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에 윤 교수랑 몇 명 나가 있지 않나요? 어쨌든 소통은 되고 있을 것 같은데.”
누구도 답하지 않자, 윤주성 본부장이 다시 물었다.
“다들 아는 게 없습니까?”
네 사람 모두 머릿속으로 같은 판단을 내렸다.
그가 그레이로부터 무언가를 전달받고서 여현의 복귀 시기를 캐묻는 중이라고.
그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펴, 모두가 같은 생각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
침묵이 조금 더 이어졌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다. 머지않아 역삼을 향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본부장님.”
이창결 부장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본부장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현이는 공격이 시작되면 그때 가장 위급한 곳으로 곧장 가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펜트하우스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래요?”
“네. 사실, 현이는 역삼이 공격을 받는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예측이라 여기고 있어서요.”
이창결이 사실과 다른 거짓을 말했다. 마치 여현과 계속하여 연락을 주고받았고, 여전히 연락이 계속되고 있다는 듯이.
“현이의 의견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저도 그러라고 했습니다.”
“흠. 그렇군요.”
윤 본부장은 이창결이 한 말의 진위를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뭐, 어차피 원격전이고, 서울 어디에 공격이 떨어질지 모르니 다 같이 별관에서 대기하는 것보다 그쪽이 나을 수도 있겠네요. 일단 계획이 있다니 안심입니다.”
어쨌든 그로서는 여현이 어디에서 어떻게 그레이의 공격에 대응할지가 의문이었던 거라, 여현이 지금 공격 불능의 상태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쪼록 어떤 식으로든 그레이를 잘 무찔러 봅시다.”
“…….”
본부장도 거짓으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근데, 그러면 지금 S급 던전석은 다 어디에 있죠? 여기? 아니면 김여현 에스퍼의 펜트하우스?”
본부장은 뒤이어 S급 던전석이 별관과 펜트하우스 중 어디에 있는지도 대놓고 물었다.
묻는 이유가 투명하게 보였다.
‘털어가려고.’
정말로 그레이의 공격이 목전에 이른 게 분명했다. 그레이는 침략 전 마지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본부장을 보낸 것이었다.
“그건…… 일단 저희끼리도 기밀을 유지하기로 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 거참.”
“안전하게 지킬 거라는 약속만 드리겠습니다.”
이창결이 선을 긋자, 본부장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부장 또 깐깐하게 구네.”
그러나 본부장은 이창결의 변치 않는 결연한 표정을 보고는 캐내도 더 나올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톡. 톡.
그 와중에 화연은 가이딩 밴드를 몰래 두드려 여현의 펜트하우스에 있는 요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비상]
[본부장 꺼림칙]
[공격 임박]
화연은 혹시 몰라 백율뿐만 아니라 요련과도 밴드를 연동시켜 두었다.
“그리고 그…… 심영원 가이드는 어떻습니까?”
본부장은 멀리 걸려 있는 시계로 현재 시간을 확인한 다음, 영원의 상태가 어떤지도 물었다.
“…….”
이번에도 누구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아직 살아는 있나? 숨이 오락가락하는 중이라 들었는데.”
네 사람은 모두 그의 질문에 짙은 분노를 느꼈다.
너 같은 배신자 따위가 감히 그딴 식으로 말하느냐고.
다만 그들은 모두 감정을 억누를 줄 알았기에, 본부장은 엄청난 적대감을 느끼진 못했다.
꽉.
백율은 테이블 아래에 있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당장 본부장에게 달려들면 그레이의 공격이 바로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달려드는 건 좋은 전략이 아니야.’
‘조금만 더 참다가, 본부장이 서울을 벗어나기 전에 덜미를 잡아 가둔 다음 정보를 캐내는 게 가장 좋을 거야.’
‘지금 공격을 날리면 그레이가 바로 쳐들어올 수도 있어.’
백율은 윤주성 본부장이 별관 내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레이가 역삼을 초토화할 공격을 날리지는 않으리란 생각도 했다.
어쨌든 윤주성은 그레이에게 아직 가치 있는 자산일 테니까. 그러니, 일단은 본부장을 평화적으로 이곳에 더 붙잡아두는 게 바람직한 전략이었다.
백율은 요련과 연락 중인 화연을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그래요, 백 부장. 뭐 아는 게 있나?”
“심영원 가이드님의 상태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백율은 차분한 얼굴로 긴 생머리를 한번 넘겼다.
