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 드론을 손에 쥐었을 무렵, 여현이 레이더로 제주도 근처까지 살핀 뒤에 말했다.
“공격이 강해지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 약간은 천천히 갈게요. 그동안은 편히 쉬세요.”
“응.”
그 이후로 영원은 여현의 품에 안겨서 처음보다는 느리게 한반도 남부로 향했다.
속도가 늦어진 건 영원에게 잠시라도 휴식시간을 주려는 여현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여현은 계속하여 아주 작은 소음조차 만들지 않으며 그레이가 돔에서 쏘는 모든 공격을 처리했다.
영원이 자신의 레이더를 신경 쓰지만 않으면 그레이가 돔에서 주기적으로 공격을 쏘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여현은 혹시라도 영원이 소음 등으로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틈틈이 세심하게 살폈다.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응.”
“아주 급한 상황은 아니니까, 원하시면 더 쉬었다 가도 괜찮아요.”
“알겠어.”
영원은 불편한 것 하나 없이 편하기만 했다.
돔 때문에 분초를 다투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니, 여현은 영원을 더 생각하는 듯했다.
영원이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과 돔 근처에서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할 때 느끼게 될 부담을 염려하는 속내가 보였다.
영원은 여현의 다정하고 섬세한 배려를 새삼스레 느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또 여현이의 세심함이 싫진 않아.’
마음에 따스하고 몽글몽글한 것이 차오르는 듯했다.
그래서 속으로는 굳이 이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여현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영원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방금보다 느리게 스쳐 지나가는 밤하늘을 눈에 담으며 여현에게 더 편하게 기댔다.
“…….”
그래 봐야 비행기보다 한참 빠른 속도기는 했지만, 확실히 영원에게는 유의미한 휴식시간이었다.
고통이 완벽히 사라져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 여현과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을 모두 소중히 만끽했다.
‘좋다.’
영원은 여현이 바라는 대로 그의 품에서 쉬면서 그동안 쌓인 심신의 고단함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영원의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그녀가 편히 쉬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는 존재가 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로로로롱.
익숙한 알람 소리가 들렸다.
잊고 있던 세계수였다.
‘…….’
[심영원, SSS급 퀘스트 스테이지4 클리어 확인]
[세계수의 SSS급 퀘스트 스테이지5가 시작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다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세계수는 제대로 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영원을 찾았다.
도로롱.
도롱.
알람이 연이어 들렸다.
[스테이지5: 돔 클리어]
[스테이지5 목표달성▶ 돔 클리어 0개/1개]
[스테이지5 종료까지 잔여 시간 360시간/360시간]
‘240시간. 15일?’
‘그 안에 끝낼 생각이기는 했지만, 제한이 걸리니까 또 엄청 여유롭지는 않을 것 같잖아.’
영원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저었다.
“여현아. 15일 안에는 돔을 없애야 할 것 같아. 세계수 때문에.”
영원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쳐다보는 여현에게도 지금의 상황을 짧게 설명해주었다.
‘근데 진짜, 생각해보면 차원 구하려다 고통 속에 갇히게 되었던 건데, 조금은 더 안정을 취하면서 쉬게 두어야 하는 거 아니야?’
‘세계수님 양심 어디에……?’
하지만 영원은 또 금방 불평불만을 접었다.
360시간의 제한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지만, 돔을 없애는 건 이미 해내기로 각오한 일이었다.
그래서 괜찮은 보상이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퀘스트 내용을 마저 읽었다.
[필드의 관리자, 세계수가 SSS급 스테이지5의 보상을 안내합니다]
[실패 시▷ 세계멸망, 무한회귀 루트]
[제한시간 내 미시도 시▷ 실패]
[성공 시▷ 이곳 차원에 영구히 머무름]
영원은 실패 시 페널티를 읽을 때만 해도 알림을 보낸 세계수에게 양심이 과연 존재하는가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보상을 읽자 그 생각이 사라졌다.
“…….”
영원은 가끔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되는 불안감의 원인을 애써 외면해왔다.
어쩌면, 목적을 이룬 초월적인 존재가 다시 심영원을 갑자기 과거의 차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
영원은 그에 관해 더 고민해봤자 답을 알 수도 없고, 자신이 당장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할 방법도 없으니 고민을 사서 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채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계수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녀가 원했던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네가 이곳 차원을 안정시켜준다면,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고.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360시간. 할 수 있어.’
영원은 세계수가 너무나 양심 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완벽히 접었다.
오히려 갑자기 관리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차오르기까지 했다.
‘관리자들의 초대 덕에 여현이를 만난 거잖아. 고마운 건 고마워해야지.’
영원은 세계수의 SSS급 퀘스트를 어느 때보다도 더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돔은 사실 어차피 없앨 생각이었고, 보상도 매력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거의 다 왔어요.”
영원이 결심을 마칠 즈음, 여현이 이동을 멈추었다.
어느새 한반도의 최남단이었다. 아래로는 바다가 보였다.
영원은 여현의 품에서 천천히 벗어나, 손에 들고 있던 드론을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그녀의 복귀를 알리는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
이곳에서 돔만 없애고 돌아가면, 앞으로는 정말 여현의 펜트하우스에서 평생을 머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나, 살아 돌아왔어.”
영원은 긴 야근 끝에 찾아올 마지막 퇴근과 그 뒤에 만끽할 오랜 잉여생활을 행복하게 그렸다.
그런 날들이 머지않아 올 터였다.
