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졌다가 닫혔고, 끝이 떨리는 오른손이 올라가 그 입술을 가렸다.
“…….”
벽 너머로 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여현은 영원만을 시야에 담은 채, 거칠게 밀려드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에 휩쓸렸다.
그 감정은 그의 안에서 부피와 무게를 더욱 키워, 그의 내면 전부를 압사시킬 듯 짓눌렀다. 심장을 아리게 만드는 감정이 여현의 사고를 잠시 마비시켰다. 그동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펜트하우스에서 여현은 잠든 영원의 곁에 앉아, 그녀의 모든 사소한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맥박 변화 하나하나에마저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런 여현에게, 영원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건 눈앞에 포탄 수백 개가 떨어지는 것보다 더한 자극을 가하는 일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쿵. 쿵.
그런데도 이 모든 감각이 벅차고 황홀하게만 느껴져, 조금도 힘겹지 않았다.
쿵. 쿵. 쿵.
영원의 발걸음이 여현 쪽으로 움직였다.
타박거리는 소리 없이 그녀가 더 가까이 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여현의 심장 근처에 거센 해일을 일으켰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기다려 온 순간인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그냥 울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정작 어린아이였을 때는 그렇게 울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노력의 끝에 결국 만나게 되면 해주고 싶었던 것, 새로이 약속해주고 싶었던 것이 정말로 많았다.
굳이 목소리가 들려야만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하든, 그녀는 입 모양을 보고서라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려 줄 터였다.
그런데도 어떤 행동을 할 수도,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모든 게 고장 난 기분이었다.
“…….”
영원이 더 가까이 와 벽 앞에서 멈추어 섰다.
벽이 없었다면, 팔을 뻗어 안을 수도 있었을 거리였다.
안고 싶다는,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끌어당겨 안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자라나 심장을 비롯한 온몸의 장기가 그에 짓눌리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 있어 그럴 수는 없었다.
갑갑하고, 애가 탔다. 호흡이 가빠졌다.
무엇도 주체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아리고 먹먹하고, 갑갑하고, 속이 타서 미칠 것 같았다.
‘……현아.’
여현아.
아마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닐까.
영원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여현의 동공이 거세게 떨렸다.
“…….”
잠시 후, 영원이 다시 더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여현아.’
여현의 생각대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 맞았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음색으로, 어떤 어조로 그를 다정히 부르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며 그린 음성인데, 당연히 알 수 있었다.
“…….”
무어라 답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을 열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나타나 주면 제가 지켜주겠다고, 뭐든지 하겠다고, 그렇게 수천, 수만 번을 맹세했는데 다시 만난 첫 순간부터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여현아.’
그녀가 다시 그를 불렀다.
여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찾아온 기적 앞에서 그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은 일단 그게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영원이 다시 말했다.
‘알고 있었어.’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여현의 손이 닿아 있는 벽의 반대편에 그녀의 손을 얹었다.
그녀의 시선이 여현의 손, 팔, 어깨, 목을 타고 올라와 다시 그의 얼굴에 닿았다.
그 말과 행동이 다시 여현을 뒤흔들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영혼이라도 주겠다.
여현은 맥락을 완전히 잃은 생각까지 하게 됐다.
‘너를 믿고 있었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그녀가 먼저 뱉었다.
‘여현아.’
“…….”
‘나,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영원이 물었다. 그녀는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여현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꺼내줘.’
여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이상 무엇을 더 감수해야 하더라도 당신이 바란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
1년이 넘는 시간.
여현은 벽이 충분히 얇아지기 전까지 그 너머의 영원을 볼 수 없었지만, 영원은 한순간의 빈틈도 없이 여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 것 같은지, 얼마나 거센 고통에 휩싸여 있는지……. 매 순간순간 그의 변화를 모두 지켜봐 왔다.
평소처럼 마냥 긍정적인 생각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특기라 생각하는 정신승리도 쉽지 않았다.
그가 고통을 느끼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래서 빨리 포기하고 나가라는 말을 여러 번 중얼거렸는데…….
결국에는 인정하게 되었다.
‘…….’
그가 이대로 나가버리면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리란 걸.
