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38화 (138/142)

제12장

여현과 영원의 펜트하우스

높은 하늘에서 빛나던 연성진이 사라졌다.

스르륵.

동시에 그 중앙에 떠 있던 그레이 딘하우스의 몸이 천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지표면 부근에서 목을 꺾어 위를 보고 있던 각성자들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그들은 그레이의 추락이 계속 끝나지 않고 이어지기만을 바랐다.

꿈에 그리던 미래가 완전히 박살 났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 있게.

그러나 그런 바람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쿵.

탑의 잔해 위로 그레이의 몸이 떨어졌다.

콰직.

투두둑.

엄청난 높이에서 추락한 덕에, 그레이의 몸이 탑의 잔해를 다시 부수면서 흐트러뜨렸다.

“…….”

그레이의 추락으로 다친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 주변의 이들은 끔찍한 내상이라도 입은 듯한 표정으로 괴로워했다.

“아냐…….”

“이건 아니야…….”

각성자 한 명이 천천히 그레이의 몸이 떨어진 곳으로 다가갔다.

“우윽.”

저 위에서 여현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압박을 견디며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으. 그레이, 그레이…….”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뻗어 그레이의 어깨를 잡아보았다. 몸은 차갑지 않았다. 그레이는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숨도 쉬는 듯했다.

그러나 어깨를 아무리 흔들어도 그레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를 잡고 흔들던 각성자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금방 눈물까지 차올랐다.

“그레이, 이건 아니잖아요…….”

죽었나?

그런 건가?

그레이의 몸에는 골절은커녕 가벼운 상처 하나 남지 않은 듯해 보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외형이나 온기가 변함없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몸은 그냥 시체 같았다.

‘살아 있지만, 사실상 시체야.’

이상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앞으로 이 상태에서 절대로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왜냐면 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심영원과 김여현이 그레이 딘하우스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 가두었을 테니까.

“…….”

더는 그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툭.

눈물이 떨어졌다.

“…….”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탑 잔해 근처의 이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절망에 찬 표정이기만 했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절대자로 군림할 줄만 알았던 그레이 딘하우스가 눈을 감고 그저 널브러져 있었다.

밀랍인형같이 연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돔에 제 발로 들어온 각성자들은 알았다. 그들에게 올 끝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걸.

몇몇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려 조금이라도 영원과 여현에게서 멀어져 보려고 했다.

여현의 에너지가 가하는 압박이 거세도, 필사적으로 애를 쓰면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10초도 이어지지 못했다.

“여현아.”

영원이 그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현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영원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원하는 바를 파악했다.

“욱!”

여현이 뿜는 에너지가 더 급격하게 치솟았다.

“아악!”

조금이라도 도망쳐보려고 애쓰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고꾸라졌다.

이제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기도, 입을 벌려 악을 쓰는 것마저도 힘들어졌다.

그리고 상공에서, 영원은 이곳의 소식을 세상 곳곳에 전하기 위해 다시 드론을 공중에 띄웠다.

약간 귀찮기는 해도, 싸움이 끝났다는 걸 알릴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곳에서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센터의 각성자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금방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또다시 전 세계를 향해 송출되었다.

―안녕. 다시 켰어요.

―여기는 돔이 있던 자리인데.

영원은 드론을 빙글 돌리며 주변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레이 딘하우스와의 싸움은 끝났어요.

―아, 이반은 사실 우리 편이었고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

이반이 사실은 스파이였다는 것은 놀라웠지만 충격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저기 있는 게, 딘하우스.

먼 바닥에 있는 그레이가 화면 안에 작게 담겼다.

상당히 멀리 있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레이 딘하우스가 무엇인가의 잔해 속에 누워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죽었나?

아닌가?

영원의 영상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영원은 금방 답을 주었다.

―그레이 딘하우스를 쉽게 죽일 생각은 없어요.

―고통은 오래 지속될 겁니다.

우웅.

영원의 힘이 그레이를 움직였다.

스르륵.

쿵.

땅이 열리더니, 그레이의 몸이 아무도 볼 수 없는 저 멀리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쿵.

바닥에 그레이의 몸이 떨어지는 소리는 매우 작게 들리기만 했다.

이어서 영원은 아래에 있는 각성자들과 멀리서 아직 붙잡히지 않은 소수의 그레이 측 각성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권유했다.

―센터에서 거의 다 잡았다고는 하지만, 저 밑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직 안 잡힌 그레이 측 사람들이 있기는 한 모양이죠.

―솔직히, 이제 서로 힘 안 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영원은 아래를 보고 덧붙였다.

―투항해.

―어쨌든 그편이 너희를 위해 좋을 거야.

투항한다고 선처를 해줄 거라는 의미는 절대 아닐 터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 말에 따랐다.

툭.

툭.

그레이 측 각성자들은 알아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으윽……. 제발…….”

“자비를…….”

후회는 한참 늦었다.

영원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자비를 구걸하는 것에 반응해줄 생각은 없었다. 말하는 데에 더 에너지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가이드님, 밖도 정말 거의 다 정리되었어요.

