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6화 (6/84)

〈06〉

7년 전 8월 첫 주 수요일.

사람이 살다 보면 자신의 운명이 확 달라지는, 이정표 같은 날이 있다.

오늘이 초연에게는 그런 날이었다.

남들은 여름 휴가를 보내러 오는 부산에 도착한 초연의 표정이 한없이 착찹했다.

‘이초연 씨 휴학하고 뭐 했어요?’

‘백화점 〈MJMJ〉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패션의 최전방에서 고객과 소통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경험들이 앞으로 〈MJ 인터내셔널〉에서 디자인을 할 때 큰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르바이트? 풉. 이초연 씨 부모님은 뭐 하세요?’

‘부모님…… 이요?’

‘아니면 어디 살아요?’

‘그건 왜…….’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옷도 입어본 사람이 만들죠. 그런 싸구려 옷을 입고 면접 보러 오는 사람이 과연 우리 브랜드 고객들이 만족할 만한 디자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고객들 수준 높아요.’

부푼 꿈을 가지고 상경했던 서울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월급이 많다던 대기업 디자이너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디자이너 부띠끄에서 주는 150만원 월급으로는 월세와 생활비, 새벽 퇴근의 택시비까지 감당할 수 없었다.

월급은 받지만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액에 취업 6개월만에 초연은 항복을 선언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출구를 빠져나온 초연이 잠깐 숨을 고르고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니 어디꼬? 이 할미가 갈게.

“됐어 할머니. 나 부산에서 20년 자란 애인데 외지인 취급하지 마.”

- 그래도 니 짐도 많을 낀데.

“살림살이 큰 건 다 중고로 팔아버리고 나머지는 택배 붙였어. 짐 별로 안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아 참, 나 희영이 좀 만나고 갈게. 기다리지 마.”

사실 친구를 만나겠다는 약속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지난 4년 반의 시간에 대한 애도와, 앞으로 남은 날들을 이곳에서 잘 살아갈 거라는 다짐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해서 찾아간 집 근처 방파제에서 신후를 처음 만났다.

음악을 듣느라 뒤에서 오던 오토바이를 발견 못한 것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초연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순간.

부우우웅.

저를 향해 달려오는 오토바이에 얼어붙은 초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쾅!

굉음과 함께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고가 일어난 후였다.

얼마나 빠르게 달렸는지 가로수를 들이받아 엉망이 된 오토바이의 헛바퀴가 아직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 옆에 검은색 가죽 재킷과 바지를 입은 사람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으으으.”

까만 헬멧 아래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초연은 남자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얼른 전화를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신후가 탁한 신음을 뱉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여보세요? 거기 119죠? 여기 교통사고, 아니 오토바이 사고가 났는데 앰뷸런스 좀 보내주세요. 여기가 어디냐면요…….”

위치를 말하려는 순간 남자가 그녀의 핸드폰을 툭 쳤다.

그 바람에 전화가 그녀의 손안에서 빠져나가 포물선을 그리더니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

놀란 초연이 까만 헬멧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걸으려면 곱게 걸어갈 것이지 거기서 왜 갑자기 서.”

신후가 헬멧을 벗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눈부신 햇살 아래 드러났다.

“내가 서건 말건 그건 내 마음이지.”

정신을 차리고 쏘아붙인 초연이 바닥에 뒹구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지금 신후는 일종의 가출 중이었다.

해서 일부러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고, 조부가 만들어준 카드도 쓰지 않는 중이었다.

이제 와서 잡혀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비명횡사할 생각 따위도 없었다.

한데 자신을 죽일 뻔 해놓고 뭐가 저리 당당한가.

“하, 사람 다치게 해놓고 성질은, 젠장.”

툭 한마디 하다가 어깨에 이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 바람에 말끝에 욕설이 붙었다.

그 욕설을 자신에게 향한 거라고 착각한 초연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깟 피 조금 난 거로 안 죽어.”

