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은 잠든 영원의 곁에 앉아 그녀의 서늘한 손을 잡았다.
여현의 온기가 영원의 체온을 조금은 높였다. 여현은 별것 아닌 온기의 전달만으로도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여현은 저 멀리 회의실에서 오가는 진지한 대화를 예민한 청각으로 들으면서도 영원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았고, 미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그러는 와중에 회의실에서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심각해졌다.
돔이 금방 생겨날 것이고, 그레이 딘하우스는 S급 던전석을 얻기 위해 역삼 본부를 향해 공격을 퍼부을 게 분명하다고.
“…….”
여현은 딘하우스의 반격이 시작될 때가 왔다는 걸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돔의 생성이나 딘하우스의 공격은 회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현은 영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럴 때 영원이라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어떤 말을 하였을지 상상해보았다.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지.’
그녀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자주 지어 보이기는 해도, 절대 주어진 일을 내동댕이치는 법이 없었다.
성실함 따위는 제게서 찾을 수 없다는 듯이 매번 말하지만, 그녀만큼 성실한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세상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원망하고 한탄하기만 할 수는 없어.’
그녀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고 탈출구를 찾아내고는 했다.
‘세상이 원래 좀 가혹해.’
‘근데 또 보면 완전히 가혹하기만 한 곳도 아냐. 열심히 살펴보면 정신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구석을 찾아낼 수 있거든.’
그녀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최대한 빠르게 받아들이면서도, 목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되리라 믿었다.
영원의 말과 태도가 너무나 그리웠다.
지금도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미칠 것같이 그녀가 보고 싶었다.
“……구할게요.”
여현이 속삭였다.
그녀를 깨어나게 만든 뒤에는, 다시는 이런 고통을 느낄 일 없도록 완벽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도 여러 번 다짐했다.
각인이든 뭐든 어떤 대가라도 치를 테니까.
“혼자 두지 않고, 여기에서요.”
여현은 작게 덧붙였다.
그는 돔이 생겨난다거나 역삼 본부에 그레이가 공격을 퍼부을 거라 해서, 그레이 측과 싸우기 위해 바로 영원의 곁을 비울 생각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레이가 돔을 만들어낸 뒤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면 영원을 치료하려는 시도를 잠시 중단하고 우선 바깥의 싸움에 집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떨어져 있게 된다면, 그를 받아들여야 할 거라고.
그런데 얼마 전 작은 힌트를 얻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저 안에서 시간이 빨리 흘러가게 만들 수만 있다면…….’
영원은 그녀의 환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고는 했다. 여현이라고 하지 못할 일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여현은 해냈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방법을 알아냈다.
수레바퀴에 다가가서, 자신의 의지로 시공간의 흐름을 비틀어보려고 하자, 그를 둘러싼 시공간 전체가 감응하여 시간이 점점 빨리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하려고 하면 결국 해낼 방법을 금방 찾아내는 건 영원만이 해내는 일은 아니었다. 여현 역시 할 수 있었다.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건 특별히 문제 되지 않았다.
‘밖으로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레이와의 싸움이 시작되면, 쉬어갈 시간은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여현은 그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영원을 혼자 고통 속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원 없이 그레이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멀리 싸우러 나가면서 그녀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서시용에게 영원이 있는 곳을 계속 주시해달라 부탁할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안심이 될 리가 없었다.
그의 가이드인 영원은 그녀의 에스퍼인 자신이 지켜야 했다.
그런 점에서 수레바퀴 근처에서 영원처럼 시간의 흐름에 손을 대는 법을 깨우친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어.’
‘이 안에서의 반년이 고작 바깥에서의 수 시간이 되도록.’
동시에 그 무렵의 여현은 수레바퀴 근처에서 그의 접근을 가로막는 낯선 힘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그것이 무엇과 닮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연금술.
과거에 언뜻 느꼈던 영원의 힘. 분명히 그것과 유사한 힘이었다.
여현은 몰랐지만, 그 순간 영원도 벽 너머, 여현이 볼 수 없는 자리에서 여현의 곁에 있었다.
영원은 숨 막히는 기분으로 여현을 바라보면서, 여현이 고통 밖으로 나가 그녀를 포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만둬.’
그녀는 여현이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은 여현이 더욱 거세지는 고통을 견디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더불어 이 이상 그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올 방법을 찾아내는 일은 없을 거라 판단했다.
