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의 탄생 후, 여현은 S급 던전석을 쥔 채 역가이딩을 시도해 영원의 환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다음부터는 쭉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한순간도 그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여현은 여기서 영원과 만나야만 그녀를 깨어나게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가이딩이든 역가이딩이든 가이드의 그릇에서 에스퍼의 그릇으로 힘이 전달되려면 에스퍼와 가이드는 가까이 있어야만 했다. 환상 속의 치유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과거에 화상 흉터가 치유될 때를 돌이켜 보아도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됐다. 자신은 영원의 품에 꽉 안겨 있었고, 몸이 접촉한 부분을 따라 치유의 힘이 전해졌었다.
또한, 여현은 연금술의 힘이 느껴지는 벽 너머에 영원이 있으리란 것도 확신했다.
영원의 환상 속 어디에도 영원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벽 밖에서는 그녀를 찾을 수가 없으니 그 안에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여현은 굳이 다른 논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본능을 통해서도 영원의 위치를 느꼈다.
‘사실, 아무런 단서 없이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
‘그냥 확신하게 돼.’
저 안에 내 가이드가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미칠 듯한 그리움이 매일 자신을 저 벽 쪽으로 끌어당기는 탓에 심장이 찢길 듯이 아픈데, 저 안에 있는 존재가 그의 가이드가 아닐 리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벽을 없애고 구해야 해.
여현은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사흘.
한 달.
일 년.
밖에서는 하루가 채 흐르지 않을 동안, 안에서는 일 년을 꽉 채운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여현은 느리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었다.
처음에는 벽에 다가서면 벽이 빛을 발하며 보여주는 연성진의 문양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거의 모든 노력을 쏟았다.
영원이나 그레이, 하늘의 여러 메모지를 보며 유사한 부분을 끼워 맞추다 보면 작은 힌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건 원소, 이건 법칙인 것 같은데.’
‘저번 거랑 비슷하면서도 달라. 서로 어떤 다른 결과를 내는 거지?’
여현은 사소한 힌트 몇 개만을 기반으로도 여러 가설을 세웠다. 그다음 논리를 하나하나 검증해보는 방식으로 문양의 상당 부분을 해석해냈다.
여현은 그에게 주어진 엄청나게 적은 정보량에 비하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연금술을 이해해갔다.
‘이 법칙은 또…….’
그러나 여현은 갈수록,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설령 저 문양의 의미를 전부 이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벽을 무너뜨리는 건 다른 차원의 난도를 가진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연금술을 잘 쓴다고 없앨 수 있는 벽이면, 가이드님이 먼저 없애지 않았을까?’
여현은 고민 끝에 방향을 틀었다.
‘연금술이 어떤 건지 그 핵심을 대강이라도 알게 된 건 나쁘지 않은 성과야.’
‘하지만 여기서 더 연금술의 논리를 학습한다고 해서 벽을 없앨 방법까지 알 수 있게 될 것 같지는 않아.’
여현은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서, 다른 노선을 찾아냈다.
‘진짜 답은 가이딩의 본질에서 찾아야만 하는 게 아닐까.’
벽을 허물 답은 영원과 자신의 기본적인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새로이 힘을 얻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
둘 사이의 가이딩.
열쇠는 생각보다 한참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부터가 연금술이 아니라 가이딩을 시도한 덕이었다.
‘연금술을 탐구해서 단서는 찾아낼 수 있겠지만,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할 것 같다면…….’
‘가이딩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대신 답을 줄지도 몰라.’
여현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기본 원칙부터 돌이켰다.
가이딩의 제1원칙, 가이딩은 ‘교감’이라는 것부터.
‘육체적 거리 이전에 심리적 거리가 먼저 좁혀져야 한다고 하지.’
‘그래서 서로에게 깊이 공감하는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는 수많은 제약을 허문다고.’
여현은 그에 더해서, 이 암흑이 그의 가이드인 영원의 의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은 공간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여긴 내 가이드의 의식이 깃든 공간이야.’
‘그녀의 의식이나 감정이 옅게라도 모든 곳에 퍼져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 환상 속에서 서로 닿아 있지 않더라도 우리 사이의 교감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어.’
결국, 여현은 저 견고한 벽은 연금술이 아니라,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교감으로 허물어야만 할 거라는 결론에 닿았다.
그다음부터 여현은 연금술이라는 힘의 속성보다는 벽을 통해 영원과 어떻게 더 교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집중했다.
여현은 영원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애썼다.
그녀와 그레이, 하늘의 메모를 비교하면서, 영원은 다른 연금술사들과는 어떤 식으로 다르게 연금술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질문했다.
‘왜 이렇게 생각했지?’
각자가 남긴 메모를 통해 세 사람의 생각을 비교하는 작업은 연금술 해석에 집중할 때와 비슷해 보였지만, 여현이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완전히 달라졌다.
