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16화 (116/142)

쏴아아아.

어느새 장마의 막바지, 가을을 목전에 둔 여름이었다.

명동 게이트 발생 이후 반년여가 지난 시점.

그레이 딘하우스는 제주도의 남쪽 바다 한복판에서 한반도 아래의 바다까지 넓게 덮은 장마전선이 퍼붓는 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태평양 곳곳을 떠돌다가 이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지 열흘째였다.

누구도 그레이 딘하우스가 김여현과 이토록 가까운 곳에 머물기로 정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와 비슷하게 떨어진 위치라 어느 나라 센터 관할인지가 모호해.’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K의 나라에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었지.’

그레이는 다른 차원에서 이 나라에 잠시 머물렀던 오래된 과거를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동양에서 연금술사 대제로 살던 때는 정말로 어둠을 밝히기 위해 등잔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레이는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한반도 가까이에 머물기로 정한 건 아니었다.

S급 던전석을 쏟아부어 만든 방어막이 그가 머무는 바다 위의 저택을 구형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레이마저 밖으로 나갈 수 없게 쌍방향 접근이 차단된 견고한 막은, 누군가가 그를 뚫고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내부의 모든 S급 던전석이 함께 요동쳐 SSSSS급 게이트를 생성하도록 하는 자폭 장치가 있기도 했다.

혹시라도 여현이 그레이를 발견해 막을 부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그냥 함께 죽어버리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덕에 방어막 밖에서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도 저택 지붕으로는 빗물이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고, 저택 밖 정원 앞의 바다도 조금도 요동치지 않았다.

“그레이! K가 또 S급 게이트를 두 개나 혼자 끝냈다고 해!”

그때 조지나가 멀리 있는 외부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소리쳤다.

조지나의 옆에는 이반이 조용히 앉아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하. 난 K가 명동 S급 게이트에서 폭주해서 그냥 죽어버릴 줄 알았는데, 벌써 반년이 넘게 살아남아 이런 미친 괴물이 되었다니, 짜증 나.”

그레이는 조지나의 토로를 들으며 조지나와 이반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생각해보면 그때 망할 포에버도 처음으로 등장했어. 명동 상공에서, K의 품에 안겨서.”

그레이는 의자를 빼서 앉으며 조지나가 언급한 순간을 떠올렸다.

“걔는 대체 언제 제대로 뒤지나 몰라? 아니, 계속 고통받고 있을 테니까 최대한 오래 살아 있는 게 나으려나?”

옅은 색의 가이드였다. 목덜미가 드러나던 회갈색 단발과 하얀색 정복이 뇌리에 깊게 남았다.

‘고작 반년이라니.’

그때로부터 반년은 그레이의 생 전부를 통틀어 가장 그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은 시간이었다. 예측이 빗나갔고, 끔찍한 결과와 여러 번 만났다. 그에 영원이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그래도 그레이는 여전히 영원이 그에게 최고의 유희를 선사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X 같은 폭탄을 투하하고 갔지만, 그만큼 포에버가 내 소유가 되었을 때의 기분은 짜릿하겠지.’

그레이는 영원의 몸을 빼앗아 와 소유할 계획을 전혀 단념하지 않았다.

욱.

그 생각을 마치자마자 급격한 고통이 그레이의 심장을 강타했다.

“읍.”

그레이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막았다.

조지나와 이반이 긴장한 채 그레이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아주 많이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최근에 그레이는 그들 앞에서 종종 이렇게 발작적인 행동을 하고는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듯이.

3초쯤이 흐른 뒤 그레이가 입을 가렸던 손을 떼어내며 욕설을 읊조렸다.

“XX, 망할. XXXX.”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다.

모두 영원이 남긴 심장 부근의 흔적 때문이었다. 흔적이 남은 이후부터 그레이의 심장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것은 치료가 가능한 병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치유가 될 병도 아니다. 그게 그레이가 얻은 결론이었다.

