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5화 (5/84)

〈05〉

언제 신후의 차에 탔는지 뒷좌석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솔이 그녀를 재촉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초연 역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연은 할 수 없이 앞 보조석에 탔다.

가는 내내 솔이는 차에 대해 신후에게 질문을 던졌고, 신후는 친절히 대답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는 초연의 마음은 심란했다.

이런 식으로 세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때 신후가 자신과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아빠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평범한 어느 날의 풍경일까.

셋이 함께하는 일상을 그려보다가 초연은 머리를 내저었다.

굳이 자신들을 버리고 간 신후와의 인생을 그려볼 필요는 없다.

어쩌다 기억을 잃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찾는다고 해도 다시 그녀와 솔이를 버릴 사람이니까.

어느새 차는 솔이 다니는 유치원에 도착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이는 배꼽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그냥 있죠? 어차피 지금 내린다고 신세 진 게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언제 들었는지 신후는 어느새 청도 천연염색 박물관을 내비게이션에 찍고 차를 출발했다.

“여기서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생각해보셨습니까?”

앞뒤 잘라먹은 그의 대화에 초연이 되물었다.

“무슨 생각이요?”

“안 했네.”

초연은 그제야 그의 말이 어제저녁 대화의 연장선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시간을 더 드리면 결과가 달라질 만큼 고민 중이십니까?”

“아니에요. 안 해요.”

초연은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고개를 돌린 그가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저희 회사와 콜라보레이션을 하기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할아버지 유언이에요.”

“이 마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마라, 그게 유언이시라고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는 비아냥대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예전부터 자신과 다른 의견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더니 기억을 잃어도 그 못된 버릇은 그대로였다.

“그게 아니라 돈에 넘어가지 말고, 전통 방식을 고수해서 많은 사람이 우리 전통을 알게 해라, 그런 말씀이요.”

“공방을 통해 몇 명, 체험 학습을 통해 몇 명. 그런 방식으로 과연 사람들에게 천연 염색을 홍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방식이라면 죽을 때까지 해도 10만 명도 채 교육하지 못할 텐데.”

“꼭 많은 사람이 알 필요는 없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전통문화에 관해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차라리 공중파에 한 번, 세계 패션쇼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언론에 노출되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겁니까.”

날카로운 신후의 말에 초연이 움찔했다.

항상 사람들이 점점 전통문화를 잊고 사는 걸 안타까워하던 할아버지였다.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가 왔다면 아마 콜라보레이션을 허락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기심이 할아버지의 꿈을 가로막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감정이 울컥했다.

“웁니까?”

덤덤히 묻는 말에 초연은 얼른 손으로 눈 밑을 훔쳤다.

“아니요.”

차게 대답한 초연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초연의 모습이 신후의 눈에 자꾸 거슬렸다.

내 말이 그렇게 심했나.

꽤 독하게 굴길래 조금 꺾어주려던 것인데 여자의 눈물에 신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단단한 대쪽 같은 여자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마치 자신이 나쁜 놈이 된 것 같이 마음이 불편했다.

신후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특별히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단정한 어조로 하는 말은 어떤 결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게는 정말 알 수 없는 여자였다.

***

초연을 들여보낸 후 신후는 바로 차를 돌려 나가는 대신 차에서 잠시 내려 휴식을 취했다.

야트막한 산자락과 시원하게 펼쳐진 논.

오랜만의 자연 풍경을 휘, 한 번 둘러본 신후의 시선이 박물관 앞 게시판에 붙어있는 여자의 사진에 닿았다.

한복을 곱게 갖춰 입고 염색 작업을 하는 사진은 실은 전통염색 체험 수업을 위한 홍보 포스터였다.

[전통 염색장 이범규 장인의 후계자 이초연의 전통염색 체험 수업]

포스터 속의 여자는 그가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런 미소도 지을 수 있는 여자였구나.

그때였다.

그의 뒤로 여자 두 명이 지나가며 수군거렸다.

“어머, 이 선생 보기보다 능력 있네.”

“그러게. 지난번엔 의사 선생이 데려다주더니 오늘은……. 미혼모가 재주도 좋아.”

“재주가 좋으니까 미혼모가 됐지, 아무나 미혼모가 되려고.”

신후는 고개를 돌려 여자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을 잘 들었다는 눈인사를 건넸다.

