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20화 (120/142)

그레이는 또 한 번 즐거운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돔은 정말로 견고하게 완성되었어.

―이제 S급 던전석 금고를 좀 채워볼까 하는데.

―던전석이 어디에 많더라? 역삼?

―음. 시험 삼아 일단 런던의 영란은행이라도 털어볼까? 역삼보다는 영란은행 공략이 쉬워 보이기도 하는데.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재밌게 역삼이 좋을까?

―의견이 있다면 여러분들 생각도 좀 들려줘요. 댓글이든 멘션이든 뭐든. 찬찬히 보고 참고할 테니까요.

금발벽안의 미남은 끔찍한 두 가지 보기를 즐겁다는 듯이 저울질했다.

그의 표정은 영상 끝으로 갈수록 더욱 환해졌다. 말하는 내용과는 무관하게, 외모만은 동화 속의 왕자 같았다.

―아무튼, K는 어디에 숨은 거야? 절망에 빠져 있어?

―하하.

―네가 들고 있던 S급 던전석들, 네게 소중한 사람들을 내가 모두 어떻게 빼앗고 망가뜨리는지 지켜봐. 나도 그 과정을 즐겁게 관람할 테니까.

―역삼 본부에 있는 사람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질 거야.

―아, 심심하면 그냥 도시 몇 개 재미로 날릴지도 모르니까, 참고해.

그레이는 대중에게 공포를 불어넣고 여현을 압박하는 일이 정말로 재밌는 듯했다.

한동안 약간은 우울하거나 피곤해 보이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특히나 여현이 돔이 완성된 지 만 하루가 지나도록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게, 자신이 여현을 압박한 결과라고 믿고 있어 더욱 기쁜 모양이었다.

그레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이창결이 역삼 본부의 윤주성 본부장에게 여현의 상태를 사실과 다르게 보고한 덕도 있었다.

‘이 부장, 김여현 에스퍼 상태는 어떻습니까?’

‘절망에 빠져, 전담 가이드 옆에 누워 있습니다.’

‘아…… 어째서?’

‘이렇게 안 좋은 상황에서, 그녀가 깨어나기라도 바라는 희망에 갇혀서요. 일단, 잠시 여현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뭐, 알겠습니다. 이 부장이 수고가 많아요. 큰일 나기 전에 조카를 좀 다독여주세요.’

‘네.’

‘S급은 귀중한 전력이니까. 우리 같은 A급 에스퍼들에는 비할 게 못 되지. 아무튼, 그레이를 막는 방패가 돼야 합니다.’

이창결은 차오르는 역겨움을 억누르며 보고를 마쳤으니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역삼 본부 내의 모든 사람을 본부의 대지 밖으로 대피시켰다.

역삼 본부는 외부의 공격에 대응할 체계를 잘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S급 에스퍼 랭킹 1위의 공격을 예상하고 설계한 곳은 아니었다.

특히 본관 쪽은 증축을 몇 번 했기에 설계가 견고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레이가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면, 어떤 지옥도가 펼쳐질지 몰랐다.

게다가 그레이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겠다고 예고까지 한 상황이었다.

그를 이유로 이창결은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본부 안에 사람을 두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백율 부장, 화연, 장제권과 자신이 함께 대기하고 있을 별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본부장은 첫 통화 때에는 일단 근무 인원 중 3분의 1은 남기는 게 좋겠다고 하다가, 직접 사무실로 찾아온 이창결의 강력한 주장 끝에야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 요청을 승인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윤주성 본부장 역시 그와 함께 몇 년간 동고동락해온 직원들을 지금 당장 죽음으로 내몰 생각은 강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당장은 그의 가면을 벗기지 않은 채로, 여현이 단지 전의를 상실한 것 같다는 정보 정도만 그레이에게 전해지도록 만들기로 했다.

이는 요련이 제시한 의견을 참고한 전략이기도 했다.

‘부장님. 그레이는 역삼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부장의 정보를 꽤 신뢰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본부장은 부장님을 신뢰하죠.’

‘그렇지.’

‘심지어는 얼마 전에 부장님께서 본부장한테 S급으로 격상할 힘을 얻은 건 최근인데 아직 정식 S급은 절대 아니라고 변명하니까 그것까지 그냥 믿어버렸잖아요. 그런 거 보면 어쩌면 꽤 멍청한 거 같기도 해요. 심지어 스파이였던 제가 본부장의 가면을 눈치챘을 거라는 의심도 안 하는 것 같고요.’

‘…….’

‘어쨌든, 저희는 지금 김여현 에스퍼님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숨겨야 하잖아요.’

‘응.’

‘그러니까 그레이가 괜한 의심을 하지 않게, 본부장을 통해 김여현 에스퍼님이 싸울 수 있는 상태기는 하지만 다소 의욕을 잃고 있는 것처럼, 딱 그 정도로만 이쪽 상황을 파악하도록 만들면 좋지 않을까요?’

여현이 영원의 곁에서 함께 잠들어 있어, 그레이에 대항해 싸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숨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때였다.

물론 여현이 별관에 있지 않아서 그의 펜트하우스 역시 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에, 같은 건물의 다른 거주자들도 모두 대피시켰다.

그렇게 상황을 대강 정돈한 뒤, 역삼 본부 멤버들은 머리를 차게 유지하며 그들에게 각자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윤 교수, 의총, 요련과 화연은 관측 자료를 통해 돔을 연구했고, 이창결, 백율, 장제권은 별관 옥상에 나가 있는 서시용과 더불어 제주도 주변을 세심하게 주시했다.

