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나에 이어 S급 에스퍼 두 명도 돔에서 나왔다. 세 사람 모두 자발적으로 나온 표정은 아니었다.
에스퍼 중 한 명은 이미 반쯤 미쳐서 울고 있었다.
“흐으. 으으…….”
영원은 그레이가 시간을 끌기 위해 조지나와 에스퍼 둘을 급히 돔 밖으로 내보낸 것임을 바로 알아챘다.
‘돔 안에서 잘 방어할 자신이 없나 봐. 급한 모양이야.’
그러니 그레이가 돔 안에서 무슨 짓을 벌이려고 애쓰고 있든, 최대한 빨리 돔부터 날리는 게 그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영원은 당장 돔을 부수지는 않았다.
환성이 훔쳐 요련을 통해 전달했던 그레이의 메모, 화연과 요련이 인이어로 전하는 조언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가이드님. 당장 돔부터 날리는 게 민간인 피해를 줄이는 데는 그리 좋은 전략이 아닐 수 있어요.
―맞아, 영원아. 그레이는 자기 목숨이 위협을 받는 순간, 세계 전역에 있는 사람들을 함께 죽일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레이는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모를 테니, 이쪽에서 오히려 잠시 시간을 끌어야 해요. 류하늘도 만나봐야 하고요.
―잠시만 시간을 주면, 이쪽 일을 우리가 빨리 끝낼게.
영원은 돔을 부수는 일은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고, 조지나가 준비해 온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으로 가만히 조지나를 주시했다.
여현 역시 영원의 곁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
조지나는 돔 밖으로 나온 바로 그 순간부터 넘을 수 없는 적이 가까이에 있음을 느꼈다.
소름이 끼쳤다.
무언가를 인식하려고 애쓴 것이 전혀 아닌데도, 엄청난 무력을 소유한 여현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넓게 펼쳐둔 에너지가 숨을 죄는 듯한 압박감 때문에.
“욱…….”
동물적인 감각이 전하는 두려움이 온몸에 퍼졌다.
‘뭐야, 이 힘 뭐야!’
김여현은 원래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기로 유명한 에스퍼였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생각해도 엄청난 낭비였다.
‘대체…….’
다만 전담가이드가 바로 옆에 있으니, 힘을 아무리 많이 쏟아내도 그릇은 비워지지 않을 듯했다.
‘진짜로 이거 뭐야.’
‘말도 안 돼.’
‘인간이 이렇게 강한 게 말이 돼?’
조지나는 압도적인 힘으로 돔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여현을 보자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조금 남아 있던 여유가 완전히 증발했다. 공황이 왔다. 어지럽고, 숨이 가빠졌다.
함께 나온 S급 에스퍼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그레이에게 먼저 살해당하고 싶지는 않아 나왔을 뿐, 어떠한 사명감으로 영원이나 여현과 대적하려는 것은 조금도 아니었다.
“제발…….”
“선처를…….”
두 명의 에스퍼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애원부터 시작했다.
영원과 여현은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입술을 달싹이는 조지나만 무표정하게 보았다.
“……ㅍ, 포에버.”
조지나는 잠시 후 힘겹게 입을 열어,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네, 네게……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약속할게. 훨씬 더 재밌고 즐거운 세상을, 네가 원하…….”
“그거 말고.”
“…….”
“다른 영양가 있는 얘기는 없는 거야?”
영원은 협상의 여지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어…… 어…….”
조지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있잖아. 그레이에게는 자폭의 수가 있어. SSSSS급 게이트가 있었다면, 그 이상도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거 아냐?”
조지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레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자 없던 자신감이 생기는 듯도 했다.
“그리고 그레이는 외부 사람들의 의식에 침투해서 네가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의 정신을 망가뜨릴 거야!”
“음…….”
이미 영원이 다 아는 것들이었다.
“그레이가 그 계획을 실행하려고 스카이를 내보냈어. 넌 그걸 놓쳤고……!”
“알아. 신종교.”
“…….”
“류하늘이 서울로 가고 있는 것도.”
조지나가 지적한 것과는 달리 영원은 하늘을 놓친 게 아니었다. 류하늘에게 용건이 있다는 화연의 말에 따라 화연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늘을 잠시 보내준 것뿐이었다.
영원은 지금도 류하늘이 어떤 경로로 서울에 접근하고 있는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아…….”
조지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입이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그 순간 영원은 이 이상 조지나에게서 캐낼 것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자신을 협박할 수 있는 다른 효과적인 수단이 있었으면 벌써 꺼냈을 터였다.
