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련은 환성의 말을 동료들에게 곧바로 전달했다.
“돔의 생성까지, 사흘이 남았다고 합니다.”
―…….
인이어 너머의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모두 놀란 듯했으나, 요련이 전한 내용을 의심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 이후의 사흘은 폭풍전야였다.
자잘한 사건 사고야 언제나처럼 벌어졌지만 그레이 측과의 거대한 무력 충돌은 없었다.
심지어는 때마침 게이트 웨이브마저도 잠시 수그러들어 새로이 S급 게이트가 생기는 일도 없었다.
폭풍 직전의 고요함 속에서 윤희유 교수는 각국 센터 및 각종 관련 기관에 연락해 그레이 딘하우스를 찾는 일에 지금 당장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어떻게든 딘하우스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 즉시 최선을 다해달라고, 거듭 부탁의 말씀 드립니다.”
―저희도 노력하고 있는데, 김 에스퍼님도 못 찾고 계신 걸 저희가 어찌…….
역삼 본부 각성자들은 그레이를 찾기 위해 전 지구를 누비며 돔의 생성 자체를 막으려는 시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와 그 최측근들의 머리카락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역삼 본부 멤버들은 인정하게 되었다.
이미 돔의 생성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걸.
예고된 사흘까지 하루도 남지 않을 때쯤이 되자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목전에 다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며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그 이후를 대비해야만 했다.
사흘이 완전히 채워지기 전에 윤희유 교수, 이창결 부장, 백율 부장, 장제권, 화연, 요련, 의총은 여현의 펜트하우스 1층에 있는 회의실에 모였다.
현재까지 파악한 정보를 기초로 앞으로 발생할 사태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전략과 전술, 대응책 등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여현은 2층에 올라가 있는 터라 그의 자리만 비어 있었는데, 이창결 부장은 여현을 기다리지 않고 서론 없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현은 예민한 감각으로 2층에서도 이 대화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일단, 돔이 생성되면 게이트 웨이브가 심해질 겁니다. 그레이가 인위적으로 게이트가 더 자주, 더 높은 등급으로 생성되도록 조작할 테니까요. 다량의 S급 던전석과 다수의 외부 조력 인력들을 이용해서.”
이창결 부장은 부정적인 전망에 대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레이는 안전한 돔 내부에 머무르면서 게이트만 이용해 외부에 극심한 피해를 만들어 낼 게 불 보듯 뻔합니다.”
센터의 각성자들은, 스파이인 환성만 제외하고는 그 돔 안으로 절대 들어갈 수 없을 터였다.
그레이가 허가하지 않을 거고, 그의 허가 없이는 그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까.
“앞으로의 싸움에서 그레이가 계속해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창결 부장이 잠시 이야기를 쉬어가려 하자 백율 부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레이 측 각성자들 대부분이 돔에 들어가 버리면 이제 돔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그들 조직을 와해시킬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화연 가이드님이 말씀해주시겠습니다만…….”
백율 부장이 화연을 보자, 화연이 백율을 대신하여 말을 이어갔다.
“최근에 저와 부장님이 주목하고 있는 기현상이 또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도 약간은 아실 텐데…….”
화연은 잠시 말끝을 흐리며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요즘, 던전이 지구 어디에서도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여름의 초입 즈음부터 나타난 이상한 변화를 역삼 본부에서 가장 먼저 눈치챈 건 화연이었다.
과거에도 한반도 부근에서 던전이 한동안 열리지 않았던 때는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이토록 길어졌던 적은 없었다.
같은 현상이 전 지구적으로 이렇게 오래 이어진 적은 더더욱 없었다.
화연은 우선 백율 부장에게 의아함을 표시했고, 백율 부장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화연의 생각에 동의했다.
한여름 무렵부터는 앞으로 던전이 지구 어디에서도 더 발생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힘을 얻었다.
대체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상만은 확실했다.
심지어 던전석으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안정된 채로 존재하던 몇몇 던전들마저 불안정하게 요동치다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현상도 종종 관측되었다.
화연은 혹시 별관 지하의 강당마저 사라질까 봐 홀로 그에 관한 조사를 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평소와 같아 보였으나, 언제까지나 불안정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이 기현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근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딘하우스 역시 이 변화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화연은 일주일 전쯤 그레이가 올린 영상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앞으로 상당한 시간 동안 S급 던전이 하나도 열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다 함께 변화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다면 본인이 장님이 아닌가 생각해야 하는 시기잖아요, 지금은.
—이전과는 모든 게 다른 양상을 띠고 있어요. 각성도, 게이트도, 던전도.
—그중에서도 던전 말인데, 앞으로 S급 던전은 쭉 더 열리지 않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러면 S급 던전석의 가치가 더 어마어마해질 게 뻔하죠. 안 그래도 비싸던 게, 정말 가격이 미쳐 날뛰겠지.
―그러니까 돔으로 올 때 구해와요. 아주 비싼 값을 치르면서 내가 매입해 줄 테니까.
