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4화 (4/84)

〈04〉

허둥지둥 안으로 향하던 초연을 신후가 잡아 세웠다.

“얘기해야 끝나지 않겠습니까? 계속 피하시면 전 계속 여기 있을 수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쌩긋 웃으면서 여유롭게 건네는 말은 제 앞에 와서 앉으라는 도발이었다.

초연이 결심한 얼굴로 그의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 주변으로 늦여름 밤 후덥지근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저희가 이번에 프랑스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MJ 인터내셔널]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 예정인데 이초연 대표님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MJ 인터내셔널]과 전통염색이라니. 어울리지 않네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노릴 수 있죠.”

“사람들이 여태 시도하지 않았던 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묘하게 빈정거림이 느껴지는 말투에 신후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고.”

“당신은 다르다는 건가요?”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하게 그의 신경 줄을 당겼다.

여태 자신을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던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 종종 그를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의 얼굴을 잘 보려고, 혹은 잘 보이고 싶어서.

하지만 이렇게까지 적의 가득한 시선으로 쏘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그의 배경을 알고는 더 그랬다.

“여태 마음먹은 걸 갖지 못한 적이 없어서.”

그는 [MJ 인터내셔널] 후계자니까. 그것이 사람들과 그 사이의 서열을 만들었다.

태생적으로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태어난 맹수의 오만함과 여유로움이 그에게서는 자연스레 배어 나왔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인데 맹수 앞의 초식 동물처럼 심장은 불안하게 콩콩 뛰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에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초연이었다.

“왜 전가요?”

그녀의 질문에 신후가 한 박자 쉬고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쫓아버리려는 그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한 얼굴이었다.

남들이라면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고 불쾌해할 수 있었지만 신후는 대화의 물꼬가 튼 데 기뻐하는 모양새였다.

항상 그랬다. 작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결국엔 상대방이 무너지게 했다.

의기양양한 신후의 모습에 초연은 피가 차게 식었다.

모든 걸 기억 못 하는 듯 굴다가 이렇게 둘만의 추억이 깃든 일을 꺼내 그녀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그가 미웠다.

“돌아가신 이범규 염색장께서는 국내 최고의 장인이셨습니다. 그분의 하나뿐인 수제자니까 이초연 대표님을 찾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 브랜드와 손을 잡는다면 이초연 대표님의 이름은 앞으로 이범규 염색 장인을 능가할 정도로 전 세계에 알려질 것입니다.”

그나마 다른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안도했고, 실망했다.

“말씀하신 대로 전 제자일 뿐입니다. 할아버지 이름을 이용하고 싶으신 건 알겠는데 제가 그 정도 실력도 안 되는데 괜히 할아버지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직 전국에는 많은 염색장께서 계시니 그분들께 직접 부탁을 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적당히 칭찬해주면 들어주리라 생각했는데 초연은 생각보다 그의 목적을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꾹 다문 입매가 인상적이었다.

굳은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꾹 다문 입술 양옆으로 모습을 드러낸 볼 우물이 꽤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흐트러지는 정신을 환기하며 신후가 휘,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방 운영 괜찮습니까?”

갑자기 달라진 화제에 초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맑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까 이장님 말씀을 들어보니 이곳에는 전혀 수익 구조가 없는 것 같더군요.”

오래된 전통 가옥이라 관리와 유지 보수가 만만치 않았다.

체험 학습을 하고 민박 손님을 받아봤자 그 수익이 얼마 되지 않으리라는 건 셈에 조금 빠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 가능할 정도였다.

신후로서는 협상 카드로 돈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겠지만 되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상관없는 분께 그런 이야기 들을 정도로 엉망이지는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공방도, 가족도 지키지 않겠습니까?”

발끈하는 초연의 반응에도 그는 자신만만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까 이야기 중 남편분 병원 자리 지금 상가 주인 텃세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지역이 지역인만큼 아이들도 별로 없어 병원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요.”

남편이라는 단어에 초연이 움찔했다.

지금 신후가 자신과 재윤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그가 재윤을 남편이라고 착각해서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게 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요?”

“아이 병도 있고, 내년에 학교 들어가는데 아이들과 수준 차이로 고심이 깊다 들었습니다.”

솔이의 이야기에 초연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초연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지만 솔이의 병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솔이의 병인 혈우병 D형은 우연히 발병하기도 하지만 유전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에게 혈우병이 있는지 없는지 알 바 없지만, 어찌 되었건 둘이 함께 만든 아이 아니던가.

그래놓고 뻔뻔히 제 앞에서 솔이의 병을 입에 담다니. 분노를 참기 힘들어졌다.

주먹 쥔 초연의 손이 연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뭐예요?”

“이번 기회에 서울로 올라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남편분 병원 자리, 아이 학교, 저희 측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공방 역시 한옥 마을이나 경기도 외곽에 사람들 방문이 용이한 곳에 지어 다시 기반을 잡으실 수 있게 도와드릴 겁니다.”

“…….”

“남편분과 잘 상의해보시죠.”

그 말을 끝으로 신후는 초연의 뒷말을 자른 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번쩍, 신후가 눈을 떴다.

창호지 바른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신후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팔뚝으로 빛을 차단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고 후 신후는 종종 꿈을 꿨다.

꿈의 내용은 항상 달랐지만, 코끝에서 느껴지는 바닷냄새는 한결같았다.

오늘 역시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매번 불분명하던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필이면 초연의 얼굴로.

어제 초연의 모습이 꿈과 뒤섞인 탓이리라 생각했다.

“터가 개판이군.”

상체를 일으키며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엉클어뜨렸다.