“죽는지 안 죽는지 네가 알아?”

“그럼 병원 가든가.”

“됐어. 윽!”

신후가 일어나려다가 다시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그제야 엉망으로 찢겨 피와 모레로 엉망이 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생명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분간 오토바이를 타지 못할 정도였다.

초연이 재빨리 신후를 부축했다.

“안 되겠다, 병원 가자.”

조금 전까지 고약하게 굴던 초연이 금세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변하는 모습에 신후가 피식 웃었다.

“이깟 걸로 안 죽는다며.”

“나중에 나한테 뺑소니라고 신고할까 봐 그런다!”

소리를 지르든지 걱정을 하든지 하나를 할 것이지. 지금 눈앞에 이상한 여자는 그 어려운 걸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신후가 웃다 통증에 다시 ‘아아.’ 하며 배를 움켜쥐었다.

“왜 웃어?”

“내가 운전을 했고, 넌 보행자인데 누가 누굴 뺑소니로 신고해.”

“그래도……. 그럼 우리 집 갈래?”

아무리 운수 꼬인 날이고, 상대가 개차반이라도 초연은 측은지심이 있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개차반의 사고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도 영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신후가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렇고 가려고? 그럼 치료비라도 줄게!”

“집에 가자며. 앞장서.”

신후가 저만치 앞서 걸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초연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오토바이는. 안 가져가?”

신후가 그녀 쪽으로 무엇인가를 던졌다. 초연이 낚아챘다. 오토바이 열쇠였다.

“오토바이 운전 가능?”

초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네가 이고 갈래?”

또다시 고개를 가로 짓다가 초연이 대꾸했다.

“그래도 비싸 보이는데……. 누가 가지고 가면 어쩌려고!”

초연은 비싼 오토바이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가는 신후가 의심스러웠다.

“너 이름이 뭐야?”

“이름 알아서 뭐 하게?”

“집에 데리고 가는데 그 정도는 알아야지. 저렇게 비싼 오토바이를 미련 없이 버리고 가는데 혹시 저거 훔친 거 아냐?”

신후가 어이없다는 듯 초연을 바라보았다.

“돈이 많은 부잣집 자식이라는 생각은 안 들고?”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초연이 신후를 훑었다.

사실 신후의 말처럼 부티가 나기는 했다.

굳이 비싼 가죽 재킷과 바지는 차치하고라도 때깔 좋은 얼굴과 자세, 사람을 아랫사람처럼 마구 대하는 태도는 분명 있는 집 자식의 거만함이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긴 싫어, 초연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에게 대항했다.

“그냥 오빠라고 불러.”

몇 걸음 걷다가 힘겨웠는지 신후가 헬멧을 그녀에게 건넸다.

초연이 얼결에 헬멧을 받아들었다.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빴다.

정말 제멋대로 사람을 휘두르는데 도가 튼 인간이었다.

“근데 너 왜 반말 해?”

“딱 봐도 네가 어리니까.”

“네가 노안인지, 내가 동안인지 알 게 뭐야?”

“민증 까 봐.”

“너부터 까 봐.”

초연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여차하면 남자가 깐 신분증보다 한 살 더 높게 부르려던 수작이었다.

하지만 신후는 입을 닫았다.

주민등록증을 깠다가 이름이라도 보고 혹시 자신의 신분을 알고 본가에 연락이라도 할까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오빠라고 부르기 그렇게 싫어?”

“그쪽이 내 친오빠도 아니고 사귀는 오빠도 아닌데 내가 왜 오빠라고 불러?”

“그럼 너 부르고 싶은 거로 불러.”

“오토바이 폭주남이니까 주남이?”

실없는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하는 초연의 모습에 신후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집을 떠난 지 한 달 만의 웃음이었다.

***

초연의 집은 방파제에서 가장 가까운 산 너머에 있었다. 얼핏 보면 바닷가 근처인지 모를 정도였다.