‘여현아. 연금술은 기본적으로 금을 만드는 술법인데…….’
여현은 조각조각 전해 들은 영원의 삶의 파편들을 모두 모았다.
그리고는 그 전부를 길게 이어 붙여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만들고, 자신이 전해 듣지 못한 빈 곳까지 상상으로 채워 보려 애썼다.
‘이 힘은 그녀가 어떤 각오를 하고서 사용하는 힘이었을까.’
‘내 가이드는 어떤 마음으로 이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정한 걸까.’
여현은 멈추지 않고 물었고, 모든 답을 얻지는 못한 채로 다시 벽 앞에 섰다.
우웅.
벽에 다가서자 벽이 다시 은은히 문양을 드러냈다.
여현은 그 위에 손을 얹고, 그 문양을 하나하나 해석하기보다는, 그 힘이 영원에게 전했을 고통을 더욱 분명하게 느껴보려고 했다.
우웅.
‘……!’
그 순간 여현은 예상치 못했던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심장과 폐가 압축되는 느낌에 온몸이 굳었다.
‘…….’
고통이 옅어진 뒤에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현은 손을 벽에서 떼어내지 않은 채로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비슷한 고통이 또 왔다.
‘분명히 달라.’
강도가 거센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직전과는 다소 다른 느낌의 고통이었다.
‘뭔가, 다른 게 전해지는 것 같아.’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느껴본 적 없던 거대한 아픔이 더욱 큰 기쁨을 주었다.
다만, 혹시 영원은 계속 이만큼의 고통을 느끼며 힘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저민 듯이 아프기는 했다.
이후로 여현은 비슷한 시도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벽이 얇아지는 걸 봤다.
영원의 아픔을 더 가까이서 느끼고, 그에 교감하고 공감하면, 벽을 덮고 있던 문양 중 일부가 지워지거나 흐려지며 벽 자체가 조금씩 얇아졌다.
사르르르륵.
또 하나의 문양이 지워졌다.
여현은 그다음에 집중할 새 문양을 보고, 그 힘의 논리를 대강 이해해보려 한 뒤, 또 아픔을 느꼈다.
사라락.
아직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문양이 남아 있는 덕에, 전부 없애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건 중요치 않았다.
여현은 묵묵히 고통을 느끼는 작업을 이어갔다.
영원이 느꼈을 고통을 시차를 두고 함께 느꼈고, 동시에 영원의 힘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아픔이었을까.’
‘그래서 내가 줄 고통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했나.’
여현은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한 상처까지 치유해주던 영원의 손길을 떠올렸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다시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
더욱 거세지는 고통이 작업 속도를 조금씩 늦추기는 했다. 생명 활동이 모두 정지할 것처럼 고통스러워지면 잠시 쉬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불안이나 두려움에 빠지진 않았다.
끝내 영원과 만나게 되리란 믿음은 갈수록 더 확고해지기만 했다.
여현은 이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영원의 과거 또는 현재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그 고통을 기꺼이 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고통은 상관없어. 더 다가갈 수만 있으면.’
오히려 여현이 걱정하는 건 영원을 보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거세지는 것이었다.
적어도 펜트하우스에서는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마저도 볼 수 없으니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밀려들었다.
그럴 때면 여현은 벽 너머를 보며 그곳에 영원이 서 있는 모습을 그려봤다. 그녀가 그곳에 있을 거라 확신하면서.
애타는 마음을 담은 말을 속으로만 꺼내보기도 했다.
‘목숨을 바치는 일이든 뭐든, 무엇이라도 할게요.’
‘다시 가까이 와주기만 하면.’
‘눈을 뜨고, 다시 눈을 맞추고, 품에 안겨 준다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그녀와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기도 하고, 함께할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어쩌다 지금에 이르게 되어버렸는지. 우리는 다시 만나면 어떤 미래를 살아가게 될지.
여현은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변치 않는 애정이 그녀에게 향하리라는 걸 알았다.
‘내 모든 걸 걸고 끝까지 지켜줄 테니, 돌아와요.’
그러니까, 내가 내 가이드를 구할 수 있게, 조금만 더 반응해 줘. 제발, 아주 조금만.
그리고 간절함이 극에 달한 순간, 여현은 벽 너머에 선 누군가를 보았다.
색은 흐릿하지만, 존재만은 누구보다 선명한 사람.
여현은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고통이 덮쳐오는데도 오히려 그 고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몇 개의 문양만이 남아 있는 투명한 벽. 그 너머로 갈 수는 없지만, 그 반대편을 볼 수는 있었다.
그곳에 영원이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그의 가이드가 보였다.
쿵. 쿵.
오랜 시간 멈추어 있던 심장이 이제야 다시 뛰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