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먼치킨, 돌아왔습니다
톡톡.
‘그럼, 이거부터 빨리 없애보자.’
영원이 벽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린 뒤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의욕적인 말과 표정이 차분하기만 했던 분위기를 조금은 활기차게 바꾸었다.
여현은 영원을 다시 만난 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답했다.
“……네.”
‘나까지 도우면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없앨 수 있을 거야.’
영원은 주먹을 쥐고 힘을 내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격정적인 감정을 빨리 갈무리해내고, 다음 과제에 몰두할 준비를 마친 건 영원이 여현보다 빨랐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진척도 빠르고 효율도 제일 잘 나오는 방식은, 여현이 네가 난관을 겪었던 부분들을 내가 파악한 다음에 같이 답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해.’
영원은 변한 것 없이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노선부터 찾아내려고 했다.
‘독학으로도 잘하기는 하더라. 그래도 혼자서는 잘 모르겠는 것들이 좀 있었지?’
“네.”
‘제일 이해 안 가거나 어려운 부분이 뭐였어? 그것들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현도 재회의 기쁨에 취해 있지만 말고, 앞으로는 영원과 함께 벽을 없애는 일에 최선을 다해 몰두하기로 했다.
“그건, 잠시만요.”
여현은 메모를 꺼내기 위해 에스퍼 정복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그려진 문양이 가장 난해하고, 여전히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르겠는 메모 세 장을 찾아 꺼냈다.
영원, 하늘 그리고 그레이의 메모 중 각 한 장씩 총 세 장이었다.
세 장에는 알 수 없는 거대한 문양이 중앙에 하나씩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투명한 벽에 아직 남아 있는 일부 문양들과 형태가 비슷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대강이라도 파악해야만 벽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 가져온 메모들이에요. 연금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됐는데, 이것들은 전혀 이해가 안 가서요.”
여현은 메모를 가지고 들어오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하고, 영원에게 메모 세 장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내 거지?’
첫 장을 보이자, 영원은 자신이 작성한 메모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네.”
영원은 곧장 설명도 빠르게 해주었다.
‘무엇을 만들어내려고 하든 연성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서, 고통을 축소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야. 에너지를 들이는 일이란 게 다 그렇지만 연금술도 고도화될수록 낭비를 줄이는 게 중요해서.’
영원은 설명 중간에 투명한 벽의 한편을 가리키기도 했다.
‘벽에 그려진 저 문양은 고통을 증폭하는 거라, 비슷하면서도 달라. 뭐가 특히 다르냐면…….’
여현은 영원이 말하는 핵심을 빠르게 이해했다.
“그럼, 중앙부에 형태가 다른 이건 뭔가요?”
여현이 추가로 생겨나는 의문을 말하자, 영원이 또 곧장 답을 주었다.
‘그건 말이지…….’
그다음엔 두 번째 메모였다. 영원은 메모에 그려진 문양을 유심히 살피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뒤 물었다.
‘작성자가…… 류하늘?’
“맞아요.”
영원은 여현의 설명 없이도 메모를 그린 이가 누구인지를 먼저 파악해냈다.
‘어설픈 부분이 있어. 여현이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수밖에 없어. 제대로 그린 연성진은 그 외곽 부분이 좀 더 복잡하게 변해야 하는데…….’
영원은 여현이 연성진을 그의 머릿속으로도 그려낼 수 있게 가만히 서서 허공에 오른손 검지 끝으로 천천히 좌우 반전이 된 그림을 그려주었다.
“아…….”
여현이 감탄사를 뱉으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그의 궁금증이 모두 해소되었다.
‘그럼, 다음 거?’
“네.”
여현은 마지막으로 한 장을 더 넘겨 그레이의 메모를 보여주었다.
팔락.
영원의 눈빛이 변했다.
‘ㅇ…….’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벌어졌던 영원의 입이 닫혔다.
‘…….’
영원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술을 벌려 물었다.
‘딘하우스?’
“네.”
영원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문양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여현아.’
“네.”
‘그건 지금은 별로 도움이 안 돼.’
영원은 잠시 말을 쉬어갔다.
‘저기 벽 위쪽에 있는 거, 저거랑 비슷해 보이기만 내용은 비슷하지 않아. 일단은 그냥 넣어 두자.’
여현은 어째서 영원이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으나, 일단은 그녀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이 분야의 전문가는 영원이었고, 그녀가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분명 그럴 터였다.
이후에는 메모에 적힌 것은 아니지만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영원은 그 물음에도 바로바로 답을 주었다. 동시에 여현이 알고자 했던 것보다 더 방대한 내용까지도 알려주었다.
영원은 말뿐만 아니라 손짓, 몸짓까지 동원해 대제의 지식을 여현에게 아낌없이 퍼부어주었다.
그리고 여현은 영원이 전해 주는 정보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이해해냈다.
영원이 중간 부분을 어마어마하게 생략하고 설명해도 여현은 뭐든 찰떡같이 알아들었고, 하나를 설명해도 열 이상을 유추해냈다.
