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10화 (10/84)

〈10〉

신후는 보조석 문과 뒷문을 동시에 열었다.

초연이 보조석에 오르는 동안 신후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대충 뒷자리에 몰아 넣고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간신히 차에 오른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사이 더욱 거세진 장대비가 시야를 가렸다. 마치 자동 세차장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운전 못 하겠는데? 좀 있다가 빗줄기 가라앉으면 가자.”

신후가 창밖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응.”

문득 떠오른 수건 생각에 초연은 운전석과 보조석 사이로 몸을 밀어 넣어 수건을 찾아냈다.

원래 수건이나 속옷을 사면 한 번 빨고 입는 초연이었지만 오늘은 깔끔을 떨 상황이 아니었다.

커다란 자주색의 수건으로 신후의 가죽 재킷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다 젖었네. 벗어봐. 감기 걸리겠다.”

“됐어. 너나 닦아.”

“되긴 뭐가 돼? 이 상황에서도 폼 잡아?”

투덜거리면서 초연은 부지런히 젖은 가죽 재킷을 꾹꾹 눌러 물기를 제거했다.

비싼 가죽 재킷 같은데 다 망가지겠네.

걱정하느라 자신의 손길이 그의 가슴과 복근, 그리고 그 아래를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의 가슴이 웃느라 들썩이는 걸 보고 나서야 의아한 표정으로 신후를 바라보았다.

“내가 벗으면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 못 할 건 뭐람. 뭐 대단한 게 있다고.”

‘그래?’ 하는 표정으로 신후가 재킷을 벗었다.

그제야 초연은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물 먹은 흰 티는 안 입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잔뜩 젖은 흰 티 아래 가슴 근육과 복근이 살 색으로 도드라졌다.

특히 가슴 양쪽으로 갈색의 유두가 너무 선명해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자극이 강한데 급기야 신후가 면티도 벗었다.

초연은 수건을 그의 몸에 던지고 얼른 몸을 돌렸다.

“왜, 고개 돌려?”

“그럼 변태처럼 봐야 해? 사람이 옷 갈아입으면 고개 돌리는 게 예의지 계속 쳐다보는 건 변태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는데도 자신이 허둥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너도 벗고 물기 닦아.”

“됐어.”

“왜. 너도 감기 걸리는 건 똑같을 텐데. 부끄러워? 아니면 느끼는 중?”

얼굴을 보지 않아도 능글맞은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저를 놀리느라 안달 난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웃겨 진짜.”

그깟 옷 갈아입는 게 대수라고?!

초연은 등을 돌리고 블라우스를 벗었다.

어차피 나시는 입고 있으니 괜찮았다.

한여름에는 짧은 민소매 하나도 입고 다니는데 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그가 자신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랫배가 바짝 조여들었다. 다시 한 번 아래가 야릇해졌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신후가 벗은 흰 면티와 자신의 블라우스를 한 손에 잡아 비틀었다.

쪼르륵 물기가 바닥 고무판으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왼쪽 어깨 뒤쪽을 꾹 누르는 그의 손길에 초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하는 거야? 변태야?”

초연이 홱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가 손을 대고 있는 건 어깨의 아주 작은 부분인데도 온몸에 개미가 지나가는 것처럼 간질거리고 짜릿했다.

“아니, 네 남자친구.”

신후가 왼쪽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긴 손가락으로 쇄골을 쓰다듬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솜털이 쭈뼛 섰다.

뺨을 쓸다가 귓불을 덮듯이 만지는 뜨거운 손길에 초연은 꼼짝할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닿는 자리마다 화끈거려 움찔거렸다.

그런 초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후가 뚫어지게 초연을 쳐다보았다.

그의 뜨거운 시선이 코를 타고 입술에 닿자 초연이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뒷머리를 끌어당기는 움직임에 온몸이 떨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뾰족한 말만 내뱉던 입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초연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더운 숨과 입술을 열고 파고드는 혀의 움직임에 초연은 아무것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뇌 속으로 옮겨간 것처럼 뇌 속도 온통 쿵쾅거리며 귀를 울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초연은 그가 이끄는 대로 입을 열어주었다.

***

청도에서 올라온 주말, 신후는 K 종합병원을 찾았다.

혈우병 D형의 환자로 정기적 수혈을 받기 위해서였다.

〈MJ 인터내셔널〉의 차기 대표가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회사에 큰 리스크가 될 것이다.

비밀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해서 그의 수혈은 주로 VIP 병실에서 병원장에 의해 은밀히 이루어졌다.

민 회장이 고혈압을 앓고 있기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민 회장의 고혈압 정기 검진 때마다 그가 동행하는 것으로 밝혔다.

오늘도 직원들의 출입마저 철저히 통제된 VIP룸에서 혈액 수혈이 이루어졌다.

