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우는 걸 본 게 맞구나. 부끄러움과 동시에 찾아든 건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었다.
지금 제 모습이 꼭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방구석 여포의 모습과 다른 바 없었다.
“알았어. 미안.”
초연의 기운 없는 사과에 신후가 손을 풀어주었다.
작은 초연의 손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무슨 일인데 그래?”
“됐어. 넌 알 거 없어.”
하지만 신후는 곧 한복 박스를 정리하는 초연의 모습에 상황을 짐작했다.
“한복들은 왜 이래? 수금 받으러 간 곳에서 이렇게 만든 거야?”
할머니께서 이 옷을 만드는 과정을 신후 역시 보았다.
행여 뭐라도 묻을까 바느질 전에는 꼭꼭 방 청소도 하고 손도 씻었다.
밥을 먹다 밥 냄새가 밸까 음식을 할 때는 안방 문을 닫고 식사를 했다.
옷을 저렇게 애지중지 만드시는데 초연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을까.
궁금하고 부러웠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엉망이 된 옷을 보니 제 가족이 다친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신후의 손에서 치마를 뺏은 초연이 다시 조심스레 치마를 개켜 상자에 담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은행.”
“네 돈으로 채우려고? 덜 받은 돈이 얼마인데.”
“이백 정도. 오십만 원은 받았어.”
“이건 내가 들고 갈게.”
신후가 그녀의 손에서 상자들을 뺏어 들었다.
“집에 갖고 들어가면 안 돼. 할머니 보시면 속상해하실 거야.”
“알았어. 안 보이는 곳에 처리할게.”
“부탁해.”
큰 상자들을 들고 움직일 생각에 막막했는데 신후가 이렇게 나서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느새 신후는 그녀에게 꽤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
초연은 상자를 그에게 맡긴 채 돈을 찾으러 다시 어시장 근처 은행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
돈을 찾아 돌아오는 길, 초연은 몇 번이나 어떻게 둘러댈지 생각했다.
다행히 서울 집을 빼고 남은 보증금이 있어 돈은 마련했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외할머니가 방앗간집 여자랑 말을 섞다가 전후 사정을 알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할머니가 절대 알지 못하게 할 이유가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초연은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집에 들어서니 거실 한가운데는 잔뜩 신문지가 깔렸었고, 휴대용 버너 위에는 삼겹살이 구워지고 있었다.
“마침 딱 왔네. 연아, 오늘 수금하느라 애썼다. 와서 삼겹살 무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초연이 신후를 바라보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추에 깻잎까지 올려 야무지게 삼겹살을 즐기는 신후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단서도 읽을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그녀 몫의 수저를 챙기러 주방으로 간 사이 초연이 신후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이야? 혹시 네 돈 드린 거야?”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럼?”
“옷 주고 돈 받아왔지. 힘들게 만드신 옷에는 마땅히 제대로 된 공임을 받아야지.”
“어떻게?”
“욕하는 새끼한테는 더 욕하고, 힘쓰는 새끼한테는 더 힘쓰면 돼.”
초연의 시선이 신후의 주먹에 닿았다. 툭 튀어나온 뼈 부분이 빨갛게 다쳐있었다.
손등 위로 스크래치 몇 개도 보였다. 분명 아침까지는 없던 상처였다.
“아……. 싸운 거야?”
걱정스러운 초연의 모습에 신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돈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는데 뭐하러 본인 손을 더럽힐까.
어시장으로 간 신후는 근처 양아치를 찾았다.
한 명을 찾아 일거리를 맡긴다고 하니 동네 양아치란 양아치는 다 기어 나왔다.
일은 간단했다. 돈 줄 때까지 방앗간 앞에서 지키고 서 있기.
돈 줄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씨를 말려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방앗간 사장들의 결단이 빨랐다.
덕분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비록 수금 받은 돈보다 양아치에게 준 돈이 컸지만 괜찮았다.
신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응급 상자를 챙겨오는 초연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MJ 인터내셔널〉의 후계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양손에 떡을 쥐여줘 놓고 네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 아느냐고 행복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늘 초연을 위해 돈을 쓰며 신후는 난생처음 돈의 맛을 느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도와주고, 웃게 해주는 힘.
자신이 가진 게 꽤 괜찮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디 봐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신후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레 제 상처를 소독하는 초연을 바라보았다.
가슴 속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고마우면 이 오빠한테 삼겹살 한 점 싸주던가.”
여태 누군가에게 이런 식의 요구를 해본 적 없던 신후였다.
엄마는 늘 아팠고, 아랫사람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별 시답잖지만 누군가에게 부려보고 싶던 투정을.
“오빠는 무슨.”
눈을 흘기면서도 초연은 그의 그릇 위에 잘 구워진 삼겹살 한 점을 올려주었다.
“그거 말고 저쪽 거. 비계 많은 거. 아니 아니 좀 더 바짝 익혀서.”
“얼마만큼. 더 구워? 몸에도 안 좋게 비계는. 그리고 이렇게 바싹 구워 먹다가는 암 걸려.”
어쩐지 오늘따라 잔소리가 귀에 달았다.
***
그날 이후 둘의 투덕거림은 줄어들었다.
겉으로는 툴툴대도 초연은 그가 좋아하는 반찬을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신후 역시 초연이 원단이나 부자재를 사러 시내로 나갈 때는 운전수와 짐꾼을 자청하며 따라붙었다.
