욱 예방 차원의 특정 응고 혈액 수혈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수혈 한 번에 이천만 원입니다.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할 때는 일억이고요.’
‘그러면 6개월마다 한 번씩 1년이면 사천만 원이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상상 이상의 금액에 기절할 지경이었지만 뒷말은 더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니죠. 성장기에는 적어도 분기별 한 번씩 수혈을 받는 게 안전합니다. 또 애들은 성인보다 사고가 날 확률도 높잖습니까?’
‘말도 안 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에이. 저 사람 목숨을 두고 장난치는 사람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이 일을 해주시는 거지 돈 뜯어내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정 불안하시면 일단 한 번은 수혈받고, 그 이후에 1년 계약을 맺으면 됩니다.’
‘1년 계약이라면 네 번……. 팔천만 원을 한꺼번에 달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정말 말도 안 되는 큰돈이지만 이 돈 때문에 자식을 잃는다면 그녀로서는 삶의 의미조차 없어지는 일이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솔이만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면.
눈 딱 감고. 아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일을 해서 이 돈을 마련할 각오를 다졌다.
‘내 말 제대로 안 들었네. 아까 응급 수술 시 일억이라고 했죠? 그러면 일억 더하기 팔천. 총 일억 팔천이죠.’
‘응급 수술은 받지도 안 받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선불로요? 그건 응급 수혈이 필요하면 그때…….’
‘에헤이. 일하다가 갑자기 연락 오면 지방에서도 올라오고, 자다가도 뛰어와야 하는데 그럼 그분들이 어떻게 일을 합니까. 그러니 그분들 생활도 책임을 져야지요.’
하지만 점점 커지는 브로커의 금액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 한옥과 모든 걸 팔아 올해는 어찌한다 쳐도 내년엔? 그 후년엔?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러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연락해주세요. 안 그래도 연결해달라는 사람들 넘치는데 너무 안타까워 보여 말씀드린 거지 저 급한 놈 아닙니다. 이분들도 귀한 분들이지, 사기꾼 취급받을 분들 아니구요.’
망연자실한 그녀를 보며 브로커가 일어나 명함 한 장을 건네고 가버렸다.
“어떻게 사람 목숨을 돈으로 사려는 거지?”
“어쩌겠어. 원하는 사람은 많고. 혈액을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은데.”
“저 사람들 다 신고하면 안 돼? 저거 불법이잖아.”
“그러면 모두 더욱더 음지로 숨어버릴걸. 아쉬운 건 우리 쪽이니까.”
“하아.”
문제는 부당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솔이의 목숨 앞에 마음이 한없이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분하지만 벌써 머릿속으로는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돌아갔다.
“어떡하지? 솔이……. 학교 가면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방법을 더 찾아보자. 나도 더 찾아볼게.”
“이초연 씨……?”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아직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던 초연이 움찔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던 신후의 목소리였다. 환영인 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건 신후가 분명했다.
생각지도 못한 신후의 등장에 초연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민신후 이사님 아니십니까. 여기서 또 뵙네요.”
그사이 재윤이 일어나 그녀가 그의 시선에 닿지 않게 움직이며 신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묻는 신후의 시선은 여전히 재윤보다는 재윤의 뒤쪽, 초연에게 고정된 채였다.
대체 왜 두 사람이 이곳에 함께 있나. 신후의 속이 들끓었다.
분명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 사이 아닌데 서울까지 동행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신후는 조금 전 재윤이 초연의 등을 쓸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은 겨우 손목 한 번 잡았다고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 그 남자에게는 등을 만지는 걸 허락했다.
자신에게는 적대적이기 바쁜 여자가 재윤에게 의지하고, 그 새끼의 손길을 다소곳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신후의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병원에 볼일이 있어서요.”
“청도에서 서울까지. 두 분이 같이 말입니까?”
천천히 재윤과 그녀를 번갈아 보는 시선에는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재윤과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누가 누굴 의심해. 불쾌함에 초연이 일어났다.
“그러는 민 이사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신후가 떠난 후 초연은 한동안은 마음이 심란했다.
6년 만에 보는 그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시간 속으로 그녀를 이끌고 가기 충분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에게 상처만 주고 떠났지만, 어떻게 그와의 시간에 상처만 있을까.
행복한 기억이 떠오를 때면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고, 그가 자신과 솔이를 버리고 떠난 그 날이 떠오를 때면 분노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솔이를 선물해준 사람이기에, 솔이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그에 대한 기억을 숙명이라 여기고 살았다.
그런데 6년 만에 나타나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흔들어버렸다.
마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처럼 그녀를 추궁하기도 했다.
아예 예전 일이라고는 하나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라면 나을 텐데 순간순간 보이는 예전과 같은 눈빛에 덜컥 심장이 떨어졌다.
감정 소모가 심했던 한 주였다.
그나마 이젠 다시 그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자신만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게 억울하기도 하지만 솔이를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솔이를 사이에 두고 그와 싸울 일은 없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솔이와 자신만 생각하기로 했다.
당면한 문제는 솔이에게 특정 응고 혈액을 정기적으로 제공해줄 사람을 구하는 일이었다.
주말이 되자마자 재윤이 건네준 전화번호를 붙잡고 서울로 올라왔다.
재윤 역시 솔이의 주치의로서 자신이 도울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따라나섰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염치없지만 사양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잡은 한 줄기 희망이 서울 온 지 몇 시간 만에 처참하게 부서진 것이다.
신후를 마주치기 전부터 미칠 것 같았던 마음이 신후의 등장으로 그에게 향했다.
평상시라면 어떻게든 감정을 추스를 초연도 오늘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