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36화 (136/142)

그레이는 현실을 회피했다.

“이반, 이반?”

그는 재차 환성에게 물었다.

“최환성이라니까. 그건 내 본명이 아니라고.”

사르륵.

이반이 그의 탈을 벗었다.

검은 피부가 점점 밝아졌다. 동양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레이도 아는 S급 에스퍼, 최환성의 얼굴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었다.

“…….”

충격적이었다.

이반 하이제렌이 오랫동안 최환성이었고, 그걸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그레이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그를 의심조차 한 적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말도 안 되잖아!’

그레이는 뒤늦게야 최환성 에스퍼의 종적이 오랫동안 모호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사실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원래 최환성은 괴행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고, 저 이반 하이제렌이 직접 최환성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다고 여러 번 단언했기 때문에.

‘최환성 에스퍼가 박의총 가이드와 절친하다는 건 그냥 표면적인 얘기고, 다른 인간들이 다 그렇듯 욕망에 휩쓸려 우리 편이 될 인물이야.’

‘그래?’

‘어. 걱정하지 마. 분명히 우리에게 이끌려 들어올 테니까. 정의나 우정 따위를 믿어? 우리 다 알잖아. 그런 건 없어.’

이반의 말을 믿었다.

게다가 한국 센터의 뒤통수를 치고 와 그의 편이 된 진나진 가이드, 김지설 에스퍼 역시 듣기로는 최환성은 나중에 합류할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다 속은 거야.’

‘한국에서 온 각성자들은 이반의 말을 믿고 내게 다시 그 말을 옮긴 것뿐이야. 사실은 전부 다 거짓이었어.’

‘다들 최환성이 짠 판에 놀아난 거야!’

‘그렇다면 고요련도? 그래서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던 건가?’

그냥 넘겨 왔던 갖가지 것들에 대한 의심이 연이어 차올랐다. 그러면서 그레이의 세계가 그 중심부터 어그러졌다.

견고하다 믿고 있었던 것들의 연약한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냐. 아냐.’

‘여긴 끝이 아니야!’

‘절대로 끝이어서는 안 돼!’

그레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시선을 어디에도 고정하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해.’

‘다 부숴.’

내면의 악의가 속삭였다. 그레이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 순간 네가 해야 하는 걸 해.’

지금이 진짜 힘을 보일 때였다. 그레이는 금기와도 같은 연성진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누구도 해낼 수 없다고 했던 연성.

아무도 그 결과를 보지 못했던 미지의 연성.

그레이는 궁극의 비기를 온 세상에 펼치기로 했다.

‘다 끝내.’

비슷한 크기의 힘을 지닌 연금술사를 제물로 바쳐, 이 세상에 진정한 악의를 구현하는 궁극의 연금술을 보여줄 때가 왔다.

심영원과 함께 영원한 고통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후엔 모두가 미칠 것이다.

다 망하고, 다 죽게 될 터였다.

그 자신까지 포함해서 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레이는 이 힘을 무기로 영원을 협박할 생각도 버렸다.

그저 광기에 찬 웃음을 보이며 공중에 금빛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우웅.

그레이의 양손이 빛났다. 그는 의지만으로 그의 눈앞에 거대한 금빛의 연성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아악.

“포에버.”

축구장보다도 더 큰 크기의 금빛 원 중간에 선 그레이가 영원을 불렀다.

“진짜 대제는 나야.”

영원은 그레이가 아니라 그가 그리는 연성진만을 보고 있었다.

“너는 아류일 뿐이고.”

그레이는 영원이 이 연금술의 정체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다시 주도권을 찾아온 기분에 웃음이 피어났다.

“너는 내가 진정한 유일자가 되는 걸 봐.”

“…….”

영원은 그레이의 말에는 계속 반응하지 않았다. 연성진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나는 너 따위에 비할 수 없이, 유일하고, 유일하며, 유일해.”

