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여현이 수레바퀴 가까이서 2년여를 흘려보낼 동안, 영원의 공간 밖에서 흐른 시간은 고작 46시간 남짓이었다.
역삼 본부 멤버들 몇 명만을 제외하면, 여현이 그 이틀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엄청난 일을 해냈을 거라 짐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웅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여현 에스퍼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우리를 그냥 이대로 포기해버린 건가요?
사람들은 언론 및 각종 매체, SNS를 통해 여현을 찾아댔다.
―돌아와요.
―우린 김여현 에스퍼 외에는 기댈 사람이 없어요. 제발.
그러면서, 그가 절망에 빠져 은둔하느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그것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으니 당연했다.
센터나 김여현의 지인 중 누구도 그에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으니 여현이 의욕을 잃고 싸움을 포기한 뒤 잠적했다는 의견은 더욱 힘을 얻었다.
물론 여현을 원망하는 여론은 크지 않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온 세상을 뒤지고 다녔는데 그의 나라 바로 옆에 돔이 생겨났으니, 허탈감에 빠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그의 전담가이드는 혼수상태에 빠져서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고요. 그 상실감은 비각성자들인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래요.
사람들은 여현의 절망에 공감하려 하면서도, 그가 스스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걸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아 주기를 바랐다.
―부탁이에요.
그가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면, 그들의 평화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 분명했다.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그레이는 세상에 널리 퍼지고 있는 비각성자들의 공포를 즐겁게 감상했다. 그도 돔 바깥의 사람들처럼 여현이 46시간 동안 무언가를 해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K의 은둔생활은 언제 끝날까.’
‘오래 얼굴을 안 봤더니 좀 보고 싶기도 하네.’
‘절망에 잠겨 잠적한 K라니. 그 모습을 내 눈으로 봐야 하는데.’
‘아무튼 어느 때보다 즐거운 시기야. 상상도 못 한 큰 기쁨이 오고 있어.’
그레이는 돔에 들어오고자 하는 각성자들을 하나하나 살펴 모두 돔에 들인 뒤, 아주 여유로운 기분으로 공격 시기를 고민했다.
S급 던전석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분초를 다툴 정도로 급한 건 아니었다.
여현에게 점점 더 큰 불안을 안기며 그의 정신세계를 서서히 조여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시간을 더 끌고 싶은 마음도 일었다.
그 생각은 윤주성 본부장의 보고를 듣는 중에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김여현은 여전히 슬픔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 있지?”
―아마 펜트하우스에 있을 겁니다. 제가 방문했던 별관 지하에는 확실히 없었습니다.
“S급 던전석은 찾았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역삼 본부 별관 아니면 펜트하우스가 아닐까 예상은 됩니다. 절반 정도씩 나누어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 알겠어. 공격이 개시되면 잠시 서울에서 뻐기다가 이리로 날아와.”
―예. 금방 뵙겠습니다.
그레이는 통화를 마치고 돔 중앙 탑의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틀간 돔은 계속 부풀어 올라 여의도를 완전히 품을 정도로 거대해졌고, 그 중앙에는 여현의 펜트하우스가 있는 건물과 닮은 탑이 세워졌다.
그레이는 여현의 펜트하우스에서 포에버를 훔쳐 와, 비슷하게 생긴 침실에 넣은 다음 그 장면을 K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이 탑을 디자인했다.
‘포에버가 원했던 펜트하우스를 똑같이 안겨주는 거야.’
‘내 펜트하우스에 머무는 포에버를 본 K는 어떤 기분일까.’
‘대단한 악취미처럼 보이지만, 그게 내 매력 아니겠어?’
그레이는 즐거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며 좌측 벽에 걸린 거대한 화면에 서울 강남의 현재 영상을 띄웠다.
지지직.
거의 모든 시민이 대피했다고는 하나, 도시엔 곳곳에 빛이 가득했다. 야경이 참 아름다운 도시였다.
‘내 손에 초토화되는 것들은, 아름다울수록 좋지.’
그레이의 얼굴에 더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레이는 우선 측근들인 조지나, 이반, 하늘부터 호출했다.
같은 층 저편의 방에 머물던 하늘이 가장 먼저 그레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스카이. 왔어?”
“……네.”
최근에 더욱 강력한 세뇌로 길들여진 하늘은 시선에 초점이 없었고, 늘 멍한 표정이었다. 그건 그레이의 의도보다도 더 과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레이는 정신의 어딘가가 확실하게 고장 난 듯한 스카이의 상태가 딱히 싫지는 않았다.
‘반쪽짜리긴 하지만 나름대로 성공작이야.’
더는 에스퍼의 그릇을 못 쓰게 되기는 했지만, 영혼의 소유권을 포기한 듯 행동하는 스카이는 꽤 그의 취향에 부합하는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포에버를 이렇게 만들고 싶었지.’
‘포에버와 비교하면 하등품이기는 하지만. 뭐, 나쁘지 않아.’
‘어차피 포에버를 내가 시키면 뭐라도 할 인형으로 만드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그레이는 포에버 역시 스카이처럼 변하는 망상을 잠시 해 보았다.
그의 말에 순종하고, 뭐든지 시키면 그대로 하는 포에버.
그건 기분이 역해질 때 그 역겨운 기분을 물리치는 특효약일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기분이 좋을 때는 기분을 더욱 고조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
역시 기분이 더 좋아졌다.