그레이는 자신의 몸 한구석이 복구할 수 없는 형태로 고장 났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게 되었으나,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그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미칠 듯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하…… XX.”

그레이는 그래도 고통을 느낄 때마다 매번 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고통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의도적으로 그를 기분 좋게 하는 것들을 최대한 떠올리려 애썼다.

지금도 그레이는 최선을 다해 돔이 이제 금방 완성될 거라는 즐거운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도 K의 나라와 바로 붙어 있는 이곳에서.

‘돔은 일주일 안에 완공될 거야.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 이제는 약점도 찾을 수 없어.’

‘가을이 될 때까지 약점을 보강하길 기다린 보람이 있지.’

그레이는 K 및 각국 센터의 각성자들이 저기 멀리 있는 태평양과 대서양 한복판을 뒤지고 다니는 중이라는 정보도 떠올렸다.

그들 모두가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더욱 나아졌다.

‘다른 싸움은 다 져도 상관없어. 돔만 만들어지면.’

그레이는 K가 자잘한 승리를 반복하며 그의 편인 각성자들을 없애고 있다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K가 입힌 인력 손실은 딱히 유의미한 숫자도 아니었다.

‘그냥 약한 녀석들이 죽어버리는 거지. 새로운 녀석들이 각성해서 그보다 더 많이 보충되고 있으니 남는 장사야.’

그레이는 죽어 사라지는 각성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비선별 각성자들이 합류하고 있다는 것, 그 숫자만 중요하게 생각했다.

‘다들 내게 합류하기로 결정할 만도 하지.’

‘뇌가 있으면 내 편으로 오는 게 맞아.’

각성했다는 이유 하나로 영구한 특혜를 약속해준다는데. 일반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그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데. 노동도 할 필요 없고, 모든 재화가 무한히 제공되는 화려한 삶을 주겠다는데.

욕망에 휘둘리는 평범한 인간들이 그에 홀리지 않고 배길 수 있을 리가.

‘센터에 끌려가서 9 to 21로 일하면서 공무원 월급 받을 거야? 아니면 일 하나도 안 하면서 백화점 VIP처럼 평생을 살 거야?’

그레이가 카메라 앞에서 새로이 각성한 비선별들을 향해 던진 질문에는 옳은 답이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

이반이 그레이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레이가 다시 평정을 찾았다는 판단하에서였다,

“……어.”

“이제 돔의 설계 변경이 다 끝나서 건설 일자가 확정되었다는 거지?”

그레이가 웃었다.

“그래. 사흘 뒤야.”

이제 정말 다시 즐거움을 찾은 기분이었다.

“약점이 사라졌어. 이제는 박의총도 S급 던전석 몇 개를 흐트러뜨려서 돔을 붕괴시킬 방법은 찾아내지 못할 거야. 절대로. 이렇게 시간을 끈 보람이 있어.”

그레이는 아수라장이 될 돔 외부를 상상했다. 끝내 굴복해서 돔 안에 넣어달라고 빌 K도 상상해봤다.

그리고 지금 당장 K가 포에버 때문에 겪고 있을 고통까지 생각하자 기분이 더 들떴다.

“그런데 그레이.”

“또 왜.”

“몸은…… 정말 괜찮은 거야?”

그레이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다시 역겨운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이반 하이제렌.”

온도가 한참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따위 쓰레기가 감히 걱정할 몸이 아니야.”

“미ㅇ…….”

“저리 꺼져 있어.”

퍽.

쾅!

이반이 앉아 있던 의자가 그레이의 힘으로 높이 치솟아 구형의 방어막과 부딪혔다.

“윽!”

쿵.

이반과 의자가 함께 허공에서 추락해 바닥을 굴렀다.

이반은 심각한 내상을 입은 듯 양팔로 배를 감싸고는 괴로워했다.

“우으.”

이반은 한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레이의 시선이 닿지 않는 저택 뒤편으로 몸을 천천히 옮겼다.

