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2화 (2/84)

〈02〉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좌석에서 살짝 떨어졌다 가라앉는 느낌.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잔혹한 사고 현장의 모습에 신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빗길에 넘어지던 오토바이와 두꺼운 청바지가 찢기고 맨살이 쓸리는 고통.

헬멧이 드르륵 바닥에 갈리며 들리는 굉음.

환영인지 실제인지 모를 고통에 신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여보세요? 이게 무슨 소리인 게냐?

어렴풋이 들리는 성식의 목소리에 신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과 멀쩡한 팔과 다리.

게다가 사고 직전 통화를 하던 성식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걸 보니 큰 사고는 아닌 모양이었다.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신후가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안을 살피는 여자의 모습에 신후는 불쾌해졌다.

- 신후야? 신후야! 무슨 일 생겼어?

“별거 아닙니다. 가벼운 접촉사고입니다.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제가 낸 사고도 아니니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씹어댈지 모를 일이었다.

신후는 귀찮은 표정을 숨긴 채 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예의상 묻는 말에 눈을 마주친 여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

사고는 자신이 쳐놓고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듯한 태도에 신후는 짜증이 났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자해 공갈단이 있나. 예쁘장한 외모가 아까운 직업이군.

“제 블랙박스와 카메라에도 찍혔겠지만, 그 정도로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일부러 여기저기 CCTV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건지 여자가 당황한 채 입을 열었다.

“아, 네. 저도 괜찮아요. 그럼 이만…….”

뒷걸음질로 도망칠 준비를 하는 모습에 이 여자 뭔가 싶었다.

사고를 빌미로 치료비를 뜯어내려다가 카메라가 있다는 걸 깨닫고 내빼기라도 하려는 걸까.

“이보세요. 사람을 이렇게 만들고 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명함 주시죠.”

신후는 순간 저도 모르게 여자의 팔을 낚아챘다.

딱히 수리비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여자를 그냥 보내면 안 된다는 본능이 저지른 일이었다.

평소라면 시간을 잡아먹는 일 따위는 아예 끼어들지도 않았을 그였다.

도망가려는 여자의 반응이 오히려 그를 자극했다.

“제발…….”

그리고 신후는 자신의 이상행동의 원인이 여자의 반응 때문이라는 걸 확신했다.

마치 못 볼 것을 발견하고, 그가 그녀를 납치해 어디 팔아먹을 것 같이 쳐다보는 시선이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순간 뒤통수를 찌르르하게 울리는 통증.

아무래도 추돌의 영향이 영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신후는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그때였다.

“솔이 엄마!”

어디에선가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괜찮아?”

남자는 유심히 여자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가 남자의 시선이 신후가 잡은 여자의 팔목에 닿았다.

“저, 손은 놓으시고 말씀하시죠.”

“누구십니까?”

신후는 여자의 팔을 놓는 대신 여자를 자신의 몸 뒤로 숨겼다.

두 남자 사이에도 알 수 없는 불꽃이 튀었다.

“내가 접촉사고를 좀 냈어.”

뒤에서 그가 잡은 손을 풀려고 애쓰며 여자가 변명했다.

자신이 사고를 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적어도 자해 공갈단은 아닌 듯싶었다.

신후는 손아귀의 힘을 조금 풀었다.

“근데 어떻게 알고 내려왔어? 지금 진료시간 아니야?”

“‘쿵’ 하는 소리가 나길래 내려다봤더니 네 차더라.”

“난 괜찮아. 올라가 봐. 애기들 기다리겠다.”

“이 꼴을 하고 뭐가 괜찮아.”

부부인 건가. 자신의 부인이 큰 사고를 당할 뻔했으니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잊고 떠드는 여자의 모습에 불쾌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락처 주시죠. 보험 처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신후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가 내민 손바닥을 불안하게 응시할 뿐 연락처를 줄 기미가 없었다.

이번에도 나선 건 그녀의 남편이었다.

여자와 그의 차를 살펴본 남자가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재윤 소아·청소년과 의원 원장 안재윤]

“죄송합니다. 차는 제가 변상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쪽도 명함 한 장 주시죠.”

어차피 부부지간이니 누가 변상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문득 수리비를 명목으로 얽힐 일들이 귀찮아졌다.

만약 둘 중의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고 온라인에 올리기라도 한다면.

서민을 상대로 차 수리비나 받는 재벌로 논란이 되기 딱이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명함 한 장 주시죠.”

이번엔 신후가 거절하고 의사가 요청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저를 보는 의사의 눈빛은 제 여자가 저지른 일을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괜히 명함을 주지 않으면 시간만 끌 것 같았다.

신후는 지갑에서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건네는 비서의 이름 석 자가 박힌 명함을 꺼냈다.

***

신후의 차가 도로를 꺾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 초연이 휘청였다.