둘 사이엔 대화를 가로막는 벽이 있었다. 영원은 그 위에 손을 얹고, 애원하듯 말했다.
‘여현아. 이건 네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러나 여현은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벽에 가로막혔으면, 넘어서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결국에는 방법을 찾으리란 걸 의심하지도 않았다.
구할 것이다.
구할 수 있다.
시간 제약을 받지 않고 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다면 승산이 더더욱 크다.
여현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레이가 돔을 불러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이제, 그녀의 공간에 함께 머무르며 오랜 시간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 되는 때였다.
여현은 다만 외부에서 추가로 얻어서 들어갈 정보가 있을지, 잠시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이창결 부장이 영원의 방 문을 두드렸다.
똑똑.
여현은 회의실에서 나온 이창결 부장이 그가 있는 방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그래서 노크에 바로 답했다.
이창결이 조심히 문을 열고는 영원과 여현이 함께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달칵.
그는 등 뒤로 문을 닫은 다음 영원과 여현을 한 번씩 보고는 입을 열었다.
“현아. 밑에서 하는 얘기 들었지?”
“네.”
“방금 요련 가이드님이 최환성 에스퍼님한테 마지막으로 정보가 온 것 같다면서, 받아오겠다고 본부로 나갔는데…….”
“네. 그것도 들었어요.”
“뭔가가 도착하면…… 정말 시도할 생각이니?”
“네.”
여현은 이창결에게 대강의 계획을 이미 말해두었다.
돔의 생성이 목전에 다다랐을 때, 단 몇 시간의 여유라도 주어진다면, 영원의 공간으로 들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해 보겠다고.
각인이고 목숨이고 뭐고 모든 걸 걸고.
그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더라도.
‘그래 봐야, 가이드님이 고통을 각오한 시간에 비하면 한 톨도 되지 않을 테고, 부장님은 긴 시간이 흘러갔다고 느끼지도 않으실 거예요.’
‘고통은, 괜찮니.’
‘네. 그건 전혀 문제 안 돼요.’
이창결은 최대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여현을 말릴 수 없었다.
그래서 요련을 통해 최환성에게 혹시 연금술에 관한 약간의 자료라도 구할 수 있다면 다 넘겨달라고 부탁하는 것에도 동의했다.
여현이 넘어서야 한다는 벽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힌트를 얻을 자료가 있다면 뭐라도 긁어모으자는 판단하에서였다.
“말씀드렸지만, 어차피 바깥에서 느끼기에는 잠시뿐일 테니 부장님께서 보시기에 달라지는 건 딱히 없을 거예요.”
이창결은 여현이 덤덤하게 말한다고 해서 똑같이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가이드를 위해 최대한 애를 쓰고 싶은 여현의 기분이야 알겠지만, 마음이 매우 편치 않았다. 여현이 영원을 치료하려 할 때 어떤 고통 속에 빠지는지 윤희유 교수와 함께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부장님. 김여현 에스퍼님 말이죠…….’
‘…….’
‘저 상태로 죽지 않고 있는 게 놀라워요.’
‘…….’
‘누구라도, 고통 자체가 주는 쇼크로 죽어버릴 정도잖아요. 어떻게 저걸 버티고, 다시 싸우러 갔다가, 다시 또 제 발로 영원 가이드님 곁으로 돌아와서 저 짓을 계속 시도하는 거죠?’
‘…….’
‘대체…….’
여현을 관찰하던 윤 교수가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김여현은 지금 어떤 마음인가.
이창결 부장도 알 수 없었다.
여현이 가이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에스퍼임을 고려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간절해야 저걸 기꺼이 감당하게 되는 걸까.
윤 교수와 이창결 부장은 깊은 침묵 속에서 여현을 기다렸다. 여현이 눈을 뜨고 고통이 주는 괴로움을 호소할 것이라 예상하면서.
그러나 영원의 곁에서 다시 깨어난 여현은 고통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별다른 각오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고.
‘저는 고통이 두렵지 않아요.’
다만, 영원을 빨리 구하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괴로울 뿐이라고.
‘부장님. 저는 김여현 에스퍼님이 제게 줄 고통은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여현과 비슷한 말을 뱉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반드시 깨어나야 한다.
영원의 회복이 간절한 것은 여현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