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엄마!”
초연이 한아름 장 본 물건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 대청마루에서 책을 보던 솔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솔아! 엄마가 뛰지 말랬지?”
한마디 하면서도 이미 초연은 몸을 숙이고 박스를 내려놓은 채 솔이를 안을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아이참, 엄마는.”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려는 듯 아이는 그녀의 품에 담뿍 안겨들어 보드라운 뺨을 그녀의 얼굴에 비벼댔다.
“오늘은 유치원에서 뭐 배웠어?”
“그냥 맨날 하던 거.”
“근데 왜 이렇게 시큰둥해?”
“재미없어.”
솔이는 무척이나 영특했다.
사실 영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뛰어났다.
수많은 아이를 봐온 재윤 역시 솔이가 또래보다 지적, 감성적으로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솔의 유치원 선생님들은 영재 검사를 받아보자고 채근할 정도였다.
예전에야 바깥에서 마음껏 놀 수 없으니 차라리 공부에 취미를 두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미 한글에 구구단, 거기에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밑에서 천자문까지 뗀 솔이에게 가나다라를 배우는 건 고역에 가까운 일이었다.
“주말에 서점 가자. 네가 좋아하는 책 많이 사줄게. 우주 과학 책살까?”
“싫어.”
“싫어?”
“나 축구하면 안 돼?”
출혈이 생기면 큰 위험으로 발전할 수 있기에 초연은 늘 솔이 운동하는 걸 말렸다.
그동안 솔이 역시 독서를 좋아한 탓에 별 충돌 없이 넘어갔는데 이제 친구들과 뛰고 노는 재미를 알아가는 탓인지 요새 들어 부쩍 투정이 잦아졌다.
하지만 작년 다른 도시에서 솔이와 같은 병을 앓던 2학년 아이가 부모 몰래 킥보드를 타다가 사고로 죽은 일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별거 아니었을 출혈이 죽음으로 이어진 걸 알기에 솔이의 투정을 받아주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어두워진 표정에 솔이 얼른 그녀의 목을 감았다.
“아니야, 엄마. 축구 안 하고 싶어.”
“엄마가 곧 축구 하게 해줄게.”
이미 애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찌릿했다.
아까 받아두었던 전화번호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초연은 아이를 제 품에 꼭 안았다.
“정말? 그럼 난 방에 가서 책 마저 볼게. 이따 밥 먹을 때 불러줘!”
솔이 방으로 간 후, 초연은 바삐 몸을 움직였다.
저녁 식사 전, 아침나절 널었던 염색 천들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노랗고 파란 천들을 걷는 그녀의 입꼬리가 어느새 올라갔다.
아무리 속상하고 번잡한 속내도 이렇게 제가 염색한 천들을 만지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연에서 온 것들에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초연은 그렇게 믿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솔이를 거둬준 할아버지를 단순히 돕기 위해서가 아닌, 제 마음이 이끌려 이 일을 물려받았다.
“다친 사람이 웃는 거 위험한 거야. 병원 가자니깐?”
불쑥 천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건 재윤이었다.
“벌써 왔어?”
“으응. 오후 진료가 없어서.”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빨리 준비할게, 잠깐만.”
초연은 마루에 걸린 벽시계를 확인했다.
아지리는 원래 20여 가구가 되지 않는 작은 동네였다.
어제오늘은 슈퍼를 하는 김 씨 할아버지의 손주 결혼식 참석으로 마을이 더욱 텅 비었다.
마을에 남은 건 초연이네, 이장님, 그리고 읍내에 소아과를 운영 중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재윤, 3가구였다.
혼자 식사를 할 이장님이 신경 쓰여 어제저녁부터 세 가족이 모여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약속 시각보다 먼저 온 것을 보니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천을 걷는 초연의 손길이 빨라지는 걸 보고, 재윤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삼겹살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천천히 해. 그렇다가 천 상할라.”
가끔 성질 급한 그녀를 보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해주던 말과 같은 재윤의 말에 초연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이게 다 내 재산인데 허투루 다루겠어?”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 아까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데 괜히 먼저 보냈나 봐.”
“괜찮아.”
“원래 교통사고 나면 근육이 놀라서 당일에는 몰라. 오늘 지나고 내일도 안 좋으면 병원 가고 바로 엑스레이 찍어.”
“의사 선생님 아니랄까 봐 잔소리는.”
“의사 말 좀 듣지?”
“전 소아과 갈 나이가 아닌데요, 선생님.”
“둘이 깨가 쏟아지는데 내가 괜히 온 게 아닌가 몰러. 근디 손님 데리고 온 거니께 너무 미워 말구먼.”
끼익, 낡은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턱을 넘어오는 이장의 농담에 초연과 재윤의 시선이 동시에 대문으로 닿았다.
파란 하늘, 그보다 더 새파란 쪽빛 긴 천들 사이에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건 바로 신후였다.
“안녕하십니까. 또 뵙는군요.”
***
솔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신후가 허공에 대고 인사를 했다.
뽀얗고 예쁘장한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저도 모르게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녁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옷차림은 한눈에 봐도 엄마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게다가 놀라운 건 아이의 나이.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여자에게 이렇게 큰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신후는 놀랐다.
“여긴 어쩐 일로……. 혹시 수리비 때문에 오셨습니까? 어? 근데 주소를 알려드린 기억은 없는데……?”
“이초연 씨?”
재윤의 질문에 신후는 대답 대신 초연을 보고 물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태연히 묻는 신후의 모습에 초연은 그제야 그가 그녀를 잊은 게 아니라 진짜 자신과 아이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을…잃은 건가? 어쩌다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장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잉? 여기 공방에 염색 체험하러 온 손님 아니라 일 때문에 온 거여? 내가 괜한 사람을 데려왔나. 젊은 사람이 이상허네. 내가 공방 체험하러 왔냐, 민박집 구하냐, 했을 때는 가만있더니…….”
