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무슨 말인가 싶어 초연이 고개를 들어 신후를 바라보았다.
문득 신후와 처음 만난 날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쪽이 내 친오빠도 아니고 사귀는 오빠도 아닌데 내가 왜 오빠라고 불러?’
그러니까 그때 했던 말을 꼬투리 잡아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종일 그가 자신이 주는 선물을 받고 기뻐할 모습을 떠올리며 좋았던 기분이 확 상했다.
“짜증은. 이거나 받아.”
초연은 눈을 흘기며 그의 눈앞에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제 손 위에 올려진 오토바이 키를 보고서도 신후는 살짝 놀랄 뿐 못마땅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태영 오빠한테 부탁해서 오토바이 고쳤어. 저 오빠가 이 동네에서 오토바이 제일 잘 고치거든. 작동되는 건 오늘 확인했고, 세차랑 왁스칠 해준다니까 내일 시내 나가서 찾아. 명함은 여기.”
지난번 신후가 방앗간집에서 수금해준 일이 고마웠다.
만일 신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깔끔하게 수금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변변찮은 옷 한 벌도 없는데 옷이나 한 벌 사줄까 하다가 오토바이가 생각났다.
가끔 신후가 방에서 헬멧을 쓰다듬는 걸 보면 오토바이에 미련이 많은 게 틀림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후 덕에 자신의 보증금은 그대로였다.
그 돈에서 조금 떼어 오토바이를 고쳐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왕이면 서프라이즈로 해주고 싶어 몰래 시내에서 카센터를 하는 태영에게 부탁했다.
태영은 그녀의 친구 희영의 오빠로 그녀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오늘은 오토바이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러 간 날이었다.
오토바이를 선물 받고 그가 기뻐할 상상에 얼마나 기분 좋았는데.
“이거 말고, 오빠. 친척이야? 아니면 사귀는 오빠야?”
제 노력도 몰라주고 오빠 타령이나 하고 꼬투리를 잡는 신후가 보기 싫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너도 오빠라고 불러주면 될 거 아냐!”
화가나 초연이 확,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 안으로 향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서운함에 눈물이 찔끔 났다.
순간 신후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두 몸이 맞닿았다.
단단한 그의 가슴에 제 허리를 감싸 바투 당겨 안은 신후의 힘에 초연이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였다.
싸구려 트레이닝 복을 입어도 감출 수 없는 탄탄한 몸매야 알고 있지만, 그 단단함을 직접 느끼는 건 달랐다. 마치 돌덩이 같았다.
게다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맞닿은 얼굴로 그의 숨결이 쏟아져 부서졌다.
그녀와 같은 비누 향에 땀 냄새가 섞여 묘한 그만의 향기가 났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둔 초연의 손이 움찔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어느새 초연의 얼굴은 뺨뿐만 아니라 귓불까지 빨개졌다.
“내가 네 가족도 아닌데 오빠라고 부르겠다는 건 내 여친이 되겠다는 말이야?”
처음 보는 그의 표정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모, 몰라.”
당황한 초연이 말을 더듬었다.
“왜 몰라. 세상 모르는 것 없는 이초연이.”
미쳤나 봐. 얘 왜 이래. 초연이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기를 쓰면 쓸수록 그녀를 잡은 그의 팔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결국 아랫배에 닿는 그의 성기의 느낌에 초연이 깜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당황한 초연은 더욱 화를 내어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감췄다.
한 발 떨어진 두 사람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발 떨어져 있는데 그의 단단함과 커다란 성기의 압박감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야릇함이었다.
초연이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불편하게 숨을 쉬었다. 들숨을 어떻게 쉬는지, 날숨을 어떻게 쉬는지도 모르겠다.
“나한테는 되는데 그 새끼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신후가 떨어진 초연을 바투 당겨 안으며 이번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
이젠 피할 곳조차 없어 초연은 그와 얼굴을 맞대야 했다.
처음엔 시선과 가장 가까운 턱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그가 턱을 잡고 올릴수록 그녀의 시선도 점점 위로 이동했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과 베일 것같이 날카로운 콧날.
그 위에 대답을 재촉하는 성난 눈빛.
명백한 고백이었다.
누가 고백을 이따위로 하냐며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명한 소유욕에 초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초연은 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선을 비켜 간신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상황이 어색하고 민망해 입술을 감쳐 물었다.
순식간에 그의 시선이 입술에 들러붙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입술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등골을 타고 전기가 자르르 흘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초연은 숨마저 멈췄다.