동네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 합쳐봐야 서른 가구 남짓. 해서 이 마을과 어시장 사람들은 서로의 집 숟가락 개수도 아는 사이였다.

학교에서의 작은 일도 할머니의 귀에 들어가는데는 한나절이 넘지 않았다.

애미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신이 친구와 싸우면 더 허리를 굽히고 사과하러 다니는 할머니 때문에 초연은 바르게 살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는 어시장 한쪽에서 바느질 방을 운영했다.

원래는 한복을 만들었지만, 점점 한복 입는 사람이 줄어들자 수선이든, 작은 식탁보든 가리지 않고 바느질을 맡기는 사람이 있다면 뭐든지 만들어 줬다.

학창 시절, 초연은 하교 후 할머니의 가게에 가서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미싱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다.

미싱 소리는 자장가처럼 그녀를 안정시켰고, 공부하는 동안도 귀에 하나도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때부터였다.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키운 게.

할머니는 뭐 하러 밥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하는 이런 일을 배우냐며 안타까워했지만 초연은 할머니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게 좋았다.

할머니와 자신 사이에 또 다른 끈이 연결된 것만 같아서였다.

돈도 못 버는 일이라며 걱정할 때에는 세상이 달라졌다며, 반드시 성공해서 할머니를 편하게 모시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쳤다.

하지만 결국, 초연은 할머니의 걱정대로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할머니!”

“오야, 우리 연이 왔나? 이게 뭐꼬. 니 내 몰래 연애했나?! 웬 머스마고?”

한달음에 두 팔 벌려 나오던 외할머니는 초연의 옆에 서 있는 신후를 보고 우뚝 섰다.

“아니이. 연애는 무슨. 오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났어. 이쪽은 그 상대방.”

“뭐? 니가 사고를 냈다꼬?”

“손녀분이 사고를 낸 게 아니라 제가 실수로 오토바이를 나무에 박았는데 다친 절 구해 준 겁니다, 어르신.”

초연이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신경질적이고 껄렁한 모습과는 다른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의외였다.

“으응, 근데 왜 병원 안 가고 여로 와?”

“별거 아닙니다. 그냥 가도 되는데 손녀분께서 굳이 치료해주고 싶다고 데려왔네요.”

“별거 아니긴……. 우야꼬. 피가 억수로 나네. 일단 들어온나.”

외할머니는 자신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방으로 향하며 신후는 집 안을 휘, 둘러보았다.

예전 시대물에서나 봤을 법한 단층짜리 양옥은 내부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체리 색의 나무 마루와 민트색의 화장실 문.

방 안에는 만들다 만 분홍색의 한복 치마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 옷걸이에는 그 치마와 똑같은 치마가 대여섯 벌 정도 걸려있었다.

치마뿐만이 아니었다.

옥색의 여자 저고리도 대여섯 벌, 옥색의 남자 저고리와 분홍색의 바지 역시 꽤 여러 벌이 차곡차곡 걸려있었다.

“한복 만드십니까? 공업용 미싱 쓰시네요.”

“공업용 미싱도 알고. 그쪽 집 어르신도 바느질하시나? 고향이 어디고?”

반색하는 외할머니의 질문에 신후는 아차 싶었다.

〈MJ 인터내셔널〉은 패션 회사였다.

당연히 그 역시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공장을 여러 번 다녔기에 미싱에 익숙했다.

다만 집안과 인연을 끊겠다는 마음으로 떠난 여행에 굳이 여기서 구구절절 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픈 사람 앞에 두고 호구 조사해? 이름은 주남이래. 앞으로 주남이라고 불러.”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피도 좀 닦아야겠재? 여가 쟤 입을 만한 옷이 있을란가 모리겠다. 연아, 내가 옷 찾아볼 텐께 네가 이불 좀 깔아도.”

그렇게 신후는 어영부영 초연의 집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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