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안의 한 곳만 남았습니다.
그레이는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제 S급 던전석 세팅이 남은 곳은 단 하나, 돔이 생겨날 곳과 가장 가까운 제주도 내의 구역뿐이었다.
“거기까지 준비되면 다시 연락해.”
—예. 그러겠습니다.
탁.
그레이는 통화를 마친 뒤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푹.
몸에 힘을 풀고 눈까지 감았다. 그리고는 금방 탄생할 돔의 아름다운 형태를 즐겁게 상상해보려 했다.
금방 만족스러움에 빠질 줄 알았는데, 머릿속을 찝찝하게 만드는 것까지 함께 떠올라 오히려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레이는 표정을 굳힌 채로 눈을 다시 떴다.
“…….”
삐빅.
팟.
그레이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맞은편의 거대한 화면이 켜졌다.
우우웅.
화면에 나오는 건 어젯밤에 그레이가 보다가 꺼버린, 며칠 전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을 담은 영상이었다.
SSSSS급 게이트가 사라진 자리를 드론에 달린 카메라가 느리게 훑고 있었다.
한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함께 흘러나왔다.
—대단하네요. 정말로 아름다워요. 이 우주 전체에 이보다 더 우아하게 빛나는 빛이 있을까요?
내레이션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레이 역시 약간은 동의했다.
“…….”
다수의 S급 게이트는 초현실적이면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풍경을 남겨두고 소멸하고는 했다.
역삼 본부의 부유섬 같은 것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SSSSS급 게이트가 남기고 간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극상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은하수의 축소판처럼 펼쳐지는 별의 군무.
—별들이 잔잔하게 빛나며 춤추고 있어요.
—아름답습니다.
내레이션과 대화하듯, 그레이도 입을 열었다.
“그래. 아름답지. 그리고 기묘하고.”
콰직.
말을 마칠 때쯤, 그레이는 오른손으로 리모컨을 짓뭉개 던져버렸다.
쾅!
그레이가 던진 리모컨에 맞아 건너편의 검은 스크린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아. 하.”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분노가 호흡을 거칠어지게 만들었다.
저것,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한번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혹시라도 K를 마주친다면, 이 쓰레기처럼 변한 몸뚱이로는 도망칠 수가 없을 테니까.
‘섣불리 나섰다가 마주칠까 봐, 보고 싶은 걸 보지도 못하고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 꼴이라니!’
‘얼마 뒤에 직접 가서 볼 수 있을까. 1년? 3년? 10년?’
그레이의 내면을 짓뭉개는 악의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뭐라도 죽이고 싶은데, 이 구형의 공간 안에서는 죽일 인간도 찾아낼 수 없었다.
쾅!
그레이는 소파의 팔걸이도 박살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세상에 화풀이할 방식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삑.
“왜.”
그때 제주도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레이는 감정을 억누르며 보고를 기다렸다.
—준비되었습니다.
하아.
그레이는 속으로 숨을 터뜨리며 겨우 화를 진정시켰다.
“다?”
—네. 전부 완료되었습니다.
돔이 금방 완성되리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약간씩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알겠어.”
—그렇다면 언제…….
“당장.”
그레이는 바로 통화를 끊어버리고는 영상실을 박차고 나갔다.
쾅.
이후에는 곧바로 저택을 감싸는 구형의 정중앙으로 갔다. 작은 분수와 화원이 있는 화려한 중정이었다.
쿵. 쿵.
거센 발소리를 내며 도착한 자리에는 이미 조지나, 이반, 하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 우리도 방금 연락받았어. 촬영용 카메라는 여기에 뒀고. 시작은 언제 할 거야?”
조지나가 물었다. 그레이는 답 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뭐야. 그레이. 지금, 바로?”
이반도 뒤이어 물었다.
그레이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탑처럼 쌓인 S급 던전석 더미에 주저 없이 손을 얹었다.
우웅.
그레이는 곧장 힘을 썼다.
쉼 없는 행동에 조지나와 이반, 하늘의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금방 돔이 만들어질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이렇게 없을 줄은 그들도 몰랐다.
스르릉.
어딘가에서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바다 밑의 지반이 흔들렸다.
드르륵.
멀리 테이블 위에 있던 펜들이 굴러떨어졌다.
쿠구구구구구궁.
그리고는, 중정의 바로 위 높은 하늘에서부터 돔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원래 존재하던 구형의 방어막이 얇게 변하고, 더 높은 곳에 돔의 형체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돔은 갈수록 더 선명해졌다.
‘이렇게 쉽게…….’
그를 지켜보던 이반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다들 괜찮을까?’
돔이 탄생하는 즉시 세계에 재앙이 도래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바깥이 지옥으로 변할 것은 분명했다.
삐빅.
다른 세 명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때에, 그레이는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던전석에서 손을 떼어내고는 준비되어 있던 카메라를 켰다.
그는 곧바로 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환한 웃음이 첫 화면에 담겼다.
