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락.
밤공기가 영원을 스쳤고, 눈을 한 번 깜빡이니 어느새 역삼의 상공이었다.
폐를 채우는 서울 밤의 공기가 오늘따라 유독 청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근 중에 마시는 밤공기가 이렇듯 정겹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과거의 심영원이 예상이나 했을까.
영원은 멀리 공중에 떠 있는 다섯 명, 이창결, 백율, 서시용, 장제권, 화연의 시선이 차례로 제게 와 고정되는 것을 느꼈다.
요련이나 윤 교수, 의총과 똑같이, 굳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그들의 반가움과 기쁨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 왔어요.”
영원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불안해하지 마세요.”
“…….”
“걱정도 그만하셔도 돼요.”
어쩐지 그 말을 하는 자신의 불안함과 걱정 역시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상하게 목도 조금 메는 느낌이 들었다.
***
가끔 기적은 온다.
가끔 간절함은 응답한다.
―펜트하우스에서 알립니다.
정말 꿈이 현실이 될 때가 있다.
―지금 갑니다.
화연은 다시 그런 믿기지 않는 순간이 그녀의 삶에 찾아온 것을 보았다.
사아악.
순식간에 모든 폭발음이 멎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던 빛도 함께 사라졌다.
사아아아아아.
남은 것은 김여현 에스퍼가 처리한 에너지의 미미한 잔해뿐이었다.
그는 어떠한 폭발음이나 충격파, 빛의 산란도 만들어내지 않고, 그냥 돔에서 쏘아진 그레이의 공격을 모두 장막 같은 것으로 감싸 녹여버렸다.
그제야 밤하늘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지며 제 본모습을 찾았다.
직전에, 화연은 어쩌면 그레이의 공격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조금씩 감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삼 본부 본관 일부가 무너질 수도 있겠다고.
그런데 그 모든 걱정, 두려움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그레이의 공격이 모두 녹아 사르륵 사라지는 것과 같이.
“…….”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김여현 에스퍼의 등장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그의 품에 안겨 모습을 드러낸 그의 가이드였다.
영원.
그렇게 오래 간절히 기다려온 심영원 가이드.
환상일까, 환상이면 어쩌지.
잠시 불안해했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고, 그 불안이 깨어졌다.
―저 왔어요.
영원의 인사가 들렸다.
―이제 불안해하지 마세요.
공중 멀리 있기는 해도 육안으로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걱정도 그만하셔도 돼요.
영원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불안과 걱정은 이미 사라진 채였다.
그녀는 여현의 품에 안긴 채로, 화연과 다른 네 사람을 향해 손을 슥슥 흔들어주기도 했다.
울컥.
조금의 시차를 두고 벅찬 감정이 급격히 차올랐다.
화연은 그를 꾹꾹 누른 뒤 영원을 불러보았다.
“……영원 가이드님.”
―네, 쌤.
반응이 빨리 돌아왔다. 정말로 살아 있는 그녀였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말했다. 다행이라고. 정말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그 다행이라는 짧은 말에, 각자의 마음이 다채로운 형태로 담겼다.
영원도 다시 답했다.
―다들, 버텨주셔서 감사해요.
“…….”
―여기 먼저 적당히 정리하고, 제주도 근처에 돔 없애러 다녀오겠습니다. 그다음에 다시 만나서 맛있는 거 먹어요.
영원은 그녀의 계획을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녀가 아닌 누군가가 그녀처럼 말한다면 대체 무슨 불가능한 소리냐며 어이가 없어질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보통의 누군가가 아니라 심영원이었다.
그녀가 가볍게 산책하고 오겠다는 듯이 돔을 없애러 갔다 오겠다고 말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게 느껴지는 미래 계획이었다.
아니, 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명백하게 가능한 일이었다.
의총이 돔의 어느 부위를 가이드의 물리력으로 녹이면 돔이 전부 붕괴할지 파악해냈고, 영원에게는 의총이 알려준 각 부분을 없앨 능력이 있었으니까.
펜트하우스에서 왔다면, 이미 의총에게 그 정보를 전달받았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영원에게도 아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당연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영원을 믿었다.
사아아아아.
지금 여현이 계속하여 그레이의 공격을 완벽하게 녹여내고 있듯이,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지만 그들만은 할 수 있는 일이 영원과 여현에게는 참 많았다.
―그럼, 저는 가이드님과 돔 쪽으로 더 가까이 다녀오겠습니다.
여현은 그레이의 공격을 대강 정리하고는 영원의 말에 이어 이야기했다. 이후에는 곧장 그 내용대로 행동했다.
그는 영원을 그대로 안은 채 돔에서 공격이 가해지는 포물선의 궤적을 따라 한반도 남부로 향했다.
도중에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모두 녹아 사라졌다.
“아…… 여현아, 우리 드론 하나만 챙겨 가자.”
그가 잠시 공격을 멈춘 순간은 영원의 요청이 들렸을 때뿐이었다.
“네. 역삼 근처에서 하나 끌어올까요?”
“응, 그거면 돼. 좋아.”
여현은 잠시 멈추어서 멀리 공중을 떠돌던 역삼 본부의 드론 하나를 납치해서 영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출발했다.
사아아아아.
두 사람이 스쳐 간 자리에는 빛이나 소음공해 없이 평화로운 밤하늘만이 남았다.
이제 반격의 시간이었다.
