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진] 깊숙한 각인 [S공금]
〈01〉
〈본 이야기에 나오는 병명과 증상은 모두 허구입니다.〉
“신후, 아니, 민, 민 이사님이 어쩐 일로…….”
늦은 밤. 사무실에 남아 자신의 짐을 정리하던 초연은 신후의 등장에 놀랐다.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일단락됐고, 직원들은 모두 회식을 하러 갔으니 누군가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참이었다.
“청도로 다시 내려갈 준비. 다 했습니까?”
무심한 투로 질문을 던진 신후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뚜벅뚜벅. 구두가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다.
겨우 그녀의 자리 스탠드만 켜놓은 상태였다.
187cm의 신후가 그녀 쪽으로 다가올수록 격자무늬 천장에 그의 그림자가 더욱 길게 늘어져 그녀를 위축시켰다.
긴장한 그녀와 달리 맞은편 책상에 걸터앉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네. 거의.”
초연은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며 억지로 웃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정말 나와 결혼할 마음. 없습니까?”
팔짱을 낀 채 신후가 물었다.
왼쪽으로 쏘아지는 조명 탓에 그의 오른쪽 이목구비에 깊은 음영이 만들어졌다.
반은 사라진 이목구비가 평소보다 그를 더 낯설게 느껴지게 했다.
“네…….”
그녀의 침묵에 한동안 입을 닫고 있던 신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초연 씨가 서울에 왔다 갔다 하면 솔인 누가 봅니까? 안 선생?”
몇 번이나 재윤과는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신후의 의심은 여전했다.
이젠 의심하면 어떤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그와 자신은 상관없는 사이일 테니.
차라리 자신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요.”
신후가 툭툭,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좋아요, 가요. 가겠다는 사람 안 말리겠습니다.”
행여 또 그녀를 붙잡을 핑곗거리를 만들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순순한 신후의 반응에 오히려 놀란 것은 초연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시렸다.
초연 역시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설 때였다.
마치 잊은 게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후가 말했다.
“대신, 내 건 내놓고 가요.”
“?”
“당신이 말없이 가져가려는 내 것. 그건 놓고 가야지.”
갑자기 차가워진 표정에 초연의 팔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무슨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전 민 이사님 물건 챙긴 게…….”
“솔이.”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초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그가 기억을 찾았을 리가 없다.
다시 만난 이후에도 몇 번 그녀를 의심한 적은 있지만 결국 증거가 없으니 잘 넘어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민 이사님.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초연은 경련이 일 것 같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변명을 꺼내보았지만, 그에게 단칼에 잘렸다.
“언제까지 솔이가 내 아들인 걸 숨기려고 한 거지?”
신후가 그녀의 얼굴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유전자 검사지.
그와 솔이 친부모 자식 간이라는 걸 확인한 증명서.
언제 이런 걸 준비했을까.
놀라움과 두려움에 초연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애가 죽을 뻔한 순간에도 당신은 그 사실을 숨겼어. 왜. 거짓말을 한 거야.”
신후가 이를 악문 채 짓씹듯 말했다.
어느새 그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적대감이 스스럼없이 드러났다.
“어떻게…….”
갑작스러운 한기에 초연의 가는 어깨가 파르르 떨었다.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곧 책상에 걸려 멈춰야만 했다.
그사이 신후가 그녀 쪽으로 다가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동안 잘도 연기했네. 몸까지 섞어놓고 속였어, 날. 내가 평생 기억 못 할 줄 알았어?”
신후가 상체를 점점 뒤로 물리는 초연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겨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의 너른 어깨와 탄탄한 가슴이 지금은 높고 단단한 감옥처럼 그녀를 가두었다.
“그게 아니면 기억 못 하길 바란 건가? 안 선생과 결혼이라도 할 욕심에 말이야.”
사람의 눈이 얼어 죽을 것처럼 차가우면서도 태워 죽일 듯 뜨거울 수 있을까?
온통 뾰족해 제 몸을 쑤시는 것 같은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끝냈어야 했다.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에 또다시 그에게 끌리는 바보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초연은 두려움에 그를 밀어냈지만 단단한 가슴은 꿈적도 안 했다.
“아니면!”
맹수처럼 포효하는 그의 울부짖음에 초연은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할 필요 없어. 당신 변명 따윈 들을 생각 없어. 갈 테면 솔이 두고 가.”
회사에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통했다.
할아버지 대부터 회사를 위해 일한 임원진도 단칼에 잘라냈고, 그의 라인이라 여겼던 사람들도 실수를 하면 다음 날 가차 없이 내보냈다.