상황 판단을 마친 조지나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포에버, 나를 그냥 죽일 생각은 마. 나는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그만.”
영원은 전범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인생을 더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조지나 스피넬의 존재에 충분히 고통받았다.
“너, 내 얘기를 좀……. 내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영원의 반응으로 대강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 조지나는 더 다급한 표정을 했다.
물론 영원의 단호함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응. 네 인생 다 들은 거로 치고 무슨 제안이든 다 거절할게.”
영원은 양손으로 양쪽 귀를 덮었다.
“포ㅇ…….”
조지나의 입이 다물렸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할 의지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
영원의 말을 제대로 못 들었냐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싸늘히 보는 여현의 시선 때문이었다.
영원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저 괴물은 그레이보다 잔혹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어 영원에게 애원할 수가 없었다.
‘으, 으으…….’
자신이 죽인,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무참히 살해당한 약자들.
자신이 벌레 같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만큼이나 비굴한 꼴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아이만, 제 아이만!’
‘살려만 주시면 뭐라도 할게요!’
‘제발,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죽어가던 이들이 소리치던 외침이 귓가에서 울렸다.
우습게만 보이던 눈물범벅의 얼굴 수백 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조지나 자신도 그런 모습을 하는 것으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영원의 시선에서 어떠한 자비도 찾을 수 없었다.
암담했다.
끝이 두려웠다.
***
그레이는 급히 빌 슈허겔랑에게로 갔다.
“빌!”
빌 슈허겔랑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그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빌. 네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들을 전부 끌어들일 거야.”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신종교에 세뇌된 이들을 모두 엮은 폭탄 다발을 만들 거라는 선언이었다.
“스카이부터 시작해서 전부 폭탄이 되는 거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모두가 자폭으로 죽는다는 뜻이었다.
“수틀리면, 각자 있는 모든 곳에서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된 세뇌의 실을 따라 자살테러가 연달아 벌어지게 할 거야.”
“……그래.”
그레이는 그 엄청난 테러 계획을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빌 슈허겔랑은 그레이나 자신이 위협을 받을 때 테러용으로 사용할 세뇌된 자들을 오래전부터 세계 곳곳에 광범위하게 배치해 두었다.
언젠가 결국 이 짓거리를 각오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빌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그냥 쉽게 죽어줄 수는 없지.”
그레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걸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신종교의 악행, 그와 연관된 배후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 역시 그랬다.
수많은 아이들을 고통 속에 넣었던 배후에 그레이 딘하우스가 있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도, 이제는 그에게 더 덧붙일 악명도 없었다.
그레이 딘하우스가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부터 더러운 오물통에 마음을 반 이상 걸치고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는 상황 아닌가?
“갈 데까지 가봐야지.”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인신매매나 학살, 자살테러 같은 극단적인 행위로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일에 심리적 장벽을 느낀다.
그러나 그레이는 그런 일들에 조금도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자고로 지도자란 어떤 결정이든 내릴 수 있어야 해.’
‘인간성 앞에서 약해져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거나 이익을 놓치는 지도자란 얼마나 무능해?’
그레이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한 얼굴을 했다. 더는 사고가 마비된 기분이 아니었다.
“포에버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있지. 우리가 그걸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포에버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래, 맞아. 희망은 남아 있어.”
그레이는 영원이 있을 방향을 보았다.
여현이 돔 주변에 힘을 한가득 뿌려두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은 없었지만, 돔이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 조지나가 영원에게 계획대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는 했을 듯했다.
“결국, 포에버는 협상을 하려고 할 거야. 우리는 돔 안에서 공생할 수 있어.”
물론 그건 그레이의 오판이었다.
영원은 환성이 보내온 메모를 품에 지니고 있었고, 화연과 요련을 통해 신종교에 관한 정보를 전해듣고 상황 파악을 끝냈다. 설령 그레이가 예상을 뛰어넘는 다른 무엇을 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레이와 무언가를 협상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무력으로 짓누를 수 있었다. 잠시 쉬어가는 것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그레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일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영원은 그레이의 심장에 자신이 남긴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역시 잊지 않고 있었다.
무관용의 응징.
영원이 그레이에게 선사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레이의 필사적인 발악에도 불구하고, 영원은 그의 희망을 완벽히 짓밟을 준비를 모두 마친 채 편안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펜트하우스에 돌아가 여현과 함께 즐길 첫 끼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