푸른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그레이는 이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이곳 차원의 모든 것들을 다 망친 다음 저 심영원에게 자신이 더 강하다는 걸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영원이 고개를 들고 시선을 움직여 그레이의 눈을 보았다.

파직.

동시에 그레이가 그리던 연성진에 균열이 생겼다.

“…….”

혼신의 힘을 다한 시도마저 영원이 무력화한 것이다.

“…….”

영원의 힘에 연성진의 일부가 지워졌다.

무엇이 그려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않으면, 게다가 연성진을 수정하는 쪽의 힘이 더 막강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뭐야.’

‘뭐야!’

영원은 그레이가 평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성진을 가르고 그 안으로 들어왔다.

타박. 타박.

영원은 연성진의 경계를 넘어와, 그 중심부 가까이에 더욱 다가섰다.

지지지지직.

연성진의 반대편도 찢어졌다.

그레이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떤 연성진이 그려질지 다 알고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건데?’

‘……대체 뭐야?’

타인이 개입할 수 없는 연성진이었다.

아무도 개입할 수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믿음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버렸다.

‘유일자는 나잖아!’

그레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속으로 소리쳤다.

‘가장 특별한 건 나여야 하잖아!’

영원의 개입으로 인해, 그레이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까지 다 잃었다.

“딘하우스.”

“…….”

“너는 이거 완성 못 해.”

영원이 고저 없이 말했다.

“괜히 해봤자 제물이 되는 건 너야. 내가 계속 연성진을 수정할 테니까. 적당히 관둬. 물론 그런다고 행복한 끝이 오진 않겠지만.”

그레이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는 영원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영원의 말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래 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나는 이 기본형을 토대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했어.”

영원은 허세나 허풍 없이 진실만을 말했다.

파직.

그런데도 그레이는 승복하지 않았다.

영원이 저렇게 말은 해도,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더 이상 정확히 예측해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르륵.

그런데 또, 궁극의 비기라고 생각했던 연성진의 일부가 지워졌다.

그다음엔 영원이 채워 넣은 문장이 다시 비워진 곳을 메웠다.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그레이의 심장을 쥐어짰다. 다시 예고 없는 고통이 온 것이다.

“우욱!”

그레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덜덜 떨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제대로 짚어낼 수도 없었다.

왜 스카이에 대한 세뇌가 사라진 거지?

이반 하이제렌은 언제부터 이반 하이제렌이 아니었지? 빌은 왜 그렇게 쉽게 죽은 거지?

대체 포에버는 어떻게 이 연금술이 시작도 되기 전에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개입할 수 있었던 거지?

갑자기 모든 게 꿈 같았다.

꿈이면, 정신을 차리면 눈을 뜨고 깨어날까?

그레이는 정말로 그답지 않은 생각도 해 보았다.

모두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어떻게 이걸 해냈는지 알 수도 없어서 정신세계까지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다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왜!’

“딘하우스. 네 수는 진작 다 읽혔어. 발악해도 소용없어.”

“…….”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지 않을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귀찮아.”

타박. 타박.

영원은 다시 공중을 걸어오듯 밟고 더욱 가까이 왔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끝이 어떻게 될지만 미리 너에게 알려줄게.”

영원은 조금 더 작게 속삭였다.

“그냥 너는 죽고, 완벽하게 잊히게 될 거야.”

사형선고는 가볍게 뱉어졌다. 영원은 그 말에 큰 무게를 싣지 않았다.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영원과 눈을 마주쳤다. 그레이는 절망에 찬 표정이었고, 영원은 무표정했다.

“잊어? 모두가 나를?”

“응.”

“그럴 수 없어. 나는 유일자야! 세계수도 나를 유일자로 선택했어! 내가 나의 힘으로 얼마나 많은 걸 망가뜨릴 수 있는데! 내가 어떻게 죽어! 그럴 수는 없어! 그런 일은 없어!”