그러니 그를 속인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란 사실은 자명했다.
지은의 말처럼 솔이를 그녀에게서 빼앗고 앞으로 영영 볼 수 없게 할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초연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민 이사님, 아니 신후 씨 잘못했어요. 저한테서 솔이만 뺏지 말아 주세요.”
“웃기는군. 그동안 당신이 내게서 빼앗은 6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말이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신후 씨 제발…….”
이번엔 초연이 몸을 돌려 가려는 신후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그가 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재윤의 이름을 발견한 신후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신후가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기에 초연은 얼른 전화에 손을 뻗었다.
전화를 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가 빨랐다.
전화를 먼저 낚아챈 신후가 그녀의 얼굴 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솔이와 안재윤. 둘 중 하나만 골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골라.”
핸드폰을 쥔 그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만일 그의 손에 쥔 것이 핸드폰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었다면 벌써 숨이 막혀 죽었을 거라고 초연은 생각했다.
“솔, 솔이요.”
“그렇다면 다신 이 새끼와 연락할 생각도 하지 마.”
신후가 핸드폰을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퍽 소리와 함께 핸드폰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을 신후가 제 쪽으로 고정했다.
“솔이도, 당신도. 난 내 걸 누구에게 빼앗기고 사는 성미가 아니라서 말이지.”
신후의 조소하는 시선이 벌어진 그녀의 입 속 붉은 혀를 훑었다.
분노와 함께 그의 눈에 비친 욕망을 읽는 건 초연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만난 후 신후는 끊임없이 그녀를 원했고, 탐했다.
기억이 없는 순간에도 이미 둘 사이의 과거를 아는 사람처럼 거침없었다.
그러니 모든 걸 알아버린 지금은 더는 그를 막을 명분도 없었다.
그가 키스를 한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놀라 입을 벌린 사이 신후는 그녀의 입속을 차지해버렸다.
그를 밀어내기 위해 초연이 책상을 집던 손을 드는 순간 오히려 그의 힘에 밀려 책상 위로 누워버렸다.
신후는 단숨에 치마를 허리께까지 끌어올리고 스타킹과 팬티를 벗겼다.
머리는 그를 거부해야 한다고 소리치면서도 이미 수백 번 붙어먹은 몸은 착실히 그에게 반응했다.
음부를 훑는 손길에 저절로 몸이 자르르 떨렸다.
“당신 몸은 입과 다른 소리를 하네. 참 겉과 속이 다른 여자야, 당신은.”
젖은 손날을 들어 올려 형광등 아래 확인하는 신후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이, 이러지 마요.”
치욕스러운 모습에 초연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신후는 오히려 그녀의 두 손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머리 위에 고정시켰다.
“내 옆에 있으려면 이 정도 각오는 해야지.”
어디 버텨볼 수 있으면 버텨보라는 듯 신후가 자신감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아니, 각오할 것도 없지. 적어도 잠자리에서는 잘 맞았잖아, 우리. 소리 질러 봐. 예쁘게.”
이미 그녀의 몸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그의 손길을 버틴다는 건 엄청난 인내를 요구했다.
“으읍…….”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깨문 초연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쾌감에 벌벌 떨면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참, 이 정도로는 만족 못 하지 당신?”
단번에 바지를 벗은 신후가 젖은 구멍에 페니스를 찔러넣었다.
“아으으읏!”
아랫배를 묵직하게 채우는 거대한 존재감에 결국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그 신음을 신호로 신후가 그녀를 마구잡이로 쑤셔대기 시작했다.
애무는 필요 없었다. 잔뜩 부푼 성기가 질 안을 거칠게 드나드는 자체가 엄청난 애무였다.
팔뚝만 한 성기가 좁아터진 질 안을 들락날락하는 것만으로도 온갖 스팟들이 눌려 애액이 뚝뚝 흘러나왔다.
쾌락에 물든 몸은 그의 허리 짓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기 직전이었다.
초연은 애써 남은 이성을 그러모아 허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막으려 애썼다.
“참아보려고? 어디까지?”
아랫배를 커다란 손으로 누르고 질구 안쪽을 빠르게 들락날락하는 움직임에 금세 요의가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그냥 사정이 목적이 아니라 물이 줄줄 흐를 때까지 엉망이 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회사 안에서의 섹스에 그녀가 창피해하라고. 줄줄 물을 흘린 채 옷을 입으며 치욕스러워하라고.
못된 인간. 욕지거리가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오르가슴을 기대하는 질구는 연신 그를 조여댔다.