그레이의 선언 덕에 각국 센터, 은행, 공공기관 및 개인의 던전석 금고에서까지 S급 던전석이 도난당하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레이는 S급 던전석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자잘한 절도로 모을 수 있는 S급 던전석의 수량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작정하고 던전석이 어느 곳보다 많이 쌓여 있는 역삼의 금고를 다시 노릴 거라는 거군요. 돔을 만들어 유리한 위치를 점하자마자.”
의총이 작게 중얼거렸다. 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상에서 던전석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역삼 본부였다.
“의총 가이드님 말씀처럼, 우리나라는 영원 가이드님이 기부해주신 덕에 세계에서 가장 S급 던전석을 많이 보유한 국가입니다. 그레이가 라이벌로 느끼는 여현 에스퍼님이 있기도 하고요.”
그레이가 돔을 완성한 순간, 그레이는 던전석 때문에라도 가까운 시일에 무조건 역삼을 부수려고 할 터였다.
유럽보다, 미국보다, 다른 어떤 국가보다 그레이가 가장 먼저 표적으로 택할 곳은 한국이었다.
그때 요련이 입을 열었다.
“환성 에스퍼님도, 비슷한 취지로 그레이가 바로 역삼에 선제공격을 날릴 거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맨 처음에는 그레이가 여현 에스퍼님의 힘을 경계해서 유럽부터 공격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보다 먼저 우리가 표적이 될 게 확실합니다.”
“…….”
“그게 당장 내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요련이 말을 마친 뒤, 이창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우리가 불리한 상황에서, 하루 이틀 내로 그레이의 집중 포격을 받는 첫 타자가 되리라는 게 너무나 확실하다는 거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역삼 본부가 그레이의 표적이 되는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내일 돔이 생기면 역삼 본부는 난리가 날 테니,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 또한 아니었다.
“아끼던 사무실이 다 날아갈 수도 있겠군요. 추억이 많은 장소인데…….”
윤희유 교수는 여현과 영원이 있는 2층 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현은 이들 사이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냥 계속 영원의 곁에 있기로 정한 건지 아직도 2층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윤 교수는 안경을 벗고는 피로로 충혈된 눈을 마사지하듯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여현 에스퍼님한테 영원 가이드님 수레바퀴 뒤편에 연금술의 흔적인 듯한 뭔가가 있다는 걸 들었어요. 그게 없어지지 않으면, 이 이상 영원 가이드님과 교감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고도요.”
“…….”
“일단 영원 가이드님이 갑자기 회복해서 에이스처럼 등장한 다음 빠르게 돔을 와해시키는 진행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여요.”
영원이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심각하고 난해한 문제 중 상당수가 쉽게 해결될 터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여현의 가이딩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가이딩을 해줄 수 없고, 최전선에서 기계 가이딩을 받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전략이 아니니까.
“…….”
그러나 아무리 바람이 간절해도 2층에 있는 여현만큼이나 그 마음이 간절할 수는 없을 터였다.
테이블을 둘러앉은 모두는 속으로만 한숨이나 탄식을 삼켰다.
***
환성은 마지막 사흘 동안 요련의 부탁에 따라 연금술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수집했다.
대체 무엇을 수집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뭐든 다 모아보자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작은 칩에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했다.
연금술에 관해 떠드는 하늘의 말을 녹음하고, 하늘이 말을 하면서 끄적인 메모지를 전부 이미지로 떠 칩에 담았다.
심지어 환성은 그레이가 낙서 같은 연성진을 그린 다음에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 메모지까지 대담하게 수거하기도 했다.
돔의 생성을 목전에 두니 절박한 행동이 나왔다.
그리고 돔이 생성되기 직전, 환성은 모든 정보를 모아 역삼 방향으로 은밀하게 날렸다.
‘마지막 연락수단까지 사용한 거야. 이제 한동안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기회가 오지 않겠지.’
환성은 속으로 무운을 빌었다.
부디 이 정보가 무사히 역삼에 전해지고, 그 안에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제대로 담겨 있어, 끝내 그들이 승리하기를 소망했다.
“돔이 한 시간 내로 만들어질 거야.”
그레이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반 하이제렌은 그 옆에서 그들의 성과에 기뻐하며 자축의 샴페인을 들었다.
펑.
촤르륵.
쨍.
그레이와 이반이 건배했다.
“나도 한잔!”
조지나가 다가와 둘 사이에 꼈다.
쨍.
다시 건배가 이어졌다. 잠시 후에는 달콤한 스파클링 주스를 손에 든 하늘까지도 합류했다.
이반 하이제렌의 웃는 얼굴 아래에 최환성의 굳은 얼굴이 가려졌다.
우우웅.
환성은 멀리서 투명하고 두꺼운 막이 자라나는 걸 보면서,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에는 잘될 거란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 믿음을 잃지 않은 채로 끝까지 해내야 했다.
환성은 역삼 본부 멤버들만큼이나 낙관적인 미래를 그렸다.
앞으로도 여기서 버텨야 하고, 그래야만 이곳에서의 삶을 견딜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