영원은 생전 처음으로 가르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
‘내가 하나를 가르쳐 주면 백 가지도 알아듣는 최애라니, 이런 상상도 못 한 기쁨이 있을 수가…….’
암흑 속에서 홀로 지루함을 느끼던 때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가 가르치는 데에 재능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최애가 천재인 걸까? 둘 다인가?’
눈만 마주치면 울어버릴 듯 깊은 슬픔이 있던 자리가 밝고 희망찬 감정으로 채워졌다.
여현 역시 최고의 조력자를 얻은 덕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불안마저 전부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다.
여현은 벽의 두께가 점차 얇아질수록 다음 문양을 없애는 일의 난도가 올라간다고 느끼고 있었다. 혹시 한계를 마주하게 될까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영원의 도움으로 새 국면이 열리자, 과거보다 남은 일이 더 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벽을 완전히 없애는 과정에서 더 큰 고통이야 느끼겠지만, 그건 딱히 난이도를 따질 부분은 아니었다.
영원도 다시 희망 회로가 팽팽 돌아가고 자신감이 저 높이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나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차올랐다.
그리고 끝내, 문양이 거의 남지 않은 순간이 왔다.
넷.
셋.
둘.
이제 남은 문양은 하나였다.
그 하나를 마저 없애는 데 필요한 것도 운이나 새로운 배움이 아니라 시간뿐이었다.
“금방 꺼내드릴게요.”
여현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자 영원이 얇고 투명한 벽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금방 같이 나가자.’
둘이 손을 마주 대고 있는 투명한 벽은 이제 종잇장처럼 얇았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처럼 보일 터였다.
‘여현아. 정말 만나게 되면, 치료를 좀 부탁할게.’
영원이 여현과 시선을 마주한 채 환히 웃었다.
“…….”
여현에게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을 안기는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선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
어서 이걸 다 끝내고 더 다가서고 싶었다.
여현은 겨우 정신을 차린 뒤 벽에 얹은 손에 힘을 실었다.
아직은 영원에게 닿을 수 없지만, 금방 다시 닿을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쿵. 쿵.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여현은 고통을 각오하기보다는, 벽이 사라진 다음 영원을 다시 품에 안는 편안한 장면을 상상했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원할 때마다 그녀를 안을 수 있기를 꿈꿨다.
마지막으로 느낄 고통 따위야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솔직히 벽이 사라지는 대가로 느껴야 할 고통은 고통이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간절했던 바람이 금방 현실이 될 것이다.
정말로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
―잠시 방문해서 사기나 진작시킬까 하는데.
윤주성 본부장이 방문을 통보처럼 예고하고는 10분 만에 별관 지하를 찾았다.
—에이아이 승인.
본부장은 몇 단계의 신분 확인을 빠르게 거친 뒤 이창결, 백율, 장제권, 화연이 있는 별관 모니터링실에 들이닥쳤다.
네 사람은 모두 각종 관측설비를 동원해 돔이 있는 제주도 부근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쿵.
육중한 문이 열린 뒤, 윤 본부장은 경호 인력 없이 홀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창결이 한 타이밍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형식적인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이창결을 제외한 세 명도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본부장에게 꾸벅 목으로만 인사했다.
“네. 다들 고생이 많아요.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가 제대로 안 오니, 사기진작 차원에서라도 한번 오지 않을 수가 있나.”
본부장은 뼈가 있는 말을 하면서 네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서시용 시장은? 별관에 같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옥상에 계십니다. 설비 없이 주시하고 있는 게 더 편하다고 해서요. 본부장님 오실 거라 전달은 했으나, 굳이 내려올 생각은 없다고 하십니다.”
“……흠, 그래요.”
본부장은 인상을 다소 찡그리기는 했지만, 서 시장이 그를 맞으러 내려오지 않는 것에 그 이상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의전 서열을 고려할 때 무조건 고개를 숙이라고 요구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기에 한발 물러나는 듯했다.
백율은 조용히 표정을 굳힌 채 화연을 돌아보았다.
‘저 자식이 3분만 더 여기에 머무르면 내가 저 자식을 죽여버리게 될 것 같다.’
화연은 무언의 의사표시를 바로 이해하고는 백율의 어깨를 조심스레 톡톡 두드렸다.
부디 지금은 유혈사태 없이 건너가자는 의미였다. 주먹을 쥔 백율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잠시 부들부들 떨렸다.
“…….”
본부장은 잠시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했다.
톡톡.
답장 같은 것을 보내면서, 본부장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그는 그걸 누구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네 사람은 모두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본부장이 핸드폰을 다시 품에 넣었다.
“김여현 에스퍼 복귀는 아직 멀었나?”
뒤이은 질문에 그들은 모두 섬뜩함을 느꼈다. 본부장은 그저 순수하게 궁금증만을 풀기 위해 방금의 질문을 던진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