“제주도 근처에서 별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 중이라 약간 여유가 있는데, 때마침 오셨으니 설명을 원하신다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분노는 꾹꾹 눌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좋습니다. 해 봐요.”
드륵.
본부장이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그때 화연은 요련에게서 돌아온 답을 확인했다.
[영원인 아직 자고 있어]
[김여현 에스퍼님도]
[공격까지 얼마나 남은 것 같아?]
화연은 본부장의 시선이 백율에게 고정된 것을 확인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메시지를 연이어 또 보냈다.
[본부장 나가면 바로?]
[부장님이 잠시 붙잡고 있어]
요련의 답신이 다시 왔다.
[언제까지 붙잡기 가능?]
화연은 희망적인 바람과 보수적인 판단을 모두 메시지에 담았다.
[최대 10분, 짧으면 3분]
초조했다.
백율 부장이 무어라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어 조금의 여유는 벌었는데, 이야기가 계속 늘어지면 본부장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듯했다.
본부장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평소에 특별히 친절하지 않았던 백율이 이 위급한 시점에 괜한 얘기를 쓸데없이 이어간다고 생각하면 의심이 자라날 것만 같았다.
[너무 불안해 말자]
화연은 요련이 희망을 남아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다.
[난 믿고 있어]
같은 마음이었다.
화연 역시도 요련처럼 여현과 영원을 믿었다.
반드시 깨어날 것이다.
아직은 무엇도 끝나지 않았으니, 어떤 것도 포기하거나 단념할 때가 아니었다.
화연은 걱정 대신 현 상황에 더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하기로 정했다.
삑삑.
화연은 제주도 근처를 살피는 드론이 보내는 정보를 큰 화면에 띄웠다. 화연의 침착한 시선이 모니터에 뜨는 수많은 숫자로 향했다.
***
끝내 벽은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의 고통은 어느 때보다 강렬했지만 별 건 아니었다.
“…….”
여현의 앞에는 이제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그는 호흡 한 번 내뱉지 않고,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조금의 지체도 없이 한 걸음 나아가, 영원을 품에 안았다.
와락.
영원 역시도 곧장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꽉.
서로를 안은 팔에 힘이 실렸다. 벅찬 마음과 편안함, 안심, 믿기지 않는 환희가 복합적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 다 오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단어를 조합해야 자신의 마음을 한 문장 안에 담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이름을 불러보고도 싶은데, 빈약한 상상력만 담을 수 있는 언어로는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닿아 있는 미약한 체온이 정신을 엉망으로 어지럽혔다.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던 온기가 느껴지자, 한동안 생각을 조금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먹먹함을 삼키며 오래도록 안고만 있었다.
쿵쿵 뛰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상대의 품에 머물렀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여현아.”
영원의 작은 속삭임에 여현이 팔에서 힘을 풀었다.
여현은 영원에게서 몸을 약간만 떼어내고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영원과 눈을 맞추었다.
“…….”
그녀가 바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원하는 거라면 뭐든 바로 해주고 싶었다.
여현은 손을 올려 영원의 부드러운 회갈색 머리칼을 만졌고, 손을 조금 더 내려 볼과 목 부분을 손으로 감쌌다.
피부가 닿았다.
영원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여현은 영원을 치유하는 과정에 관해 그가 배워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간절히 소망하면 의지가 알아서 그 뜻을 이루어 낼 터였다.
여현도 영원과 마찬가지로 이 환상의 공간에서 제 가이드의 신체를 치유할 방법을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다만, 영원과는 다른 장벽이 있기는 했다.
던전석을 이용해 자신의 가이드를 치유해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여현의 내부에 있는 그릇에 엄청난 압박이 가해졌다.
그것은 경고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너는 이제 이 가이드가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가이딩을 받지 못하리라는 경고.
그 역시 직전에 견뎠던 고통만큼이나 여현이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힘들면, 말씀하세요.”
여현이 작게 말했다.
영원은 여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에 영원은, 자신의 모든 게 완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현의 넓은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지만, 어떤 게이트의 환상적인 풍경보다도 아름다운 무언가가 그녀를 둘러싼 이 공간을 가득 채워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치유는 신체만을 치유하지 않았다.
영원히 비어 있을 거라 믿었던 마음 깊은 곳의 공허마저 지워져 갔다.
“…….”
영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여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게 벅찼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품에 안겨주고 싶었다.
더 커질 애정은 없을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이 뭔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더 알아가고 있다.
영원은 이제 절대 여현을 놓고 멀리 가버리는 짓 따위는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치유와 각인이 완성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