—여러분 모두, 안녕.
그레이가 환히 웃는 영상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었다.
순식간에 동시 시청자 수가 수천만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의 그레이를 마주하고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모두가 긴장으로 굳었다.
—이곳은, 금방 완벽하게 안전해질 나의 돔 속이야.
—너무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라이브부터 켰어.
—나의 성,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중정. 보여?
그는 카메라를 들고 한 바퀴를 빙글 돌며, 저택 안의 화려한 정원을 보여주었다.
이어서는 렌즈를 위로 향하게 해 제주도 근처의 청량한 하늘까지 보여주었다.
자세히 주시하면 막 같은 것이 허공에서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돔일 터였다.
그가 오래 전부터 예고해 온, 밖을 지옥으로 만드는 돔.
라이브를 보던 많은 이들이 말없이 자신의 입을 가렸다.
—내가 드디어 뭘 알려주려고 하는 건지 알겠지.
—선택받은 녀석들만 들여 보내줄 거야.
—자, 이제 각성자들은 네 양심에 물어봐.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지, 아니면 이곳에서 아늑하고 화려하게 삶을 계속하여 즐기고 싶은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렇다면 줄게. 하지만 뭐, 답은 뻔하지 않아?
돔은 순식간에 팽창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갔다.
우우우우우웅.
SSSSS급 게이트가 생겨날 때처럼, 낮은 진동이 사방으로 퍼졌다.
진동이 바다로, 근처의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제주도의 남쪽 해변에서 가장 먼저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금방, 각국 센터의 관측실들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경보기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잉-!
[MAYDAY MAYDAY]
[경보]
[구조요청]
삐이이이이이이이이-!
[긴급, 긴급]
[경보]
[Warning!!!!!]
[무언가 재난이 왔습니다!]
각종 긴급 경보시스템이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역삼 본부 곳곳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당장 누구라도 불러!”
“어마어마하게 미친 게 엄청나게 가까이에 생겨나고 있잖아!”
“호출해! 윤 교수님! 윤 교수님!”
“펜트하우스? 거기 번호 뭐야!”
“인이어 지금 연결돼있는 사람 없어?!”
끔찍한 뉴스가 여현의 펜트하우스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거기서 몇 초도 더 걸리지 않았다.
—네, 생겨났네요. 제주도 근처일 줄은 몰랐지만.
윤 교수는 보고에 짧고 담담하게 답했다.
돔의 생성을 예견하고 있던 이들은 저항이나 현실부정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일단, 이창결 부장님과 백율 부장님의 보호 아래, 역삼 본부를 비워두셔야 합니다.
—크게 동요하지는 마시고요. 안전하게,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돔은 정말로 현존하게 되었다. 그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
「돔의 탄생」
여현 역시 그런 타이틀이 붙은 영상을 핸드폰으로 잠시 보다가 정지시켰다.
그레이 측 각성자들이 돔으로 진입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 각국 센터가 인력을 파견할 수도 있겠지만, 돔 쪽에서 끔찍한 지원 사격을 퍼부을까 우려되는 터라, 각국 센터는 핵심 인력을 파견하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역삼 본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현도 당장 제주도 근처로 가지는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니 아마도 그레이 측 각성자들은 꽤 안전하게 돔 안으로 진입하게 될 터였다.
여현은 정지 화면에 담긴 투명한 돔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은 저것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저것이 오랜 시간 유지된다면 그 외부가 점차 망가지리란 건 분명했다.
게다가, 제주도 근처라니.
여현도 놀랐다. 놀랄 일이 더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한반도를 지키겠다고 해놓고, 이렇게 가까이에 딘하우스가 있었는데 저 역시 눈치채지 못해 미안합니다.’
서시용이 역삼 본부의 멤버들에게 사과의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시용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여현은 동요 없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끄고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영원의 곁에 앉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에스퍼 정복 주머니 안에 넣은 각종 파일과 메모를 간단히 점검했다.
지금 입은 정복 안에는 요련이 환성을 통해 받은 정보와 여현 자신이 영원의 방을 뒤져 찾아낸 메모들이 가득했다.
입은 옷에 든 것들을 영원의 공간 안에서 꺼낼 수 있는 걸 확인한 뒤에 준비한 것들이었다.
수납공간이 상당한 정복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 몰랐다.
사락.
여현은 뒤이어 다정하게, 조심히 영원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오래 고통받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밖에서는 거의 흐르지 않는 시간 동안, 안에 긴 시간을 머무르며 답을 찾을 각오를 마쳤다.
오랫동안 탐구하여 답을 찾아야 하는 것, 고통 속에 끊임없이 머무르는 것. 둘 중 어떤 것도 여현에게 거부감이나 망설임을 불어넣지 않았다.
여현은 금방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갔다.
‘…….’
여현은 종종 애타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는 수레바퀴 너머를 한동안 응시하고는 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그저 기분 탓만은 아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