괴로울 정도로 강렬한 쾌감에 초연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떠.”
신후가 그녀의 턱을 잡고 기어이 제 얼굴에 그녀의 얼굴을 맞췄다.
그의 손에 묻어있던 야한 냄새가 코끝에 훅 밀려들어 왔다.
애액으로 끈적한 손으로 제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신후의 손길에 초연이 할 수 없이 눈을 떠 그를 노려보았다.
“너와 이 짓을 하는 인간이 누구인지 보란 말이야.”
정작 초연이 본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 속에 쾌락으로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그에게 빠져버린 자기 자신.
“네 처음도 마지막도 남자는 민신후밖에 없어. 기억해.”
이미 그가 말하기 전부터 남자는 민신후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자기 자신.
“아흣!”
마지막 추삽질의 끝에서 초연은 놓지 않을 것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
두 달 전.
[공격적 마케팅과 인수합병으로 업계에 파란을 불러오기로 유명한 〈MJ 인터내셔널〉의 민신후 이사가 이번에는 유럽의 대표 명품 브랜드 프쉬케까지 인수에 성공하며 업계에 다시 한번 파장을 예고했습니다.]
운전하는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석 자에 초연의 얼굴이 굳었다.
부지불식 간에 들이닥치는 신후의 소식은 이제 단련될 만도 한데 모른 척하기엔 아직 쉽지 않았다.
[이번 인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민신후 〈MJ 인터내셔널〉 총괄 이사는 ‘프랑스의 대표적 브랜드 프쉬케의 인수는 〈MJ 인터내셔널〉이 유럽 시장으로 도약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텔레비전도 안 보고 살 수는 없으니 그쪽이 적당히 피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이에 따라 현재 〈MJ 인터내셔널〉의 주가는 연일 상승세입니다.]
혼잣말을 내뱉으면서도 초연은 라디오 채널을 끝내 돌리지 않았다.
대신 창밖 저 멀리 하늘 어디 즈음을 바라보았다.
늦은 장마라더니 하늘이 어둡다. 곧 비가 몰아닥칠 기세였다.
“그 인간이 떠나던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왔지.”
그녀의 눈매가 어느새 쓸쓸해졌다.
띠리리리.
그때 전화 한 통이 그녀의 사색을 방해했다.
아들의 주치의인 재윤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초연은 다급히 물었다.
“알아봤어?”
- 미안.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혈액 보유자 수가 환자 수보다 너무 적다 보니까 재력 있는 환자들이 모두 독점해서 일반 환자한테까지 차례가 오긴 힘든 모양이야.
그녀의 아들 솔은 혈우병 D형 환자였다.
D형의 경우 보험 적용이 되지않는 치료제를 사용해야 했고, 가격은 1회당 천만 원이 넘을 정도로 비쌌다.
그것도 만약 치료제 맞는 시간이 지체되면 치료제를 쓰기도 전에 죽을 수 있었다.
방법은 하나. 특정 응고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혈액을 석 달에 한 번씩 직접 수혈해야만 했다.
문제는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니 특정 응고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핏값은 매우 고가로 형성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아들이 과다 출혈의 위험 없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면.
초연은 얼마가 들든 아들에게 그 피를 수혈하고만 싶었다.
“혹시 모임 연락처를 내가 알 수 있을까?”
- 소용없을 거야.
“그래도.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가서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싶어서 그래.”
- 하, 알겠어. 연락처 찍어줄 테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마.
전화가 끊기고 잠시 후 문자로 모르는 번호가 떴다.
열 자리의 숫자에 초연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희망이 없다고 한들 0.1%의 가능성에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게 엄마의 마음이었다.
“제발 솔이가 내년에는 마음 편히 학교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저도 모르게 기도를 읊으며 열 자리 숫자에 시선이 팔린 사이,
쾅!
귓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초연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가 뒤로 팍 쏠렸다.
“아!”
복부와 뒤통수에 가해지는 통증에 초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픈 순간에도 자신이 사고를 냈음을 직감했다.
초연은 차에서 내려 목덜미를 감싸고 앞차 운전석 쪽으로 향했다.
하필 비싼 외제 차였다.
이런 차는 범퍼를 교체하는 데만도 꽤 돈이 많이 나간다던데.
앞으로 몇 달 치 생활비가 날아갈 걸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똑똑.
까맣게 선팅된 창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 정도 추돌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닐 텐데.
“저기, 창문 한 번 내려 보시겠어요? 괜찮으세요?”
창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미간이 어느새 좁혀졌다.
이윽고 내려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신후의 얼굴에 초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