***

돔이 생겨난 지 약 40시간 후.

그레이는 아직도 서울을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일단은 속속들이 돔 근처로 도착하는 각성자들을 돔 내부로 들이고, 돔의 탄생을 더 널리 홍보하는 데에만 열중하는 듯했다.

당장은 급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삼 본부 별관에 있는 이들에게는 다행이었다.

다소나마 주어진 여유 시간을 이용해 돔에 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다만, 그를 통해 꼭 좋은 결과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 최악입니다.

의총은 윤 교수, 요련과 함께 펜트하우스 회의실에 머물면서 얻어낸 좋지 않은 결과를 정리해 별관에 있는 이창결, 백율, 장제권, 화연에게도 알렸다.

―S급 던전석을 어떻게 흐트러뜨려야 저 돔을 흔들 수 있을지 알아내려면…… 슈퍼컴퓨터를 1만 년은 돌려야 할 것 같아요.

―그나마도, 1만 년 이후에 꼭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도 장담 못 할 것 같고요.

그다음엔 별관에 있던 화연 역시 관측을 통해 얻은 결과를 말했다.

“저도 제 가이드의 물리력만으로는 저 돔 외벽에 균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솔직히, 스크래치 하나 낼 수 있을지…… 그마저도 자신하지 못하겠어요.”

아무리 낙관적으로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해보아도 어려웠다.

“아쉽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쪽이 최선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무리가 심하게 갈 것 같은가요?

“네.”

그를 듣고 있던 윤 교수가 물자, 화연이 바로 답했다.

“최대한 힘을 끌어내 볼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그 후유증 때문에 이후의 가이딩이 어려워질 텐데, 현실적으로 이 상황에서 제가 그걸 감당하는 게 적절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결국, 모두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영원이 눈을 뜨고 일어나지 않으면 정말로 저 돔이 해결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것.

영원이 끔찍한 대가를 치르며 잠들어버린 이 상황에서마저 간절히 기대게 되는 게 그녀와 여현의 희생과 노력뿐이라니, 정말 안타깝고 미안했다.

“…….”

하지만 정말로 다른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라도, 깨어 있는 이들은 단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찾아내서 했다.

그렇게 모두 40시간이 넘게 깨어 있는 채로도, 피로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 상세한 연구를 하거나, 제주도 근처의 변화를 더욱 세심하게 예의주시했다.

―돔의 어디가 약점인지는 확실히 파악한 것 같아요.

의총은 추가적인 연구 결과를 전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돔이 생긴 지 44시간쯤이 지났을 때, 이창결이 작게 중얼거렸다.

“현이는 원래 배우는 게 빨라요.”

그는 약간은 졸음에 취한 것처럼도 보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죠. 어릴 때는 제가 조카 바보라서 제 눈에만 천재로 보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로 세계에서 비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의 천재였어요.”

이창결은 어린 시절의 여현을 떠올렸다. 그 귀엽고 작던 아이가 이렇게 큰 짐을 어깨에 지고 살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이창결은 수많았던 시련의 순간마다 그 강한 아이가 어떻게 그 고비를 넘어섰는지도 기억해냈다.

‘이창결 에스퍼님. 저 여현이라는 친구 말이죠.’

‘네.’

‘결국에는 폭주 없이 살아날 것 같아요. 이상하지만. 정말, 여기서 그냥 죽을 것 같지가 않아요.’

‘…….’

‘타고난 힘의 크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기술을 습득하는 감이나 이해력은 더 미친 느낌이에요.’

‘힘을 절약하는 법을 계속 가르쳐주세요. 전문가의 모든 역량을 다 털어서, 저희 현이가 더 배울 게 없을 때까지.’

‘음……. 에스퍼님.’

‘네.’

‘이미 배울 게 더 없는데요?’

‘…….’

‘저는 할 일 다 했고, 이제는 저 친구가 알아서 이겨내는 수밖에 없어요.’

항상 잘 해왔다.

그러니 이제껏 해온 대로, 현이는 앞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까지도 다 해낼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제는, 아이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도 생겨나지 않았나.

원래 사랑은 더욱더 많은 것을 해내게 하는 법이다.

“현이는 살면서 원하는 걸 해내지 못한 적이 별로 없었어요.”

이창결의 바로 옆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백율은, 저 너무나 오글거리는 말을 반박해주고 싶은 마음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 슬프게도 전부 사실이라 반박할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고, 억울한 얼굴로 생각했다.

“…….”

친구의 조카는 정말로 전 세계를 통틀어도, 심영원 가이드 정도가 아니면 천재성으로는 대적할 자를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천재였다.

화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한동안 영원 가이드님이 너무 굉장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현 에스퍼님도 재능은 만만치 않지.’

요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원이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이쪽 세계 오리지널 먼치킨력은 김여현 에스퍼님을 상대할 자가 없기는 했었어.’

그들은 모두 이상하게, 불안하면서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서시용 시장님이 10시간은 더 버틸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와중에 장제권이 서시용의 연락을 받고는 정말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김여현 에스퍼님이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그레이 딘하우스가 직접 여기에 온다고 해도, 그만큼은 목숨 걸고서라도 더 시간을 벌어주시겠다고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저희도 같이, 버텨봅시다.”

“네.”

―그래야죠.

“그래요.”

―당연히요.

“그럽시다.”

모두 함께 답하고는, 다 같이 여현을 믿으며 각자의 일을 이어나갔다.

이 기다림과 불안함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김여현은 김여현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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