***
그레이는 오랫동안 고통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그는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는, 영원의 접근을 늦출 다양한 수단을 고안해 냈다.
“근처에 게이트 웨이브로 열리고 있는 게이트 찾아내.”
조지나, 이반, 빌, 하늘은 그레이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행동했다.
“저쪽, 남동쪽 가까이 후쿠오카랑 가고시마 쪽에서 두 군데가 열리고 있어. A급이랑 S급!”
조지나가 금방 조사 결과를 알렸다.
“합쳐. 싹 합쳐서 가장 강력한 게이트로 만들어. SSS급까지도 되겠지?”
여현과 영원이 제주도 근처 상공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을 때, 그레이는 재빠르게 각성자 몇 명과 다량의 S급 던전석을 돔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S급 게이트 하나와 A급 게이트 하나를 합쳐 SSS급 게이트로 빚어냈다.
SSS급 게이트.
과거였으면 그 게이트 하나만으로 다시 한번 세계의 종말을 논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레이는 한시름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게이트 웨이브 덕분에 영원과 여현의 허를 찔러, 다음 전략을 구사할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원은 제주도 근처에서 그레이가 할 짓을 뻔히 예측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레이 측의 각성자들이 게이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는 것도 바로 알았으나 그들을 쫓아가 바로 처단하지도 않았다.
“여현아. SSS급 게이트 안정화되기 전에 시장님이랑 부장님들한테 어떤 상황에서도 10분만 버텨 달라고 전달 드리고, 박의총 가이드님한테 드론 가지고 SSS급 게이트 들어가도 안 망가지는지만 다시 확인해 줘. 난 지금 상태창 보고 있어서.”
“네. 편하게 집중하세요.”
영원이 오랜만에 상태창 조작법을 연구하는 동안, 여현은 즉시 서시용, 이창결, 백율에게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네. 안 망가질 겁니다. 다소 지직거릴 수는 있겠지만요.
의총에게 그들이 가져간 드론은 SSS급 게이트에 들어가더라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던전석으로 충분히 강화된 것이라는 답변도 받았다.
그리고 그 무렵 그들 가까이에 SSS급 게이트가 생겨났다.
우웅.
그레이는 돔 안에서 그 성과를 다시 선전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런데 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선수를 쳤다.
“여러분. SSS급 게이트가 생겨났어요.”
영원의 라이브 방송이 다시 시작되었다.
“저쪽에. 다들 SSS급 게이트는 처음이시죠? 저도 그래요.”
영원은 드론의 카메라를 게이트 방향으로 돌려 반짝이고 있는 게이트의 입구를 자세히 보여주기도 했다.
“동그랗고 반짝반짝 예쁘네요. 보통 게이트들이 엄청 무서운 걸수록 더 예쁘기는 한 것 같더라고요.”
위기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멘트가 이어졌다.
“클로즈업도 한번 해볼게요. 근데 제가 드론 조작법을 이제 익히는 중이라 잠시만……. 아, 됐다.”
SSSSS급 게이트 이후,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모든 영상과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모두 너무나 처참하기만 했다.
그래서 영원은 다른 내용의 영상이 세상을 최대한 빨리 사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거, 제가 없애러 들어갈 거예요.”
SSS급 게이트는 영원이 생각하기에 최적의 재료였다.
그리고 영원의 의도대로, 미친 짓을 생중계한다는 라이브 방송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천만이, 금방 억대가 됐다.
돔 안에 있던 각성자들마저 일부는 영원이 하는 짓을 보기 위해 같은 방송을 보고 있는 듯했다.
[자살영상]
[잘 볼게ㅇㅇ]
영원은 그들 중 하나가 올린 채팅을 가볍게 잃었다.
“죽으러 간다고?”
영원의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럴 리가.”
그리고는 상태창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기 전에, 저에 대한 논란을 끝낼 재밌는 거 하나 보여드릴게요.”
영원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동일 등급 존재 확인: 김여현(ESSS1)]
[SSS급 랭킹 폐쇄 복구 Y/N]
[채팅방 개설]
[SSS급 가이드 심영원, 각성자 전원 채팅방을 개설할 수 있습니다]
[개설 Y/N]
도롱.
영원은 각성자 전원에게 채팅에 참여하라는 알림을 날렸다. 세계수가 SSS급에게 인터페이스 활용을 허가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뒤에는 채팅장에 몇 개의 메시지를 날렸다.
[심영원(GSSS1): 안녕]
[심영원(GSSS1): 등급에 놀란 사람 없죠? 그럼 엄청 눈치가 없었던 건데]
[심영원(GSSS1): 그리고 아직 진짜 놀라기는 이르고]
등급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자, 그래서 다들 집중해요. 여기에 있는 SSS급 게이트.”
각성자들의 채팅창은 매우 조용했다. 하지만 참여자 수는 라이브 방송만큼이나 미친 듯이 늘어나고 있었다.
“SSS급 게이트 클리어는 어려울 것 같죠? 근데 제가 원래 어려운 거 전문이거든요.”
영원은 조금의 위기감도 없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10분.”
지지지지직.
드론이 송출하는 영상이 급격히 전파의 방해를 받는 듯하다, 갑자기 초현실적인 장면을 보여주었다.
“자, 이 어려운 걸 저랑 여현이가 해낼 겁니다. 편히 보고 계세요.”
SSS급 게이트는 SSSSS급 게이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0분이면 끝날 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