때마침 인이어에서 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주성 본부장도 잡았습니다.

윤주성 본부장. 역삼 본부 총책임자였던 배신자의 끝도 역시 허무하고 비참할 예정이었다.

화연은 본부장이 체포되면서 얼마나 울고불고 매달리며 애원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더 시간을 들여 설명할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다.

백율 부장의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저희가 이제 금방 가서 돔 안에 있던 인원까지 전원 검거하겠습니다.

“네.”

영원은 두 사람에게 답한 뒤, 여현에게 가까이 가 기대었다.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한 후폭풍이 다소 늦게 밀려오는 듯했다.

베이징에서 에스퍼들의 그릇을 한꺼번에 막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돔을 없애는 것도 몸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여현은 조심스럽게 영원의 몸을 마주 끌어안고는 영원을 다정하게 도닥여주었다.

“……힘들어.”

급격히 밀려오는 근육통에 영원이 울상을 짓자, 여현이 영원의 몸을 안아 들었다. 몸에서 힘을 더 풀고 편히 있으라는 의미였다.

영원은 그 배려를 거부하지 않았다. 공중에 침대라도 생긴 것처럼 몸에 힘을 풀고 여현에게 편하게 기댔다.

그 순간, 영원은 기다려왔던 알람을 듣게 되었다.

도로롱.

[심영원, SSS급 퀘스트 스테이지5 클리어 확인]

드디어, 정말 귀찮은 일이 끝날 때가 온 듯했다. 영원은 잠시 눈을 감고 길게 호흡을 뱉었다.

‘정말 끝.’

‘진짜 끝인가 봐.’

[약속된 보상이 주어집니다]

[세계수가 다시 약속합니다]

[이곳 차원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하겠다고]

영원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해냈구나.’

긴장이 더욱 풀렸다.

‘뭔가 허무하지만 좋아.’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게임인데 어찌어찌 엔딩을 보고 나니 갑자기 아련해져 버리는 느낌이랄까?’

[그대가 원할 때까지 계속]

영원은 세계수가 전한 말을 보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빈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작게 보이는 몸짓에, 여현도 영원이 세계수로부터 약속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정말로, 이제 돌아가서 쉴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제 다시는 집에서 안 나와.’

영원은 굳세게 다짐했다.

‘앞으로 그레이 딘하우스 같은 시련은 없을 테니까.’

앞으로도 게이트 웨이브 비슷한 거야 또 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SSS급 게이트가 연속해서 열린다 해도 자신과 여현은 그 정도는 가벼이 막아낼 터였다.

‘아니, 아니.’

‘나랑 여현이 둘이서 말고.’

‘나는 그냥 펜트하우스에 있고, 여현이만 나가서 처리할 수 있는 정도의 일만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야지.’

‘왜 굳이 내가 고생할 생각을 해.’

‘불길한 가정은 굳이 할 필요가 없어.’

영원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양심 없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에도 지쳐 먼 미래는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여현아.”

영원은 작게 여현을 불렀다.

“네.”

“고생 많았어.”

“…….”

“항상 그렇지만, 고마워.”

영원은 여현이 방금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지 알았다.

영원이 그레이의 연성진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부터 시작된 여현의 긴장은 아직도 멎지 않고 있었다.

여현은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서 영원을 놓쳤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불안했을까.

“여현아.”

“……네.”

“이제 금방 집으로 돌아가자.”

영원은 여현도 어서 긴장을 다 풀길 바라며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목에 손을 대고 짧게 가이딩을 했다. 그를 안심시키는 데에 그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매칭률이 90%가 넘는 가이드의 가이딩이 에스퍼에게 줄 수 있는 평안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테니까.

“…….”

정말로 효과는 있는 듯했다. 여현에게 남아 있던 긴장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었다.

영원은 그릇이 다 찬 것을 확인하고는 계속 여현을 안은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현아. 집으로 돌아가면 나가지 않고 거기에 계속 있을 거야. 그래도 될까?”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계속 계세요.”

그는 힘을 주어 덧붙이기도 했다.

“진짜 정말 안 나갈 거야. 지박령 될지도 몰라.”

“네. 그러시는 편이 저도 좋아요. 지박령 쪽은 좀 아니지만.”

여현의 대답에 영원은 작게 웃은 다음 여현에게 더 깊이 기댔다.

“나는 좀 피곤해서…… 잠시 잘게.”

영원은 그 말대로 금방 눈을 감고 잠들었다. 어디에서나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드는 속성은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이후 여현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환성에게 양해를 구했다.

“최환성 에스퍼님, 그럼…… 인수인계 부탁드립니다.”

“……아. 네, 네. 먼저 돌아가시죠.”

환성은 과거에 자신이 알던 여현과 한참 괴리가 있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렇게 여현은 백율 부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환성에게 제주도 근처의 현장을 넘기고는 서울로 향했다.

중간중간에 영원의 선명한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멈추었지만, 그것만을 제외하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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