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은 그레이가 한눈팔 틈을 조금도 주지 않고 연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쾅!
콰광!
콰과광!
그 와중에 그레이의 탑은 완전히 붕괴해 지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아윽!”
탑 아래의 각성자들은 여현이 뿜는 에너지가 주는 압박에 허덕이며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조차도 벅차했고, 당연히 붕괴하는 탑 밑에서도 도망치지 못했다.
“그레이! K! 누구든 제발, 자비를!”
“살려줘요! 잘못했으니까 이렇게 쉽게 죽이진 말아요!”
무력감과 절망에 빠진 채 절규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퍼버벅!
“우악!”
탑의 붕괴에 휘말려 있던 이들 중 일부는 그레이가 가한 힘의 여파에 맞아 쓰러졌다.
쾅!
“아악!”
퍽.
“욱!”
그레이는 자신의 힘이 같은 편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힘을 사용했다.
실제로 그의 공격은 여러 번 여현이 아니라 같은 편을 향해 날아가서 꽂혔다.
퍼버버벅.
“으악!”
환성은 싸늘한 눈으로 탑 아래를 훑었다.
‘다들 자기 목숨의 무게는 알아도, 타인의 목숨은 너무나 가볍다고 생각하지.’
그레이의 힘 때문에 그의 편인 각성자들 상당수가 죽어가고 있었다.
‘이 안에 있던 각성자들은 다 똑같아.’
‘그레이나, 저들이나. 자기애에만 도취해 타인의 가치에는 관심도 없다가, 죽을 때가 되어야 애원하지.’
그래서 지금 죽어가는 이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쾅!
영원은 특별한 힘을 쓰지는 않으면서, 여현의 곁에서 그와 싸우는 그레이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레이가 세뇌나 연금술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바로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레이의 마지막 시도를 깔끔하게 막아낸 후에 여유롭게 제대로 반격해 줄 생각이었다.
그레이와 이 돔, 그리고 그에게 협조한 각성자들 모두에게 제대로 된 끝을 고해 주는 것이다.
‘다 마친 다음엔 펜트하우스에 가서 푹 쉴 거야.’
‘매우매우매우매우 오래오래오래오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해서 정말로 전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기만 할 거야……!’
영원은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도, 긴장을 조금도 풀지 않았다.
레이더를 통해 빌 슈허겔랑과 환성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난은 꼭 그레이에게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으니.
―영원아. 빌 슈허겔랑을 놓치지 말아줘.
―그가 신종교를 통해 여태껏 해둔 세뇌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인이어를 통해 들었던 요련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쾅!
그때쯤 그레이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여현의 공격은 어찌어찌 잘 막아내고 있는데…… 왜인지, 영원이 무언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이미 알아챈 상태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야. 포에버는 왜 나를 보고만 있어?’
‘뭘 찾는 거야?’
처음엔 영원이 공격에 가세하지 않는 덕에 방어에 쓰이는 힘이 적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이상하단 생각이 짙어졌다.
‘포에버는 뭘 기다리는 거지?’
‘왜 저런 신중한 눈을 하는 거야?’
쾅!
‘내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면 그에 즉각 반응하기 위해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건가?’
그레이는 갈수록 불안해졌다.
‘게다가, 심장에 언제 다시 고통이 올지 몰라.’
영원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언제라도 다시 심장에 고통이 찾아올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모두 불안을 키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스카이를 부르려고 했을 때 그 느낌은 뭐였지?’
‘왜 원했던 반응이 안 온 거지?’
‘혹시 스카이에게 걸린 세뇌에 포에버가 무언가 관여한 건가?’
‘생각해보면, 포에버는 스카이가 스쳐 지나가는데도 살려뒀잖아? 왜? 몰랐나? 다른 이유가 있나?’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레이는 스카이에게 남긴 세뇌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현이 쉴 틈을 안 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스카이를 신경 쓰려고 하면 바로 여현이 빈틈을 파고들어와 자신의 목을 벨 것만 같았다.
‘저 미친 망할 K는 언제 공격을 쉬는 거야!’
모든 게 통제를 벗어난 느낌에 미칠 것 같았다.
‘XXXX!’
그레이는 속으로 쌍욕을 여러 번 뱉었다. 그리고는 빌을 곁눈질로 힐긋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눈이 마주친 빌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K의 공격에 맞서며 시간은 꽤 끌어준 덕에 준비가 완료된 모양이었다.
그레이는 초조한 마음을 걷어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K.”
이제 협박을 개시할 때였다.
쾅!
“그리고 포에버.”
그레이는 여현과의 거센 충돌 후에 영원까지 불렀다.
여현이나 영원은 특별히 그의 부름에 반응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그들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음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제안하…….”
“됐어.”
그레이는 무게를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첫 문장부터 의도대로 끝맺지 못했다.
영원이 다 듣기도 전에 단호하게 거절부터 하는 바람에.
쾅!