그의 싸늘하고 오만한 눈빛만으로 여자들은 움찔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후는 이윽고 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네. 메일 자알 받았습니다. [프쉬케] 오뜨 뚜뛰르 참가 자료 디자인부에 돌려 올라오시면 바로 미팅할 수 있도록 세팅해놓겠습니다. 침선장 데이터도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몇 시쯤 도착하실 예정입니까? 도착 즉시 미팅하실 수 있도록…….

“됐고, 회의 내일로 미뤄.”

- 네?

“오늘 늦게나 서울 도착할 것 같으니까 자료만 전달하고 회의는 내일 첫 타임으로 잡아놔.”

- 갑자기요? 그러면 병원은요?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이사님 올라오시면 바로 병원 모시고 가라고 예약 잡아놓으셨는데요.

“병원은 주말에 갈 거니 예약 미뤄.”

- 하지만 회장님께서…….

저 멀리 건물에서 초연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신후는 두말없이 핸드폰을 끊어버렸다.

초연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보여 수군거리는 게 그의 눈에도 잘 보였다.

뒤를 힐끔거리는 모습이 당연히 초연의 귀에도 들리는 듯싶었다.

난처한 듯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초연의 얼굴에는 그를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득 지난번에 왔다던 재윤을 보고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졌다.

“아직도 계셨어요?”

왜 진작 가지 않고 기다려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냐는 뉘앙스였다.

“비 올 것 같은데 타요. 데려다줄 테니.”

때마침 쿠르릉, 하늘에서 다시 한번 천둥이 치고 후두두 굵은 빗줄기가 떨어졌다.

신후는 보조석의 차 문을 열고 그녀가 차에 타길 기다렸다.

초연은 입술을 깨물고 주저했다.

신후는 여유롭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초연을 기다렸다.

얇은 블라우스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반투명한 원을 만드는 걸 지켜보면서.

곧 저만치에서 ‘선생님, 그럼 내일 볼게요.’, ‘조심히 가세요.’ 하는 사람들의 말에 초연이 마지못해 그의 차에 올랐다.

저를 보고 반기지 않는 초연의 모습에도, 볼멘소리에도 이상하게 신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그의 차에 타기는 했지만 초연은 마음이 불편했다.

어쩐지 그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도록 하늘까지 도와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서 그냥 조용히 가도 될 상황에 불쑥 불편한 심기가 튀어나왔다.

“일에 꽤 열정적이시네요.”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까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데 또 기다리셔서요.”

“일이 아니라 초연 씨 때문일 수도 있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초연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태연히 운전을 하는 신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냥 던진 장난에 자신이 예민하게 반응한 건 아닌지. 스스로가 우스울 뿐이었다.

그때 신후가 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갑자기 차는 왜?”

“잠시만 기다려요.”

신후는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초연이 본능적으로 움찔 두 손을 가슴께 모아 자신을 방어했다.

그 모습에 신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묘하게 비웃음을 닮았다.

마치 네까짓 거를 내가 덮치기라도 하냐는 듯한 시선으로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민망함에 초연이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초연이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신후가 운전석과 보조석 사이 뒷자리에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찾았다.

“자요.”

그리고는 찾은 물건을 초연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커다란 타월과 오프숄더 블라우스, 긴 플리츠 스커트였다.

“이걸로 갈아입어요.”

왜 그의 차 안에 여성 옷이 있는지. 누가 입은 옷인지도 모르는 걸 왜 자신을 주는지. 초연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샘플 옷들이니 오해 안 해도 됩니다.”

“오해가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에요.”

하나하나 제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에 어깃장을 부리는 초연의 모습에 신후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호의를 곱게 받아주면 안 됩니까?”

“이봐요, 민신후 씨.”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초연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지긋지긋하게 들러붙는 게 짜증 난 거겠지.

결국, 초연을 이렇게 화나게 만든 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옷 갈아입는 거 훔쳐볼 만큼 변태는 아니니 그냥 갈아입어요. 그러다가 감기 걸립니다.”

한 말 물러서는 말에도 여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옷을 쥔 두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하.’

신후는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면 계속 좋은 구경시켜주시던가.”

신후는 고개를 돌리고 뻔뻔히 여자를 쳐다보았다.

눈을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코로, 입술로, 그리고 그 아래로 떨어졌다.

뭐가 묻기라도 했나 싶어 초연의 시선도 따라 내려갔다.

그러다가 물을 먹어 반투명하게 변한 블라우스를 발견했다. 군데군데 젖은 자국 아래 브래지어의 레이스가 선명했다.