그레이는 이반이 그의 명에 따라 모습을 감추었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반은 그레이의 시야 밖으로 벗어난 뒤,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다음엔 저택 벽면에 기대어 조심히 손목시계 뒤편에서 쌀알만 한 통신기기를 꺼냈다.

―네.

부름에 바로 응답한 건 요련이었다. 환성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지금 좋은 소식은, 그레이가 상당히 나쁜 컨디션이라는 것. 가까운 시일 안에 회복될 일 없어 보인다는 것. 이 상태면 김여현 에스퍼님과 싸우면 김 에스퍼님이 무조건 이길 겁니다. 그리고 나쁜 소식은…….”

환성은 한 템포 쉬어가며 접근하는 이가 없는지 살폈다.

“돔이 금방 만들어질 겁니다. 과거의 설계도로는 던전석의 배치를 파악할 수 없는 형태로요. 남은 기간은 사흘. 이곳의 위치를 아시면 더욱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좌표를 당장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환성은 자폭용 SSSSS급 게이트의 생성 원리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

“아무튼, 돔의 생성 이전에 생성 그 자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레이는 S급 던전이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걸 걱정하니, 역삼에서 대비책을 세우기 전에 선제공격을 시도할 거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환성 에스퍼님, 여현 에스퍼님과 영원 가이드님을 위해서인데요. 가능하시면 하늘이나 그레이가 쓰는 연금술을 연구하거나 파악해서 자료를 저희에게 좀 넘겨주실…….

“끊겠습니다.”

뚝.

환성은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느끼자마자 연결을 끊었다.

방금 통신에 사용했던 작은 기기도 동시에 녹여버렸다.

사락.

누구도, 절대로 이 대화를 눈치채거나 첩보행위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도록.

‘그런데, 여현 에스퍼님과 영원 가이드님을 위해? 심영원 가이드는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뭔가 차도가 있나? 근데 차도가 있다 해도, 연금술은 왜?’

대체 영원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왜 그녀를 위해 연금술을 연구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야 있겠지.’

환성으로서는 당장 이유나 맥락을 짐작할 수 없어도, 요련이 전한 센터의 요구를 무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요 없는 부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환성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가까이 온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모습의 하늘이 어느새 코앞까지 와 있었다.

화연과의 싸움에서 지고 살아 돌아온 그녀는 요즘 확실히 이상했다. 깍듯하게 말을 할 때도 있고, 이반이 그의 보모라도 되는 양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환성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 채 화연이나 그레이가 하늘에게 무슨 짓을 했을 거라 막연히 짐작해 볼 뿐이었다.

지금은 후자 쪽에 가까운 상태로 보였다.

“스카이, 왜?”

“우리 그냥 당장 세계를 다 없애면 안 되는 거야?”

“글쎄.”

“심심해.”

털썩.

하늘은 예고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반은 허리를 숙여 하늘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심심하면, 스카이.”

“응.”

“나한테 연금술을 가르치면서 놀지 않을래?”

“그럴까?”

연금술에 관해 뭘 연구하고 뭘 파악해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배우기 시작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환성은 바로 센터 측이 부탁한 작전에 돌입했다.

“별을 그려. 이렇게 시작하는 거래.”

환성은 하늘이 땅바닥에 그리는 연성진을 꼼꼼히 살폈다. 정보량이 상당했다.

하늘은 그레이에게 세뇌되어 갈수록 더 멍청하게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정말로 지능이 낮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시간여 뒤, 환성은 조지나가 옆을 스쳐 갈 때도 하늘과 놀아주는 척 굴기만 했다.

조지나는 그들을 슥 보고 말없이 지나칠 뿐 조금도 무언가를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도 환성은 여기 있는 모두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이들이 모두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됐다.

***

같은 시간.

“하아, 하아.”

여현은 손끝부터 팔을 타고 올라오는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기계 가이딩과는 비할 수 없는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그는 잡고 있던 영원의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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