이장이 멋쩍은 표정으로 평상에 앉으며 한마디 했다.
그사이 초연은 솔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자신을 유괴범이나 흉악범 취급하는 듯한 초연의 모습에 신후는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초연의 강한 경계심을 겪어본 터라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남편과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신후는 아예 명함을 재윤에게 건넸다.
“MJ 인터내셔널 민신훕니다.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는데 이초연 원장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민, 신후 씨요? 아까와는 이름이 다르네요.”
명함을 받아든 재윤이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명함을 초연에게 내밀었다.
“이전에 드린 건 제 비서의 명함이었습니다. 아까 같은 사고는 대부분 비서가 처리하기 때문에 비서 명함을 드린 겁니다.”
굳이 번거로운 일이 생길까 제 명함을 주지 않았다는 진실은 얘기하지 않았다.
태연한 신후의 대답에 재윤은 그럴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문제는 초연이었다.
“안 해요.”
명함을 받지도 않은 채 초연은 단번에 선을 그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어투였다.
“아직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무엇인지, 이야기도 안 했습니다만?”
“저희 공방은 일체의 상업적 계획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두 사람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고, 주변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팽팽해진 공기를 이장과 재윤은 못 견뎌 하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신후는 오히려 이 분위기를 즐겼다.
견디다 못해 먼저 중재에 나선 건 이장이었다.
“멀리서 왔는데 왜 이렇게 급하게 보내려고 해. 밥이라도 멕이고 보내야지. 솔이 엄마 안 그렇게 봤는데 사람이 참 모질구먼.”
이장의 중재에 어영부영 다섯이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초연은 삼겹살 굽기를 자청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재윤에게 집게를 뺏겼다.
“내가 할게. 너는 앉아서 먹어.”
“아냐. 나는 점심 많이 먹어서 괜찮아. 너 먹어.”
“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거야. 지금까지 구운 거 가져가서 솔이랑 먹어. 봐라. 솔이 엄마 기다리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거.”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 신후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까 교통사고 때도 느낀 거지만 둘의 사이가 참 다정하다 싶다.
특히 여자를 애지중지하는 남자의 모습에 남자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불쑥 솟아났다.
한동안 일에만 파묻혀 지내느라 여자도, 결혼도 멀리하고 지냈는데 본능은 행복한 가정에 질투를 느끼고 있던 모양이다.
부부에게 질투를 느끼는 제가 우스워 신후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사이 초연이 고기를 잘라 그의 앞 접시에 덜어주었다.
“으잉? 이게 뭐여.”
이장이 경악했다.
고기는 거의 없다시피, 지방만 가득한 채 바싹 구워진 삼겹살이 신후의 앞쪽에 탑처럼 쌓여갔다.
‘하필…….’
초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이 사람이 정신이 없어서요. 제가 다시 구워드릴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후가 그릇을 가져가려는 재윤을 저지했다.
“이 원장님과 제가 생각보다 말 안 해도 통하는 구석이 많은가 봅니다.”
신후는 일부러 보란 듯이 삼겹살을 먹으며 초연을 바라보았다.
거짓이 아니었다.
저를 쫓아내려고 일부러 꾀를 내었는지 모르겠지만 비계만 잔뜩 낀 삼겹살을 바싹 구워내는 건 완벽히 그의 취향이었다.
뻔뻔한 그의 모습에 초연의 눈이 한없이 흔들렸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들로 혼란스러운 건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다.
얼른 신후를 쫓아내 이 혼돈을 끝내고 싶기만 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시죠. 지금 출발해도 밤 운전 힘드실 텐데요.”
“아이고, 솔이 엄마 몰랐는데 성격이 참 급하구먼. 밥은 멕이고 이야기 혀, 밥은 멕이고. 어이, 자네도 고기만 먹지 말고, 여기 막걸리도 한잔해봐.”
신후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보란 듯이 이장이 내민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따, 잘 마시네. 안 그라도 맨날 마시는 사람이랑만 술을 마셔서 재미가 없었는디. 솔이 엄마 야박하게 굴지 말고 이부자리 좀 봐줘. 자네 손님 안 하면 내가 데꼬 가서 이부자리 봐주고.”
여든이 가까운 이장을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신후의 시선도 피할 겸 초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는 사랑채에 이부자리 보고 올게요. 이따 저 방에서 묶으시면 돼요. 솔아, 가자. 엄마가 이불 깔아줄게.”
“히잉, 나 더 놀고 싶은데.”
“일찍 자고 일어나야 내일 유치원 가서 또 놀지.”
초연은 가지 않으려는 솔이를 데리고 안채로 올라갔다.
그 사이 재윤과 이장과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솔이가 내후년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이야기, 똑똑한 아이를 이 동네에서 키우기는 아깝단 이야기.
한창 두 사람의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 즈음, 재윤에게 전화가 왔다.
“네. 여보세요. 찬윤이 어머니. 네? 찬윤이 귀에 벌레요? 어쩌다가……. 많이 우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옆 마을 아이가 아프다는 응급 전화에 재윤이 가고, 잠시 후 이장 역시 볼일을 보겠다고 화장실로 갔다.
한여름 밤. 귀뚜라미 소리가 가득한 마당 한가운데 신후는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평생 서울에서만 살던 그였기에 시골에 얽힌 추억도 없는데 괜스레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친근했다.
“아…….”
초연의 낮은 탄식에 신후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연이 잔뜩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와 둘만 남게 된 이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는 게 빤히 보였다.
“수박 잘라 올게요.”
“그만 피하고 얘기 좀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