그의 가슴 자락을 움켜쥔 손끝이 간질간질해 애꿎게 셔츠만 비틀어 쥐었다.
서로의 숨결이 서로의 입술에 닿던 순간,
“남아, 주남이 안에 있나? 와서 이것 좀 들어도.”
대문 밖에서 들리는 외할머니의 목소리에 초연이 화들짝 놀랐다.
초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다.
허겁지겁 방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미쳤어. 내가 지금 뭘 하려던 거야.
외할머니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마당 한복판에서 그 미친놈과 키스를 할 뻔했다.
쿵쾅쿵쾅 가슴 뛰는 소리가 귀에서 났다. 부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진정시켰다.
“연이는. 아직 안 왔나?”
창문 밖에서 외할머니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보일 리도 없는데 초연은 더욱 몸을 옹송그리며 숨죽였다.
마치 불장난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들어왔어요.”
대답하는 신후의 목소리는 태연자약했다.
조금 전 일어났던 일이 자신의 착각이었던 건지. 머릿속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근데 왜 할매가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나. 연아, 와서 이것 좀 옮기라!”
“초연이 놔두세요. 얼굴이 빨간 게 좀 쉬어야 할 것 같더라구요.”
“그래? 우야노.”
대문 밖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초연은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감싸며 열기를 식혀야 했다.
***
그 이후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날 있었던 일을 대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대놓고 티격태격하던 싸움은 급격히 줄었다.
외할머니는 이제야 너희들이 친해진 거냐며 반겼지만 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대신 초연은 그가 좋아하는 비계 많은 삼겹살을 바짝 구워 그의 앞쪽으로 밀어주고, 신후는 영화를 볼 동안 스포 없이 그녀의 옆을 지켰다.
신후는 열심히 집을 고쳤고, 초연은 더 이상 언제 떠나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슬 겨울을 보낼 신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따뜻한 남쪽 지방이더라도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트레이닝 복을 계속 입고 겨울을 날 수는 없었다.
초연은 신후의 옷과 살림살이 몇 가지를 사기로 했다.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하는 초연을 보고 신후가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디 가?”
“시내에 물건 좀 사러.”
“같이 가.”
신후의 말에 초연은 재빨리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치며 빠르게 화장도 했다.
초연이 마당에 나왔을 때는 이미 신후는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처음 만날 때 입었던 가죽 재킷을 입은 그는 평상시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양아치처럼 보이던 모습은 어디 가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있었다.
“오빠랑 데이트 간다고 예쁘게 입은 거야? 됐어. 옷 따뜻하게 갈아입어. 오늘 비 온다고 했으니까.”
“오빠는 무슨.”
초연은 새침하게 봉고 옆의 보조석에 앉으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후를 보고 있으면 빨개진 얼굴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난 볼일 좀 볼게. 살 거 다 사면 전화해.”
시장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내리며 신후가 말했다.
“뭔데?”
“일거리 좀 있나 찾아보게.”
“일거리?”
“집수리도 다 끝났는데 언제까지 집에서 놀 수만은 없잖아.”
최근 초연의 머릿속을 떠돌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가 떠나지 않는다.
이곳에 자신과 함께 머무른다.
가슴이 콩콩 뛰는 걸 숨기며 초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응.’ 대답했다.
신후가 일 끝나면 전화하라는 시늉을 다시 한번 하며 뒷걸음으로 멀어졌다.
그 모습에 초연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다 얼른 손을 내렸다. 이런 행동은 아직 너무 쑥스러웠다.
초연은 집중해서 쇼핑했다.
유난히 큰 그에게 맞을만한 옷을 찾느라 가게를 몇 군데나 들러야 했다.
180대 초반까지야 기성복이 맞는데 185cm를 넘으면 기성복을 사기 급격하게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스포츠 매장에서 그가 입을 만한 옷을 몇 벌 건졌다.
겨울용 이불 세트도 하나 사고, 따로 쓸 수건도 몇 장 샀다.
장을 다 보고 나니 양손 가득 짐이 한가득이었다.
전화를 걸까 했지만 괜히 일을 알아보는데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공용주차장까지 100m 남짓.
이 정도는 혼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비였다. 맑았던 하늘에 굵은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졌다.
뛰려고 했지만 양손 가득 무거운 짐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양손에서 짐을 빼앗아 저만치 달려갔다. 어어? 초연이 두 눈만 크게 뜨고 놀라는 사이.
“뭐 해. 뛰어!”
비에 젖어 웃고 있는 건 신후였다.
그의 재촉에 초연은 신후의 뒤를 따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