순간 그의 시선이 닿은 유두 끝이 간지러웠다.

놀란 초연 몸을 확 보조석 문 쪽으로 틀었다.

“뒤돌아 있어요.”

단추를 풀어 내리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초연은 이런 모습을 신후가 보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모습에 그제야 신후도 자신의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그락사그락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익숙한 느낌.

신후는 저도 모르게 아침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그는 어떤 여자와 작은 봉고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금처럼 꿈속에서도 쏟아지는 빗줄기에 차 밖의 모습이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얼굴도 뿌옇고 흐렸다.

꿈을 꿀 때면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익숙한 바닷내음에 늘 같은 꿈이라는 걸 알지만 상대방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다 젖었네. 벗어봐. 감기 걸리겠다.’

‘됐어. 너나 닦아.’

‘되긴 뭐가 돼? 이 상황에서도 폼 잡아?’

‘내가 벗으면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 못 할 건 뭐람. 뭐 대단한 게 있다고.’

‘오케이.’

그가 옷을 벗어 던지자 여자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고개 돌려?’

‘그럼 변태처럼 봐야 해? 사람이 옷 갈아입으면 고개 돌리는 게 예의지 계속 쳐다보는 건 변태라고.’

‘그럼 너도 벗어봐.’

‘됐어.’

‘왜. 너도 감기 걸리는 건 똑같을 텐데. 부끄러워? 아니면 느끼는 중?’

‘웃겨 진짜.’

여자가 등을 돌린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여자는 씩씩거리는데 그의 마음속은 간질거리는 느낌.

여자가 등을 돌린 채 블라우스를 벗어 그가 벗어놓은 면티와 함께 비틀어 물기를 짜기 시작했다.

쪼르륵, 고무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뽀얀 왼쪽 어깨에 불주사 자국.

저도 모르게 흉터를 누르자 여자가 펄쩍 뛰며 반응을 했다.

‘뭐 하는 거야? 변태야?’

‘아니, 네 남자친구.’

말을 뱉고 나자마자 신후는 여자가 자신의 애인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귀엽게 느껴졌나?

조금 전까지 톡톡 쏘아대던 모습은 어디 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여린 어깨와 얇은 민소매 안의 봉긋한 가슴.

그 모든 것이 피가 끓었다.

신후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었다.

잠시 놀라 움츠렸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벌려주었다.

톡톡 쏘아대던 말과는 달리 속살은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신후는 한참 동안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

보통의 꿈은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키스의 느낌이 생생했다. 꿈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세상에 이토록 달콤하고 부드러운 게 있을까? 하루 종일 물고 빨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혈기 왕성한 청춘의 피가 그를 재촉했다.

젖은 민소매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말랑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끝으로 작지만 단단하게 선 유두 끝을 건드렸다.

‘오빠…….’

여자가 그의 품 안에서 파르르 떨며 반응했다.

지금껏 당당하고 뾰족하던 여자는 어디 가고 품 안의 여자아이는 비에 젖은 한 떨기 꽃잎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게 더 자극적이었다.

손을 내려 조심스레 음부를 더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애액의 부드러움이 유난히 생생했다.

그의 귓가에 쌕쌕거리며 뱉어내는 뜨거운 숨결도, 끙끙거리는 옅은 신음도.

너무도 생생했다.

여자와의 순간이 생생할수록 갈증은 커져갔다.

손길이 거칠어지고 여자의 교성도 높아졌다. 그의 어깨에 매달려 바들거리는 작은 손도 충분치 않았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마주했던 건 쾌락에 달뜬 초연의 얼굴.

놀라 벌떡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처음 여자의 꿈을 꾸었을 때나 했던 몽정을 또 했음을 깨달았다.

초연의 얼굴을 상대로.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아침에 있었던 어처구니없던 꿈을 생각하며 신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 갈아입었습니까.”

“아직이요!”

초연이 서둘러 대답했지만 이미 그의 몸은 그녀 쪽으로 돌아간 뒤였다.

신후의 시선이 초연의 반쯤 드러난 어깨에 닿았다.

동시에 신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 꿈과 같은 위치에 흉터가 있는 거지?’

신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뭐야?!”

모든 걸 다 알아버린 듯 쏘아보는 눈빛이 거칠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어떻게 할 것 같은 신후의 시선에 초연은 얼어붙었다.

7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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