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37화 (137/142)

여현의 힘이 그레이의 양발을 연성진 정중앙에 고정했다.

저항할 새도 없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무력이었다. 그레이는 뒤늦게 그에게는 지금 전담가이드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다.

쿵.

그레이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고, 양 무릎이 공중에 만들어진 바닥과 거세게 충돌했다.

“아윽…….”

무릎이 깨질 듯한 고통은 가벼운 시작에 불과했다.

“읍.”

영원이 과거에 남긴 심장의 상처에 끔찍한 통증이 일었다. 그레이는 급히 심장을 부여잡고 여러 번 헛구역질했다.

“욱. 우욱.”

스스로가 완전히 무력하게 느껴졌다.

‘고통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되나? 이보다 더한 고통이 올까?’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안 돼.’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레이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고개만을 들어 영원과 여현을 보았다.

굴욕적인 자세였다.

그런데 둘 다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 무표정하기만 했다.

즐거워하거나 분노하는 기색 모두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지도 않았다. 거의 완성된 연성진의 끝부분 문양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웅.

그래서 공포가 더욱 커졌다.

‘왜 그래.’

‘왜 그렇게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아무 일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두 사람이 마치 자신을 단죄하러 온 완고한 신처럼 보였다.

그레이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우우웅.

그러다 결국 영원이 연성진을 완성하는 시점이 왔다. 그레이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영원은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레이의 저항에 연성진의 발동이 잠깐 늦어졌지만, 그뿐이었다. 끝이 오고 있다. 그 사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연성진은 완성되었고, 이제 발동까지 시작되었다.

우우우우웅.

연성진의 문양을 따라 은은한 빛이 퍼졌다.

“왜! 왜 그러는데! 포에버, K! 너희는 끝까지 너희가 지키려는 인간들과는 달리 특별할 거야! 왜 너희와 비슷한 내게 이러는 거야!”

그레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영원이나 여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점점 더 밝아지는 연성진만을 주시했다.

“대체 왜 나를 두고 평범한 인간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이입하려고 해!”

그레이는 끝을 받아들일 수 없어 진심으로 절규했다.

그는 갈수록 어려지는 것처럼 행동했다. 바닥에 엎드려 다섯 살 아이가 된 것처럼 악을 썼다.

“포에버, K! 응?”

허무했다.

이렇게 끝나는 삶이라니.

그러나 영원과 여현은 변함없이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레이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자신만만하던 그레이 딘하우스 역시도,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태연하듯 본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태연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만은 특별하니까, 본인의 끝만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인가…….’

영원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타박.

영원은 완성된 연성진에 발을 들이면서 입을 열었다.

“딘하우스. 그만 소리 질러. 정신 사나우니까.”

그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

그레이가 조금 전 탑 아래의 각성자를 죽이며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조용히 해.’

영원은 그레이를 내려다봤다.

“그래. 나도 내가 특별하다는 것쯤이야 알아.”

영원은 관리자들이 확실히 심영원을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확신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은 특별하다.

단지 제가 지닌 특별함은 결이 상당히 다른 특별함일 뿐이다.

‘유별나도록 귀찮은 쪽으로 특별할 뿐인 거지.’

그러니 자기 자신의 특별함에 저렇게까지 도취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특별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쉽게 망가트릴 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삶이 내 삶보다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영원은 절대적인 정의라는 게 있어 세상이 그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넘어서는 안 되는 선 같은 것이 있다고는 생각했다.

“살다 보면 이것만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 싶은 짓들이 있잖아.”

가령, 제 오락을 위해 타인의 삶을 망친다거나.

그럴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아야 했다.

“그 기준마저 모호할 때가 많긴 하지만, 설령 누가 허락한다 해도 내 이성과 양심이 그래선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이 있잖아?”

“…….”

“그런 건 좀 피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레이 딘하우스는 영원이 생각하는 그 선 저 너머로 한참 넘어갔다.

게다가 이쪽 세계에는 영원보다도 더 그런 행동을 싫어하는 김여현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영원은 그의 신념을 곁에서 지지하며 도와주고 싶었다.

‘최애가 바란다는데.’

‘아, 내가 또 그건 못 참지.’

그래서 그레이 딘하우스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귀차니스트인 심영원이 이 귀찮은 걸 다 감수하고서라도 그를 처치하러 가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품게 만들었다.

그레이 딘하우스는 사고를 치기 전에 심영원이 김여현을 위하는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먼저 깊이 고민해보았어야 했다.

‘그걸 생각 못 할 정도로 멍청한 덕에 이제 앞으로 기나긴 후회와 참회와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되겠지.’

영원은 항상 거슬렸던 그의 이명을 작게 속으로 읊어보고는 다시 입을 뗐다.

“그레이 딘하우스.”

“…….”

“세계수가 너를 ‘유일자’라고 명명해주었다고 하더라.”

보통 그 지위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들을 때마다,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가장 강한 자로 불리는 사람이 나 말고 너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좀 그래.”

“…….”

“짝퉁은 그만 정리할 때가 됐지?”

우우우우웅.

연성진에 강렬한 빛이 급속도로 번졌다.

“유일한 대제는 나야.”

“아…… 아악!”

어느 세계에 가든, 그곳에서 가장 강한 유일자는 심영원 한 명뿐인 게 편하고, 가장 안정적이다.