***
사람들은 게이트 웨이브를 비롯한 각종 거대 재난과 사건 사고 속에서 세계의 미래에 관해 많은 것을 체념해가고 있었다.
김여현을 아무리 애타게 부르며 찾아보아도,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신이든 누구든 모든 상대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다 끝이야!
그들은 외쳤다. 구원은 오지 않을 거라고.
S급 게이트를 가이드도 없이 홀로 들어가 끝내고 돌아온 영웅, 김여현은 사실 오래전에 괴물이 되었고, 이제는 일반 대중을 그냥 포기해버린 게 분명하다고.
그런데 그들 앞에 기적이 일어났다.
앞으로 절대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재등장이.
[역삼 채널 들어가!!!!!!!!!!!!!!!!!!!!!!!!!!!!!!!!!!!!!!!]
[빨리!!!!!!!!!!!!!!!!!!!!!!!!!!!!!!!!!!!!!!!!!!!!!!!!!!!!!!!!!!!!!!!!!!!!!!!!!!!!!!!!!!!!!!!!!!!!!!!!!!]
누군가 한 명이 올린 채널의 링크가 엄청난 속도로 온 세상을 향해 퍼졌다.
―김여현이 왔어!
누군가가 영상 속에서 환희에 차 소리쳤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야!
―빨리 가봐!
―여기! 여기 링크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은 게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미약한 희망을 버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김여현이 과거와 비슷한 모습으로 그의 가이드를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
“…….”
아무런 행동도 이을 수 없는 감격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모두의 가슴 깊은 곳에 차올랐다.
너무나 간절히 기다려오던 장면이었다.
김여현은 더 이상 괴물같이 넋이 나간 모습도 아니었다.
“…….”
“…….”
수많은 이들이 명동 게이트에서의 기적을 떠올렸다.
데자뷔였다.
모두가 의심 없이 확신했다. 또다시 이 땅에 그들의 세계를 구할 기적이 왔다고.
기적은 더욱 널리 퍼졌고, 금방 세계 전역에 알려졌다.
그레이가 있는 곳까지.
“그레이, 포에버가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어!”
조지나의 비명이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그레이는 조금 전부터 관성처럼 역삼을 향해 쏜 공격이 이상하게 무너지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조지나는 멈추지 않고 경악을 쏟아내며, 탑의 꼭대기 한쪽 벽을 덮은 화면에 영상을 띄웠다.
“…….”
그레이는 그가 본 장면을 믿지 못했다.
동공에 지진이 일고, 미소가 사라지고, 얼굴에서 핏기마저 가셨다.
창백한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금방 손끝도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쿵. 쿵.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우욱.
심장에 거센 고통이 왔다.
읍.
숨이 가빠왔고, 심장을 입 밖으로 토해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레이는 그러면서도 밤하늘을 배경으로 등장한 영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녕.
변한 것 없는 모습이었다.
옅은 색, 무미건조한 말투.
쿵. 쿵.
심장은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었다.
―나, 살아 돌아왔어.
사락.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멀리 보이는 건 허공뿐이었다. 지금 그레이가 있는 곳과 비슷하게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가까운 곳이다. 그레이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
드론 같은 것으로 영상을 찍은 뒤 역삼 채널에 그 영상을 올린 듯했다.
다시 살아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계속해서 말했다.
―보통은 이럴 때 항복하면 봐주겠다는 말을 하겠지만, 미안한데, 너희가 백기 투항을 해도 딱히 선처 같은 걸 해줄 생각은 없어.
―이건 그냥 예고야. 너희가 좀 더 공포에 떨다 사라졌으면 해서, 그 불행의 시간을 늘려주려고 하는 예고.
―아무튼, 응징할 자식들이 하나의 돔에 옹기종기 모여서 덜덜 떨며 내 처분만 기다리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가상으로 창조된 모습이 아닐까 의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명백히 그녀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가 맞았다.
포에버는 계속 눈을 깜빡이고, 호흡하면서 드론이 찍는 화면 안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미미하게 웃었다.
—이제 다시 되돌아온 참교육 타임이야.
―너.
심영원은 그녀가 부르는 대상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가 누구를 부른 것인지 알았다.
그레이 딘하우스.
그레이 본인도 그를 알았다.
—굉장한 경험을 하게 될 거야.
―잠시 왕 놀이 하느라 재밌었지?
―나도 이제 좀 재밌으려고.
비각성자들에게 우호적인 세상은 끝난 줄만 알았다. 돔이 탄생하고 김여현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모두 그레이가 완벽히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남은 건 품고 있는 게 스스로도 우습게만 느껴지는 미미한 희망뿐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마저 사라지려 하는 순간에 그녀가 다시 왔다.
심영원이 살아 돌아왔고, 모든 게 달라졌다.
―금방 지옥이 뭔지 제대로 알려줄게.
―네가 이런 영상으로 지옥에 대해 참 많이 떠들었다고는 들었어.
―네가 말한 그건 가짜야.
―네 심장에만 가해졌던 건, 이제 더 영역을 넓힐 거야. 네게는 그게 진짜 지옥이지 않아?
욱.
그레이는 심장에 가해지는 더 거센 고통을 느꼈다.
―진짜 지옥이 뭔지, 너야말로 이제부터 배우도록 해.
영원은 끝까지 미소 지었다. 그와 함께 영상 전송이 끊겼다.
쿠궁.
동시에 완벽하게 견고한 줄만 알았던 돔의 천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