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39화 (139/142)

그레이 측 각성자들의 후처리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레이에게 가담한 각성자 및 비각성자 전원이 검거되었고, 각종 범죄에 대한 기소가 차근차근히 이루어졌다.

[윤주성 본부장 구속]

[진나진 가이드 구속]

[김지설 에스퍼 구속]

존경받던 유명인들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각성자용 특별 구치소로 끌려가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온라인에 도배되었다.

유명 각성자, 정치인, 백만장자, 연예인, 스포츠 스타, 그 외 수많은 셀럽…….

세상의 민낯이 속속들이 펼쳐지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평화를 되찾은 사람들은, 유명인사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며 종종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통쾌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제는 좀 지겨우니까 그만 보고 싶기도 했고, 강한 분노와 함께 애잔한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돔 안의 이들은 바깥의 약자들에게 조금도 감정을 이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밖에 있던 사람들은 끌려 들어가는 이들을 보며 측은함을 느끼기도 한다는 게 약간은 아이러니였다.

[임시 국제연합 감독기구 창설]

또한, 혹시 놓쳤을지도 모르는 가담자나 교묘하게 은폐된 부정부패의 끈을 찾아내기 위한 임시 국제연합 감독기구도 새로 생겨났다.

해당 기관의 최상부에는 이창결 부장과 백율 부장이 나란히 앉았다.

국제기구의 책임자가 되기에는 그들의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는 없었다.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예. 그렇게 합시다.

만장일치로 역삼 본부 멤버들이 선임되었다.

이후에는 막대한 업무량으로 일 처리가 다소 늦어지는 경우는 종종 생겼지만, 응당 죗값을 치러야 하는 자가 명단에서 빠지는 실수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인적 청산뿐 아니라 그레이가 약탈하거나 훔친 재화 회수도 빠르게 마쳤다.

역삼 본부에서 류하늘이 가져간 S급 던전석을 수거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렇게 펜트하우스 바깥의 세상이 급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영원은 일주일가량을 대부분 잠에 빠진 채로 보냈다.

가끔 일어나 멍한 표정으로 물을 몇 모금 마시거나 간단히 몸을 씻기는 했지만, 금방 다시 잠들었다.

엄청난 피로감을 이길 수 없었다.

먹을 기운이 나지 않아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다. 여현이 죽을 가져다주었을 때 한두 입 먹다가 포기한 게 그나마 먹은 것의 전부였다.

가이드의 물리력을 엄청나게 사용해댄 후유증인 듯했다.

생각해보면, 베이징 이후로 고통 속에만 있었다. 그러다가 깨어난 뒤 곧장 돔 앞으로 가서 가이드의 물리력을 다시 썼으니 긴 회복기가 필요한 것도 당연했다.

여현은 그렇게 자다 깨기만 반복하는 영원의 곁을 맴돌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도 영원의 치료로 식도가 회복된 지는 한참 지났지만, 혼자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 무언가를 챙겨 먹지는 않았다.

영원의 영양공급이 걱정되는 마음에 링거를 달아줄 때만 본인의 몸에도 비슷한 것을 달아 둘 뿐이었다.

여현은 당장 영원과 대화할 수 없다는 것에 특별히 괴로움을 느끼진 않았다.

어차피 깨어날 걸 아니까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다.

영원은 분명 서서히 회복해가고 있었고, 영원의 환상 속에서 보냈던 몇 년을 생각하면 이 정도 기다림은 고생이랄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여현은 그냥 잠든 영원의 곁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미미한 표정 변화도 과거에 비하면 엄청났기에 지켜보는 시간이 덜 단조롭기도 했다.

사락.

손을 뻗고 싶은 기분이 주체가 안 될 때는 가끔 영원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다시 깨어나면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 장면을 그려보았다.

평안히 이어질 나날들.

그런 미래가 올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리면서도 따뜻해져 왔다.

쿵. 쿵.

자신의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세상이 지금처럼 평화롭기만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닥치지 않은 미래의 재난을 걱정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인 것 같은데…… 정말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와의 매칭률이 더 높아지는 것만도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이제는 그녀에게 각인되었다는 사실마저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각인이 있든 없든 종속된 건 똑같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덕분에 더욱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쁘기도 했다.

‘완전히 미친 건가.’

‘뭐가 됐든 상관없어.’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건 그녀가 혹시라도 변심하여 떠나갈 미래뿐이었다.

‘…….’

그녀가 없으면 이제 정말 숨도 쉴 수 없을 터였다.

이제 이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 자체가 그녀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힘을 쓰기 위해서만 그녀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의 기반부터 끔찍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현은 그녀가 간절하다는 이유로 불안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여현은 곁에 계속 머무르겠다는 영원의 약속을 믿기로 정했다.

‘그리고 절대로 내 가이드를 잃지 않게, 내가 무엇이든 하면 돼.’

밑바닥에 있는 집착과 소유욕을 다 꺼내서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어두운 마음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녀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제 세상이기에, 자신의 전부를 주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사락.

잠시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밤바람이 여현과 영원의 곁을 지나갔다.