지은의 혈액을 채취해 그 중 필요한 성분만을 걸러내어 신후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다시 지은의 몸에 넣는 중이었다.

“어때? 두 사람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정 원장이 질문에 수혈 기계를 중간에 두고 나란히 누운 신후와 지은이 대답했다.

정 원장은 K 종합병원의 병원장이기도 했지만, 지은의 친부이기도 했다.

혈우병 D형을 앓고 있던 그에게 지은을 수혈자로 연결해 준 것이 정 원장이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조심스레 병실을 들어오고 있는 건 규림이었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규림이 아니냐? 생각보다 빨리 왔네. 차 안 막혔어?”

“네. 오늘따라 강변북로 쪽 차가 잘 빠져서 괜찮았어요.”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신후 걱정되어서 왔구먼.”

규림의 등장에 민 회장이 더 과하게 규림을 반겼다.

누가 보면 규림이 스스로 방문한 걸 기특해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수혈은 언론은커녕 병원 내에서도 극비사항이었다.

그 모든 보호막을 뚫고 규림이 이 병실에 들어왔다는 건 민 회장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눈도 못 마주치는 규림이 이곳에 자발적으로 올 리는 없었다. 민 회장의 부름에 온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보면 병실에서 가족 모임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이런 몰골로 보니 좀 민망하네요. 아버지 환자 비밀은 좀 지켜주시죠.”

지은이 자신의 친부이자 이 병원의 병원장인 정 원장에게 투덜거렸지만 이건 누가 보아도 명백히 민 회장을 향한 불만 토로였다.

“이제 규림이랑 신후가 결혼하면 다 같은 가족이 될 건데 규림이가 설마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까. 그치, 규림아.”

“네…….”

규림이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제 눈도 못 마주치면서 어떻게 결혼할 생각은 하는지. 신후는 코웃음을 쳤다.

지은과 민 회장의 사이 그녀는 한 마리 불쌍한 새우일 뿐이었다.

“왜 이리 멀찌감치 서 있어. 이리 가까이 오너라. 같이 좀 친하게 지내라고 규림이 회사까지 옮기게 했는데 아직도 서먹한 게야? 그동안 밥도 좀 같이 먹고 하지 그랬냐.”

민 회장이 규림을 신후와 가까운 의자에 앉혔다.

그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면서 고개를 끄덕 인사하는 규림을 보고 신후도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규림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지 2년밖에 안 된 어린 여자였다.

민 회장은 그와 규림이 친하게 지냈으면 싶은 마음에 마침 의상학과를 졸업한 규림을 패션 사업부에 입사시키며 노력을 했지만 신후에게 규림은 관심 밖이었다.

늘 저를 보면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히기만 하는 모습에 도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물론 이건 규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고 이후 어느 여자를 만나던 그에게는 거기에서 거기였다.

그나마 생리적 욕구는 사고 후 2년 후부터 조금씩 살아났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어떤 여자를 들이밀어도 상관없었다.

그나마 규림이 자신에게 피를 줄 수 있다면 다른 여자들보다는 나은 조건이었다.

때문에 신후는 저에게 피를 줄 수 있는 권리를 둘러싼 지은과 민 회장의 신경전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가 지은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민 회장 역시 지은을 못마땅해했다.

한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던 민 회장이 불륜녀인 지은을 집에 들인 건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원래의 성품대로라면 지은을 당장 내쫓을 그였지만 귀한 손자에게 피를 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지은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신후에게 안정적으로 피를 줄 사람을 찾았고, 결국 규림을 찾아낸 것이다.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데……. 아버님 민 이사 불편하겠어요.”

“불편하긴. 자꾸 만나야 정이 들지.”

“그건 민 이사가 알아서 하겠죠. 저렇게 능력 있고, 잘생겼는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여자 만날 거예요. 규림 양도 민 이사 이렇게 어려워하는데……. 그쵸 규림 양?”

“네? 아, 네네.”

“어허, 애미 규림이 앞에 두고 그게 무슨 말인 게냐! 이만한 천생연분이 어딨다고.”

“아니 아버님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민 이사가 마음에 맞는 여자를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지은이 그의 정략결혼을 막고 연애결혼을 미는 걸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신후에게 수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말고 규림이로 바뀐다면 집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까 염려한 수작이었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신후는 규림의 편도, 지은의 편도 들지 않았다.

민 회장은 지은의 영향력을 줄일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신후가 보기에는 그의 목줄을 쥔 주인이 바뀌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지은과의 싸움에서도 이기지 못하면 앞으로 〈MJ 인터내셔널〉의 안주인으로 어떻게 살려고.

문득, 초연을 떠올렸다.

그 싸움닭이라면 지은과 어떻게 싸울지.

그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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