“괜찮아? 안 되겠다. 올라가서 엑스레이라도 좀 찍어보자.”

“놀라서 다리에 힘이 좀 풀린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럼 올라가서 쉬다가 이따 같이 퇴근해. 얼마 남지 않았어.”

“솔이 기다려. 와 줘서 고마웠어. 연락 오면……. 말해 줘.”

자신을 부축하는 재윤을 뿌리치고 차에 올라탄 초연은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코너를 돌아 그의 병원이 안 보일 때쯤 다시 시동을 끄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아…….”

신후를 본 순간 얼어붙어 있던 몸이 이제야 제 기능을 발휘했다.

자신이 사는 청도 읍내 한복판에서 그를 만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라디오를 통해 만나는 그에게조차 면역력이 없는 그녀에게 이건 너무 참혹한 사고였다.

처음엔 눈앞에 나타난 그를 믿지 못했다.

설마 자신을 찾아온 건가.

어디까지 알고 온 거지?

솔이의 존재를 알고 뺏으려 온 걸까?

두려웠다.

‘괜찮습니까?’

하지만 곧 그의 모습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긴, 잠깐의 일탈로 고작 몇 달 같이 지낸 그녀를 다시 찾을 일은 없지.

이상하게 심장 한쪽이 쿡쿡 쑤셨다.

어차피 그에게 그녀와의 만남은 장난이었다.

제 이름 석 자도 말하기 싫어 대충 남의 이름으로 둘러댈 정도의 인연.

자신의 아이를 뱄다는 말에 기어이 내빼고야 만 미친놈.

앞으로 민신후가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날 일은 없다는 안도감에 그제야 초연은 머리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쉬었다.

다시 만난 그는 텔레비전이나 기사를 통해 가끔 보아온 그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

차에 올라탄 신후는 다시 성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 접촉사고라니. 어쩌다가! 얼마만큼 다친 게냐?

“별거 아닙니다. 그냥 뒤 범퍼 조금 나갔습니다.”

- 다친 데는. 찢어지거나 피 나는 곳은 없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난 후 성식은 유난히 손자인 신후의 건강에 신경 썼다.

물론 신후 밑으로 배다른 동생이 하나 있기도 했지만, 성식의 편애는 누가 보아도 눈에 띌 정도였다.

게다가 신후가 가진 병 때문에 성식은 늘 신후가 다칠까 전전긍긍이었으며, 그건 자신이 사고를 당한 뒤 더 심해졌다.

6년 전 신후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학 졸업 후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 여행을 하던 중 빗길에 트럭이 덮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당시 사고는 꽤 심각해 뇌수술까지 받고 두 달 만에 깨어났다.

총 1년 반 가까이 되는 기간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의문과 불안이 그를 힘들게 했다.

특히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은 느낌.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들은 그에게 심한 두통을 주었다.

이 일로 원래도 제 감정을 드러내는 걸 달가워하지 않던 신후는 더욱 제 속내를 숨겼다.

“정 걱정되시면 사진 찍어 보내드리겠습니다.”

신후의 농담 섞인 대답에 그제야 성식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그러니까 청도는 아랫사람들 보내지 왜 파리에서 오자마자 거길 내려가.

“오자마자 쉬게 해주셨겠습니까.”

- 예끼 이놈. 그럼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 생각이냐? 규림이가 얼마나 괜찮냐. 집안도 괜찮고, 직업도 디자이너이니 널 도와줄 수도 있고.

“다른 것도 제게 줄 게 많겠지요.”

결혼 소리에 신후가 툭, 불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의 새엄마인 지은은 그에게 피를 주던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였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집에 들락거리던 지은은 결국 신후의 부친인 도재와 바람이 나버렸다.

원래도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모친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죽었고, 지은은 떡하니 아들까지 품에 안고 그의 집에 입성했다.

그의 모친이 죽은 뒤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MJ 인터내셔널]의 후계자가 희귀한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을 동네방네 소문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성식도 지은을 도재의 처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지은을 집에 들인지 20여 년.

성식은 이제 규림을 통해 지은을 견제하려 했다.

규림이 신후에게 수혈을 해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지은의 힘을 누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후에게 규림은 자신의 목줄을 새롭게 쥐고 흔들 누군가일 뿐이었다.

물론 성식의 계획대로 되겠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 규림과의 정략결혼을 연애결혼 비스름히 만들고 싶은 성식의 발상 때문이었다.

역시나 신후의 아픈 구석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성식은 말을 돌렸다.

- 그래. 조심해서 갔다 오너라.

그에게는 차라리 다행인 착각이었다.

그에게는 규림과의 선 자리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었으니까.

전화를 끊고, 신후는 직원을 통해 얻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전통 염색 공방 [솔] 대표 이 초연]

어쩌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줄 이 여자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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