“…….”

그레이는 소리를 내질렀다. 어린아이가 악을 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넌 죽어. 그리고 잊힐 거야.”

“아니라고! 이 세상에 남은 이들 누구도 나를 완벽하게 잊을 수는 없어!”

“글쎄.”

영원은 똑같이 감정적으로 반응해주지 않고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인간은 원래 망각의 동물이었다. 한두 세대만 지나도, 딘하우스의 이름의 무게는 아주 가벼워질 거고, 결국 잊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 너는 나를 못 잊어!”

그레이는 영원과 시선을 마주하고서 소리 질렀다.

그의 외침은 저 아래서 삶을 애원하던 이들의 절규와 닮아 있었다. 영원이 그 내용에 조금도 귀 기울이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딘하우스.”

“…….”

“내가 무언가를 해내기로 정하면 해내는 사람인가, 거기엔 사실 의문의 여지가 약간 있어. 사실 나는 계획한 대로 잘 못 사는 편이라.”

“……우아으.”

그레이는 다시 심장에 가해지는 고통에 허덕였다.

“그런데. 나는 안 해내기로 정하면, 그건 정말로 안 해내. 솔직히 나는 안 하는 데에 사실 더 능력이 있는 타입인 것 같아.”

“……흐으.”

그레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그래서, 안 하는 쪽은 하는 쪽보다 더 자신 있어.”

“…….”

“너에 대해 다시는 생각 안 하는 거, 그것만큼 쉬운 게 어딨어. 너를 고통뿐인 지옥에 두고, 너를 잊는 거? 아주 자신 있어.”

영원은 심장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그레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게다가 너도 알잖아. 너는 기억될 가치도 없어.”

영원은 환히 웃어주었다.

“아냐!”

그레이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니긴. 너도 알았잖아.”

“…….”

“악의에 사로잡혀 있다, 결국 끔찍한 끝을 맞이할 거라고.”

“…….”

“네가 그걸 몰랐다면, 너는 정말로 멍청한 거고.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어차피 결말은 같으니까.”

그레이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에게 이유 없이 끔찍한 짓을 했다. 그걸 본인이 몰랐을 리가 없다. 몰랐다 해도 상관없다. 그 경우엔, 스스로가 멍청한 걸 탓해야지.

영원은 모든 순간에 정의를 찾으려 애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의를 찾고만 싶은 순간이 가끔 온다는 건 알았다.

지금이 그럴 때였다.

우웅.

영원은 그레이의 연성진을 그녀의 뜻대로 수정했다. 그레이가 시작한 연성진이니, 대가는 그가 치르게 될 터였다.

‘남의 한도로 남의 카드 긁는 거지.’

그레이는 영원이 그리는 것이 무엇인지 대강 눈치챈 다음에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연금술사로서도 그녀는 당해낼 수 없이 강한 존재였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지 마.”

그레이는 울먹이며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포에버. 알잖아. 우린 특별해.”

그레이는 허공을 기어가 손을 뻗어 영원의 발목이라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영원이 두어 걸음 물러났고, 영원의 뒤에 있던 여현이 그의 힘으로 그레이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그레이의 행동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손은 허공만을 헤집었다.

“포에버. 대체 누가 우릴 이해해?”

그레이는 숨을 쥐어짜내 물었다.

“포에버. 모든 인간은 결국 너를 질리게…….”

“여현이가.”

“…….”

“김여현이 나를 이해해.”

영원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너는 절대로 못 하고.”

‘누군가 나를 이해한다면 그건 김여현이지 그레이 딘하우스는 아니야.’

영원은 감정 없는 눈길로 그레이를 보면서, 눈빛으로도 그에게 똑같은 말을 전했다.

우우웅.

정말 거의 끝이었다.

그레이 딘하우스의 영원한 고통을 제물로, 그레이 그 자신에게 고통만을 안길 연성진의 완성이 목전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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