조지나와 이반도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가 직접 호출하지 않은 늙은 남자 한 명도 함께.
“그레이, 나도 왔어. 조지나랑 있다가. 괜찮지?”
“그래, 뭐.”
그는 어제 그레이가 돔 안에 들인, 신종교의 과거 교주, 빌 슈허겔랑이었다.
빌은 어제도 그레이와 하늘이 함께 있는 이 공간에 방문해 그레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저 스카이라는 소녀 말인데, 과거에 내가 봤던 아이인가? 뭔가 익숙한데.’
‘신종교에서 온 애는 맞아.’
‘아아. 끈이 닿아 있다는 걸 알리지 않는 쪽이 좋겠지?’
‘어.’
‘알겠어.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런 걸 들킬 리가.’
슈허겔랑은 어제처럼 그레이의 앞에 선 뒤 그레이와 하늘을 한 번씩 본 뒤 말했다.
“재밌는 일을 시작하려는 것 같길래. 빠지기가 싫어서 따라왔지.”
“잘 왔어.”
그레이는 거리낌 없이 그를 맞았다.
빌은 조지나와 이반만큼은 아니어도 그레이가 자신의 측근이라 생각하는 자였기에 거리낄 게 없었다. 조지나도 그것을 알고 그를 데려왔을 터였다.
지금의 그레이는 약간의 계획 변경이야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때.
“욱.”
영원이 남겨두고 간 고통이 다시 그를 덮쳐 왔다.
그레이는 입을 막고, 심장을 조이는 고통에 떨었다.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고통은 오로지 분노만을 키웠고, 그레이는 순식간에 모든 평정을 잃은 폭군이 됐다.
“XX.”
자신의 신체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레이는 그 순간을 정말로 견딜 수가 없었다.
살기를 띤 시선이 조지나, 이반, 빌, 하늘을 훑었다.
“바로 시작할 거야.”
그레이는 숨을 짜내듯 말했다.
콰과광!
멀리 돔 위에서 색색의 빛이 솟아올랐다.
화풀이는 순식간에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레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전쟁광의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
46시간하고도 10여 분이 더 경과했을 때, 역삼에 그레이의 첫 공격이 우수수 날아왔다.
쏴아아아아!
돔에서 튀어 오른 에너지 더미가 강남 부근을 향해 기나긴 포물선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다 중간에서 폭발하며 터졌다.
콰과광!
퍼버버버벅!
다행히 지표면에 닿은 잔해는 없었다. 서시용이 최전방에 서서 공격을 모두 막아낸 덕이었다.
“빨리 백업!”
서시용은 역삼 멤버들과 연결된 인이어에 대고 소리를 지른 다음 이후의 공격에 대비했다.
―가겠습니다.
―네.
쏴아아아아아!
이창결과 백율이 도착하기 전에 2차, 3차 공격이 연이어 쏟아졌다.
콰과과과과광!
파팍!
다행히 초기 공격의 강도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계속 이 강도가 유지된다면 혼자서도 버티지.’
하지만 그레이의 한계가 이 정도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서시용은 이창결과 백율의 위치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조금도 안심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여현의 펜트하우스가 있는 북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창결과 백율이 도움을 주겠지만, 그들이라고 이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희망은 서시용에게도 김여현 하나뿐이었다.
‘깨워서 데리고 나와.’
그도 역삼 본부 멤버들과 같은 것을 간절히 바랐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빨리.’
‘네 가이드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
‘세상이 멸망하고 난 뒤에야 눈을 뜨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야?’
자신은 한반도의 사람들을 지켜내고, 김여현은 드래곤들이 머물 집을 보호해주기로 하는 계약이 오갔다. 이제 그 계약을 파기하고 그레이에게 붙는 건 불가능했다.
김여현은 서시용이 자신과 그 딸들의 운명까지 모두 건 계약을 반드시 이행해야 했다.
‘김여현. 빨리, 어서.’
‘너의 가이드를 반드시 구해내.’
한 사람의 절박함이 또다시 더해졌다.
***
삐빅.
[매칭률: 90.01%(possible)]
매칭률 90.01%.
영원과 여현 사이에 가능한 최고치의 매칭률이 요련의 기기 화면에 떠올랐다.
삐빅. 삐빅.
위이이이이잉.
삑. 삑.
심박 수, 혈압 등 영원의 생명 활동을 알리는 모든 계측치가 정상 범위 내로 복귀했다.
드르르르륵.
엄청난 변화를 감지한 여현의 가이딩 밴드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현의 요청으로 의총이 영원의 미세한 변화에도 급격하게 반응하도록 설계한 덕이었다.
삐빅. 삐빅.
그리고…….
“……으.”
신음과 함께 회갈색 눈이 익숙한 천장을 눈에 담았다.
깜빡. 깜빡.
영원은 갑갑한 기분에 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산소호흡기를 떼고 기침을 몇 번 반복했다.
콜록, 콜록.
토닥. 토닥.
함께 눈을 뜬 여현이 사레가 들린 듯한 영원의 등을 조심스레 도닥여주었다.
“괜찮으세요?”
영원은 기침이 멎은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돔이 생겨난 때로부터 약 46시간 13분이 지난 시점.
결국, 영원은 건강하게 돌아왔다.
“…….”
다시 눈에 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펜트하우스였다. 무엇도 변하지 않은 그녀의 침실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영원은 이불을 걷고,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