은은히 들어오는 달빛에 잠든 영원의 얼굴 한편이 조금 더 밝게 보였다.

그 모습이 다시 여현의 심장을 울렁이게 했다.

쿵. 쿵.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이 급히 일었다. 여현은 이 강렬한 충동이 어쩌면 영원토록 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만은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동시에 저를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녀는 제 가이드고, 자신은 그녀의 에스퍼니까.

그 사실을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알길 바랐다.

그래서 영원의 의사는 듣지도 않고 각인되기로 했는지도 몰랐다. 김여현을 심영원에게 주고 싶고,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서.

사락.

여현은 다시 밤바람을 느끼며 영원을 기다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말을 걸어주는 순간이 빨리 오길 바라며.

***

영원은 꿈을 꾸었다.

이전 세계의 과거가 보였다.

악몽 같은 내용이지만, 이상하게도 기분만은 편안한 꿈이었다.

차원을 넘어오기 전의 예전 같았으면 숨을 헐떡이며 깨어나 한참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을 꿈.

그러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아무런 동요 없이 깨어나 몇 번 눈을 깜빡인 다음, 구체적인 내용은 다 잊어버렸다.

어떤 끔찍한 과거가 불현듯 덮쳐와도 이곳의 여현이 자신을 지켜주리라는 걸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영원은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던 여현의 인기척을 느꼈다.

“여현아.”

영원은 고개를 돌려 곁에 앉아 있는 여현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잠긴 목소리로 덧붙였다.

“……꿈을 꿨어.”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대충 세상이 종말에 다가서고 있는 와중에 그걸 아는 건 나뿐인 내용이었어.”

꿈과 그녀의 과거가 섞여 나왔다.

“그래서 중압감에 미칠 것 같은데, 갑자기 주변에 몰려드는 건 세상의 멸망에는 관심도 없는, 정신 나간 미친놈들뿐인 거 있지.”

꿈속과 과거의 영원은 지금보다 더 어렸고, 더 여렸다. 그래서 조금 위태로웠다.

“나는 계속 아무렇지 않게 무던한 척을 했는데,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이 썩어 들어가는 순간이 꽤 많았던 것 같아.”

잠들 수 없던 몇몇 밤을 잊을 수 없다.

“…….”

영원이 털어놓은 꿈 이야기에, 여현은 특별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영원의 곁에 더 가까이 와 영원을 일으켜 안아주었다.

꽉.

그는 대답 없이 영원을 더 거세게 안아줄 뿐이었다.

“…….”

영원은 악몽에 관해 더 말할 수 없었다. 기분이 너무 먹먹해져서.

여현이 그동안 꾸어 온 악몽의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서로의 악몽을 안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기에,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위험해 보인다는 이유로 도망치지는 않았다.

정말 잘한 일이었다.

“악몽 속의 나는 도망치고 싶었어.”

영원은 더욱 작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는 없어서 도망친 적은 없어.”

여현 역시 그의 삶의 고난과 시련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도망친 적 없었을 것이다.

“여현아. 너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어?”

여현은 오랫동안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뱉은 대답은 영원이 짐작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언젠가 가이드님을 만나게 될 줄 알았나 봐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낭만적인 대답에 영원은 웃어버렸다.

웃음과 함께 긴장이 더욱 풀렸고, 정말로 꿈의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게 됐다.

영원은 더욱 여현의 품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여현이 물었다.

“지금도,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으세요?”

도망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영원토록 이곳에 있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그러나 영원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답을 정하기까지 망설임이 길어졌다.

“심영원 가이드님.”

그러다 들려온 여현의 부름은 다정했다.

“도망은 생각도 마세요.”

동시에 어쩐지 엄청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말투였다.

“우리가 떨어지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

“가이드님이 우리 집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세상이 멸망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여현은 차분하게 덧붙였다.

영원이 떠나려고 하면, 저 스스로 세상을 먼저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도 들렸다.

“제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조금도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요.”

여현은 영원과 시선을 맞추었다.

“세상보다는 가이드님이에요.”

다소 광기 어린 눈빛이었다.

“…….”

그러나 영원은 그를 부담스럽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계속해서 저렇게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했다.

세상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서로가 더 소중하다고 영원히 말해주었으면.

“……응.”

그녀 역시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는 항상 김여현이 중요했으니까.

그의 타이틀이 ‘영원의 헌신자’인 것은 이런 이유였을까.

영원토록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심영원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영원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여현아.”

“네.”

“나 절대 안 도망가.”

“그러셔야 해요.”

그의 굳은 진심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럼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요.”

영원은 어떤 짓이라도 가능한 힘을 지닌 그가 두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해할 힘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에도 그는 자신을 지켜줄 테니까.

“가이드님.”

그리고 여현이 말했다.

“괜찮으시면, 내려가서 같이 밥 드실래요?”

“응.”

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자.”

영원이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둘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영원이 그레이와의 싸움을 마치면 먹겠다고 했던 분짜와 카레 우동이 준비되어 있었다.

영원과 여현은 그렇게 첫 식사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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