제 고통을 견딜 각오는 처음부터 잘 되어 있었다. 그건 정말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힘겨운 지겨움도 어찌어찌 견딜 만할 것 같았다. 신체를 구현해내는 일은 해냈으니, 이제 차근차근히 이 안에 놀이공원이라도 만들어볼까 싶기도 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서 할 수 있는 1인 타이쿤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즐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나 애쓰던 여현이 그녀를 두고 떠나가는 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수레바퀴를 그렇게 돌려 매칭률을 높여서 뭘 하려고. 제발 그만…….’
‘여현아, 그냥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여현을 향해 중얼거리던 영원의 모든 말이 힘을 잃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거짓말을 뱉는 것조차 할 수 없어졌다.
‘포기해주기를 바라던 마음이 다 거짓이었다고 하면, 내가 너무 이기적이야?’
포기하라는 중얼거림은, 절대 포기하지 말아달라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가린 뒤 내뱉은 거짓일 뿐이었다.
실은, 그가 포기하기를 바랐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구해주기를 바랐다.
세상 누구에게도 구해지기를 바란 적 없다고 믿었는데. 심영원은 정말 그런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김여현, 그에게만큼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게이트에 뛰어들던 그 순간에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신이 과거에 내린 판단마저 의심하게 됐다.
내가 어떤 고통 속에 깊이 빠지더라도 내 에스퍼가 그 안에서 나를 꺼내줄 테니, 잠깐의 고통은 각오할 만하다는 게 본심이었던 건 아닐까 하고.
나는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힘에 의한 구원을 바랐던 적 없다.
그런데, 기대하게 된다.
영원은 모순적인 생각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어둠 속에서 여현을 지켜봤다.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우울해하고, 다시 기대하면서.
그러다, 여현이 무언가를 해냈다.
그가 벽을 점차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한 겹.
또 한 겹.
청성이 영원을 가두며 남긴 연성진이 사라져갔다.
‘이거, 없어질 수 있는 거야?’
‘청성.’
‘이거 가능한 거야?’
‘정말, 계속 가능한 거야?’
‘누가 답을 좀 줘.’
‘기대해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면 내가 빨리 포기할 테니까, 뭐라도 알려달란 말이야.’
어린아이였을 때도 부리지 않았던 어리광과 떼를 제가 이제야 타인을 괴롭히며 개념 없이 부리고 있는 느낌에 괴로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벽이 상당히 얇아져서, 영원 자신이 신체만 만들어내면 여현 쪽에서도 저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습을 드러낼까.
‘그래도 되는 걸까.’
영원은 수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혹시 눈앞에 보이는 여현의 존재가 자신의 무의식이 창조해 낸 환상인 것은 아닐까 싶어, 그걸 깨닫게 될 순간이 두렵기도 했다.
수레바퀴처럼,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환영이라면?
내 에스퍼는 나의 밖에 있는 세상에서 나를 잊고 사는 중이면 어쩌지?
그러나 영원은 결국 그와 만나기를 택했다.
그가 끔찍한 고통에 휩싸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모습을 만들어 그의 앞에 섰다.
환상이라도 괜찮다고, 더 이상 여현이가 저 고통을 홀로 견디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시선을 마주하자, 울고 싶었다.
진짜 김여현이다.
제 에스퍼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가끔 그녀 주변의 허공을 바라볼 때의 멍한 시선이 아니었다. 정확히 자신이 있는 자리에 고정된 시선이었다.
서서히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여현아.”
겨우 이름을 불렀다.
그는 영원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영원의 무의식만으로는 절대 그려낼 수 없을 표정.
저렇게 처연하고 절절한 분위기의 김여현이 망상으로 창조된 환영일 리가 없다.
진짜 그녀의 에스퍼였다.
“여현아.”
다시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리고는 목이 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할까 봐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알고 있었어.”
네가 해낼 걸 알고 있었어.
“너를 믿고 있었어.”
빨리 포기하고 나가달란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진심은 항상 같았다.
“여현아.”
그리고는 태어나 처음으로 물었다.
“나,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나도, 타인에게 구해질 수 있는지.
너도 나를 구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지.
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은 울음을 꾹꾹 삼켰다.
“꺼내줘.”
누구에게도 부탁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말을 뱉었다.
그녀의 에스퍼가 반드시 그렇게 해주리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