한 번은 집에서 뒹굴거리다 둘이 마음이 맞아 달달거리는 봉고차를 끌고 부산으로 놀러 간 적도 있었다.
여행 도중 신후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씨앗호떡을 사 먹고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지는 걸 보는 것도 재밌었고, 물떡을 먹고 생각보다 별로라고 실망하는 모습도 웃겼다.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던 음식들이 어느새 초연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기대감을 주었다.
초연이 드라마에 한 창 몰입했을 때 리모컨을 돌려 잔뜩 화를 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짜릿했고, 밤늦게 잠을 안 자고 혼자 영화를 보는 초연의 귀에 스포를 날려 베개로 얻어맞는 것도 아프지 않았다.
초연은 그를 보고 유치하고 못됐다고 성질을 부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껏 항상 의미와 이익을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던 그에게 유치한 장난을 나눌 친구가 생긴 것이다.
어차피 목적지가 정해진 여행도 아니었다.
그저 발길 가는 대로, 양 갈래 길에 서면 더 당기는 곳으로 오토바이 핸들을 돌리던 여행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질릴 때까지 있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라 여겼다.
그렇게 두 달이 또 흘렀다.
가끔가다 초연이 심각한 얼굴로 이제 떠날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내가 이 집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떠나길 바라는 것인지. 서운했고 매정한 계집애라 생각했다.
신후는 이 집에서 더욱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되기 전 신후는 집 단장을 시작했다.
여자 둘, 그것도 초연이 없는 동안 할머니 혼자 꾸리던 집이었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집이 낡아가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신후는 페인트를 사다가 대문을 칠하고, 낮은 담벼락을 높게 올리고 깨진 유리를 담 위에 박았다.
비가 오면 온통 흙물이 되는 바닥에 보도블록을 깔아 비가와도 신발이 망가지지 않게 고쳤다.
쩍쩍 갈라진 외벽을 시멘트로 메우고 누렇게 변한 외벽에 다시 하얀 페인트칠도 했다.
그때마다 옆에서 그의 조수처럼 일했던 초연이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사라졌다.
아니, 실은 최근 초연이 종종 자주 사라졌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혼자 나가는 거야.”
쾅쾅. 파란색 경사진 맞배지붕 위, 지붕을 수리하며 신후가 툴툴거렸다.
정확히 언제 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
아마 그가 일하는 동안 눈치를 보다가 몰래 빠져나간 게 틀림없었다.
자신은 저를 위해 이렇게 집을 수리하는데 겨우 옆에서 손만 거드는 주제에 내뺀 초연이 괘씸했다.
사실 일을 안 도와주는 것도 안 도와주는 거지만 오늘 아침 초연이 누군가와 통화하던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웃으며 통화를 하던 초연이 그가 누구냐고 묻자 신경 쓸 거 없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 안에서의 통화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구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해도 짧아지는데 미친 거 아냐.”
드디어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찾은 신후가 핸드폰을 들며 허리를 폈다.
지붕 위라 그런지 저 멀리 용달 하나가 집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초연의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안쪽이라 집 앞 도로를 이용하는 다른 마을 사람들은 없었다.
이 때문에 저 도로를 진입해 들어온다는 건 이 집에 온다는 의미였다.
파란 용달이 대문 바로 바깥에 섰고, 초연이 내렸다.
브라운 컬러의 플리츠 스커트와 아이보리 블라우스, 그 위에 그린색의 카디건을 걸쳐 입은 초연이 조수석에서 내렸다.
“추워 디지겠네.”
신후는 사다리에서 내려가면서도 초연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차림이었다.
청바지에 흰 티만 입어도 예쁜 애가 옷까지 차려입으니 더 예뻤다.
하늘하늘한 몸매에 늘씬한 각선미가 돋보였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용달차 운전석에 닿았다.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꽤 시원스러운 입매를 갖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다음에 보자고 손을 흔들고 가는 입매가 꽤 잘생겼다.
“태영 오빠, 고마워요! 다음에 밥 살게요!”
그가 다가서는 것도 모르고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오빠는 무슨.’ 신후가 초연의 옆에 섰다.
“어머 깜짝이야. 너 뭐야?”
제 팔뚝에 와닿는 단단한 그의 팔뚝에 초연이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었다. 그 모습에 신후는 기가 찼다.
“너야말로 지금 뭐야. 여기 해지면 위험한 거 몰라?”
“아직 환한데 무슨 헛소리야?”
짜증 난 듯 초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바람에 입술 양옆으로 볼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짜증을 내야 보이는 거니까 그놈은 못 봤겠지 싶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노을 지면 어두워지는 거 금방이야.”
신후가 보란 듯이 손으로 하늘을 찔러 가리켰다.
초연이 짜증 난 얼굴로 손으로 파리 쫓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집 쪽으로 걸었다. 그 옆에 신후가 더욱 바짝 달라붙었다.
“지난주에 저 아랫동네에서도 어떤 여자 끌려갈 뻔했다잖아. 일찍 일찍 다녀.”
“위험은 무슨. 태영 오빠가 데려다준 거 안 보여?”
“아, 가족인 건가? 외가? 친가? 아니면 사귀는 오빠? 어느 쪽이야?”
신후가 비꼬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