그리고는 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침선장 한 번 컨택해 봐.”

- 침선장이요? 그 한복 만드는 명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 이범규 염색장 후계자는요? 그분 설득하러 가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됐어.”

- 웬일이세요? 한 번 시도했다가 포기하실 분이 아닌데…….

“바쁜데 괜히 에너지를 쓸 필요 없지.”

- 그래도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궁금증이라기보다는 처음과 다름없는 그의 실패를 묘하게 반기는 목소리였다.

“이런 거 물을 시간 있으면 빨리 컨텍하는 게 좋을 텐데? 내가 서울 올라가서 바로 보고 받을 텐데 자료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자네 퇴근이 늦어지지 않겠어?”

- 아, 네. 알겠습니다.

역시나 강 비서는 두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신후는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신후가 단장을 끝내고 대청마루에 나왔을 때, 마루에는 솔이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꽤 어려워 보이는 우주 과학 서적이었다.

“아빠 닮아 똑똑한가 보네.”

신후의 말에 콧노래가 뚝 끊겼다.

솔이 벌떡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를 노려보았다.

작은 눈매가 제법 무서웠다.

지금은 어린아이라 그러지, 크고 나면 주변 사람들 꽤나 휘두를 관상이었다.

“의사 선생님 저희 아빠 아니에요. 딱 봐도 하나도 안 닮았는데 아저씨는 어른이면서 그것도 몰라요?”

방실방실 제 엄마 옆에서는 잘 웃더니 새초롬한 눈으로 노려보는 눈매가 꽤 사나웠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그러기엔 네 엄마와 그 아저씨 사이가 보통은 아닌 거 같다고, 나한테 뭐라 하기 전에 그 아저씨가 네 엄마 옆에 들러붙는 거나 막으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솔아!”

어디선가 초연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나타났다.

“유치원 갈 준비해야지, 뭐 하고 있어.”

“아니이. 이 아저씨가.”

“그만해. 이러다가 지각하겠다. 얼른 차에 가서 타.”

억울함을 토로하려던 솔이는 결국 초연의 채근에 두 뺨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대문 밖으로 향해야만 했다.

마치 그는 없는 사람인 듯, 분주히 나갈 채비를 하는 초연을 보다 신후가 한마디 던졌다.

“그 소아과 의사가 남편분이 아닙니까?”

여전히 초연은 그가 없는 사람인 양 신발을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다.

신후는 재빨리 그녀의 옆에 붙었다.

어젯밤 재윤을 남편으로 착각하고 말했을 때 초연은 분명 어떠한 정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아니고 남편도 아니란다.

뭐지 이 여자? 이상하게 화가 났다.

“왜 남편인 척 거짓말을 했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서요.”

“오해 정도는 해도 괜찮고?”

신후의 말투가 삐딱해졌다.

나란히 대문을 넘던 신후가 팔로 대문을 붙잡아 그녀를 막아 세웠다.

덕분에 초연이 그의 팔에 가로막혀 멈춰 섰다.

그때까지 그를 쳐다도 안 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거짓말을 하다 들킨 사람치곤 꽤 살벌한 눈빛이었다. 누가 보면 자기가 거짓말한 사람인 줄 알겠네.

“그건 그쪽이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네요.”

“하긴 남자 쪽에서는 그쪽한테 꽤 호감이 있어 보였으니까.”

신후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초연이 무시하며 그의 팔을 밀쳐내고 지나쳐갔다.

그가 오해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태도에 신후는 괜히 불쾌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 여자가 결혼했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한 번 거슬리니 모든 것이 거슬린다고 딱 그랬다.

처음 볼 때부터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저 여자를 상대로 꿈까지 꾸고 났더니 온갖 것을 다 트집이라도 잡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신후는 짐을 챙겨 대문 밖으로 나갔다.

이미 출발한 줄 알았던 초연이 낡은 차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어어? 이게 왜 안 되지?”

오래된 차라 가끔 퍼지기는 했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저를 스쳐 지나가는 신후의 기운에 초연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엄마 차 고장 난 거야? 그럼 나 지각해?”

“아니야. 수리해주시는 아저씨 부르면 금방 와.”

초연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려고 할 때였다.

“고장 난 것 같은데 타시죠.”

어느새 자신의 고급 세단에 오른 신후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채 말했다.

“아니에요. 보험회사에서 곧 올 거예요. 아, 잠시만요. 네 여보세요. 여기 아지리인데요, 차가 갑자기 시동이 안 걸려서요.”

초연의 차에 걱정스레 앉아있던 솔이가 단박에 차를 박차고 나와 그의 운전석 옆 유리창에 까치발을 하고 섰다.

“와! 아저씨 저 진짜 타봐도 돼요?”

그를 노려보던 세모꼴의 눈이 어느새 반달이 되어 웃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신후 때문에 잔뜩 화가 났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시골 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외제 차의 등장에 솔이의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초연이 전화하며 솔이를 말려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어느새 아이는 홀린 듯 차 뒷좌석을 차지했다.

“네? 오후에나 오실 수 있다고요? 저 지금 청도 천연염색 박물관으로 가야 하는데……. 아뇨,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그래요. 택시……. 네. 할 수 없죠.”

오늘은 청도 천연염색 박물관에서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강의라고 해봤자 지역주민이나 천연 염색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에서 지원받아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라 강사료도 그다지 많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택시라니. 배보다 배꼽이 클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이 시골 동네까지 택시를 부른다 한들 오는데 또 한세월일 터였다.

“엄마! 빨리 타. 안 그럼 나 유치원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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