‘뭐, 여현이는 논외로 하고.’

우우웅.

연성진이 더욱 밝게 빛났다.

사아아아아.

영원은 연성진을 완전히 발동시키는 데에 큰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대가는 그레이가 치를 계약이니까.

들리지 않지만 청성이 그레이에게, 영원이 조건을 적어내려간 계약을 말해주고 있을 터였다. 물론 그레이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

“아아아아악!”

【■■■■■■■】

청성이 말하고, 그레이가 절규로 답하는 시간이었다.

우우웅.

연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레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 그레이 자신에게 막대한 고통을 퍼붓는.

오로지 그레이 딘하우스의 고통만을 위한 궁극의 연금술.

비유하자면, 영원은 그레이의 무한도 카드를 빼앗아 한정 없이 긁는 짓을 해버린 것이다.

“아아악!”

우우웅.

그레이는 그래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심영원, 우리에게는 악의의 문제가 있어!”

뇌가 제 기능을 하기만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도, 다시 영원에게 외쳤다.

“연금술을 택한 이들에게는, 감정의 자리를 악의가 대신 채우게 된다고!”

영원은 아무런 동요 없이 그 말을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가 느껴온 결핍을 절대 이해하지 못해!”

그래, 옛날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영원은 과거에도 그레이에게 비슷한 내용의 말을 들은 적 있었다.

대제에게는 진정한 애정이 있을 수가 없다고.

‘근데 아까 말했잖아. 여현이가 나를 이해한다고.’

그레이가 지적하는 문제가, 영원에게는 전혀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면, 감정을 느끼니까.

영원은 잠시 기다렸다가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라는 거 알잖아. 감정이 없던 세계는, 과거의 세계니까.”

차원을 건너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보게 됐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감정.

“딘하우스. 너도 알잖아.”

그레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여긴 그 세계가 아니야.”

“…….”

딘하우스는 정말로 당황한 것 같았다.

“…….”

“감정? 감정이 있어? 있다고 해도, 그 감정이 영원할 것 같아?”

영원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영원하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어.”

“…….”

그래, 영원한 감정을 확신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지도 모른다. 세상은 변하니까. 그 와중에 나의 감정만은 다를 것이라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일 수 있다.

여현과 자신은 영원히 함께할 관계라 여기며 그에게 자신의 삶을 던지는 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모험일지도.

하지만 그러고 싶다.

여현을 만났고,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었기에.

“알 수 없는 미래에 관심 없어. 그냥 지금 이 감정을 확신해.”

“…….”

“이런 확신은 다시 오지 않아.”

어차피 미래를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이 순간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나는 내 확신을 믿어.”

“…….”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내 확신은 다 맞더라고.”

이 확신이 원하는 미래를 불러오게 할 것이다.

“그럼, 잘 가.”

“……아니, 아니!”

“넌 끝이야.”

오래 돌아왔다. 긴 시간을 거쳐, 이제 그레이의 끝이 왔다.

***

쿵.

그레이는 고통 속에 떨어졌다.

그리고 영원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왔다.

연금술의 시전자가 전하는 작별의 인사였다.

―그레이 딘하우스. 너는 내가 너와 닮았다고 했지. 그래, 약간은 인정해. 우리는 닮은 데가 있어.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고, 대제의 힘을 쓸 때 자비가 없다는 면이 확실히 비슷하지.

“아악!”

그레이는 끔찍한 고통에 휩싸여 소리 질렀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비명이었다.

―너도 내가 친절하지 않다는 걸 알았잖아.

차디찬 웃음이 입혀진 음성이었다.

영원의 싸늘한 시선이 떠올랐다.

여현을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잊게 되지만, 그녀는 원래 항상 그렇게 냉담하고 차가운 편이었다.

―그레이 딘하우스.

―너도, 나도, 이곳에서는 감정을 느껴.

―여긴 과거가 아니고. 너는 에스퍼고, 나는 가이드니까.

영원은 자신이 여현에게 품은 감정이 정말 감정이 맞는지, 사랑인지 아닌지 갈팡질팡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감정을 인지한 뒤, 잠시 고민해 보다가, 확신했을 뿐이었다.

영원은 감정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너는.

―네가 감정이 없다고 믿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 너도 알게 되지 않았어? 감정은 없었던 게 아니더라고.

―감정이 없다는 믿음만 남아 있었던 거지.

―거기 떨어진 곳에서, 너는 네 안에 생명과 삶에 대한 애정이 정말 넘쳤었다는 걸 느낄 거야.

―그걸 우리는 감정이라고 해.

―네가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매일 새로이 느끼도록 해. 네 감정으로.

영원은 그레이를 후벼팠다.

너는 그 안에서 감정을 통해서도 고통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 그건 그레이에게 새로운 지옥문을 열어주는 말이었다.

그리고 더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조용했다.

아주 조용했다.

그레이의 모든 형체가 사라졌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주변에는 암흑밖에 없었다.

감각도, 생각도 모두 고통으로 물들었다.

‘…….’

끝은 없을 터였다.

누구도 그레이 딘하우스를 구하러 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에게는 김여현 같은 존재가 없었다. 마지막 전담가이드도 스스로 사지로 보냈다.

‘…….’

홀로 남겨졌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수 없다.

아무리 애써도 목숨을 끊는 방법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레이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힘을 사용한 진정한 대가를 치를 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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