여현 역시 그레이의 말은 더 들어줄 가치가 없다는 영원의 뜻에 동의하는지 그레이를 기다려주지 않고 다시 공격을 가하기만 했다.
쾅!
그레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얘네 둘 다 왜들 이래?’
‘왜 튕기는 거야?’
콰쾅!
다시 거센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레이는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K, 포에버. 너희 내 말을…….”
“됐다니까.”
그런데 또 영원이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거절했다.
“포에…….”
“싫어. 거절할게.”
영원은 조지나에게도 그랬듯, 그레이와도 무언가를 협상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너희, 나는 세뇌로 밖에 있는 스카ㅇ……!”
“그거 끝났어.”
그레이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도 영원은 차분히 답했다.
그레이는 한 박자 늦게 영원이 한 말의 뜻을 파악했다.
“…… 뭐?”
“류하늘이 네 세뇌로부터 벗어난 걸 아직도 몰랐어?”
그레이의 동공이 더 거세게 흔들렸다.
‘뭐?’
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그때 여현이 일부러 약간의 시간을 두고 공격을 쉬어갔다.
그래서 그레이는 스카이에게 힘을 뻗었고, 영원이 말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 말이…….’
‘이건 말도 안 돼.’
그레이는 충격을 받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빌!”
그레이는 곧장 다른 백업 플랜을 찾는 건지, 빌 슈허겔랑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빌 슈허겔랑은 그레이의 표정을 보고 급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무언가를 하려는 듯했다.
그레이가 그가 직접 세뇌한 류하늘을 통해 무언가를 해내지는 못해도, 빌이 한 세뇌를 통해서는 해낼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레……ㅇ.”
빌은 준비된 무언가를 세상에 보여주려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푹.
“…….”
곁에 있던 이반의 깔끔한 공격에 빌 슈허겔랑의 모든 행동이 멎었다.
그의 심장박동이나 호흡도 마찬가지였다.
생명 활동이 멈춘 빌 슈허겔랑의 몸이 서서히 뒤로 쓰러졌다. 그대로 그 몸은 지상으로 자유 낙하했다.
매우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레이의 눈에는 이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잡혔다.
쿵.
콰지직.
빌의 몸이 탑의 잔해와 충돌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쿠쿵.
남은 탑의 잔해 일부가 저 아래서 추가로 부서지는 듯했다.
빌 슈허겔랑이 이반과 함께 있던 자리에는 이반만이 남아 있었다.
“…….”
그레이는 이 말도 안 되는 살인을 똑똑히 봤다.
‘환영이야? 내 정신에 누가 개입할 수 있어? 아닐 텐데?’
살인자는 바로 그레이 자신의 최측근이라 불리는 같은 편의 이반 하이제렌이었다.
“뭐…….”
그레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하늘과의 세뇌가 끊긴 것보다 더욱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네가, 어떻게.
네가, 어째서?
“…….”
그레이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이반은 그레이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한 채로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레이가 늘 지어 보이던 것과 닮은 웃음이었다.
“누굴 죽일 때 유언을 꼭 들어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
“너도 그러지 않을 때가 더 많았으면서.”
이반은 자신이 빌 슈허겔랑의 유언도 듣지 않고 바로 죽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레이도 그동안 수많은 약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자신 역시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니겠냐며.
그러나 그건 그레이의 의문에 대한 진정한 답은 되지 못했다.
‘어떻게, 나의 편인 네가?’
그리고 환성은 그 뱉어지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최환성.”
“…….”
“내 이름이야. 이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환성은 추가적인 설명 없이 영원과 여현이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여현 에스퍼님은 오랜만이고, 심영원 가이드님께는 처음 인사드리네요. 반갑습니다. 심영원 가이드님.”
“네. 처음 뵙네요. 반가워요.”
영원이 자연스럽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절대 엮이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현판의 주인공을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입해서야 드디어 만난 것이다.
‘주인공이라니. 엮이면 엄청 귀찮아질 게 분명해서 만나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귀찮은 일을 한 번에 싹 흡입해서 처리해주는 진공청소기 같은 사람인 게 생각보다 꽤 호감이었다.
―각국 센터의 긴밀한 협조 끝에 외부 그레이 측 각성자들 99% 검거 완료했습니다.
―남은 일부도, 위치는 대강 파악이 된 상태입니다. 시간만 조금 더 있으면 100% 달성할 것 같습니다.
때마침 인이어를 타고 이창결 부장과 백율 부장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리기도 했다.
돔 밖에서 전의를 상실한 그레이의 협조자들이, 전의에 불타는 각국 센터 각성자들 손에 벌써 싹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귀찮은 자잘한 것들 알아서 깨끗이 처리해주는 우리 성실한 센터 각성자님들 역시 최고!’
영원은 갑자기 있지도 않았던 센터 각성자들의 성실함에 대한 존경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성실하게 살 생각 절대 없지만.’
‘덕분에 스윗 홈이 더 가까워졌어……!’
이 순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 표정인 건 그레이 딘하우스 혼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