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14화 (114/142)

얼마 전, 영원은 예기치 못했던 커다란 불행과 맞닥뜨렸다.

‘내가 고통은 어쩔 수 없이 그냥 참는다고 해도…….’

‘이 정도의 노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끝없는 고통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기에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료함은 영원이 이 악물고 각오한 부분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지. 이게 제일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될 줄도 몰랐고.’

역시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예측 못 한 복병이 난데없이 튀어나온 기분이야.’

처음엔 고통과 암흑에 적응하느라 이 상태가 얼마나 지루할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다음엔 암흑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수레바퀴를 흥미롭게 지켜보느라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사흘여가 더 흐른 뒤, 관심을 사로잡거나 자극을 느낄 만한 새로운 걸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자, 영원은 충격적인 일련의 사실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잠? 못 잠.’

‘먹는 거? 못 함.’

‘누워서 뒹굴뒹굴할 침대랑 이불이나 소파? 없음.’

‘넋 놓고 볼 온라인 컨텐츠? 없음.’

‘들어가서 덕질할 인터넷 페이지? 없음.’

‘멍하게 들을 노래? 없음.’

‘만화책이나 소설책? 역시 없음.’

‘하다못해 생각 없이 걸어 다닐 산책길도 없음.’

‘할 게 아무것도 없음.’

‘오로지 고통만 있음.’

‘…….’

‘……아, 하나. 저기 수레바퀴가 보이기는 하네.’

처음엔 주어진 일이 없는 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야 평생을 바라왔던 잉여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데 영원은 금방 또 깨닫게 됐다.

집순이의 삶이란 궁극적으로, 아늑한 킹사이즈 침대, 배달음식(혹은 여현의 요리)과 와이파이(혹은 무제한LTE, 5G) 환경, 렉 없고 용량 무지막지한 최신 스마트폰, 게임용 풀옵션 듀얼 모니터 컴퓨터, 82인치 벽걸이 TV, 넓디넓은 욕조, 전국에 촘촘히 갖춰진 당일 택배 망과 무한도 블랙 신용카드, 한강 뷰가 있을 때 비로소 완벽하게 완성되는 것이었다고.

놀랍게도 영원은 얼마 전까지 위 목록에 해당하는 모든 걸 다(주: 비록 출근과 야근 때문에 제대로 즐긴 시기가 짧았고, 실제 소유주는 따로 있었지만) 누렸다.

‘게다가 워너비 잉여 인간의 매우 중요한 덕목은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건데…….’

‘여기서 보내는 시간은 낭비가 아닌 것 같은 게 문제야.’

영원은 여현을 볼 수 없는 것과는 결이 다른 종류의 공허함을 느꼈다.

‘뭐지, 이 시차를 둔 극도의 상실감은?’

‘나, 펜트하우스에서 버릇이 잘못 든 것 같아.’

‘전담님 펜트하우스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나 길들여져 있었다니…….’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이나 잡지 카탈로그 같은 인테리어야 아쉽긴 해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텍스트든 영상이든 즐길 컨텐츠와 음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은 영원을 좌절하게 했다.

‘여기서 더 아파져도 괜찮으니까 스마트폰 하나만 21세기랑 연결되게 하는 연금술을 쓸 수는 없는 걸까?’

영원은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전화나 메시지 기능은 다 포기하는 조건으로 어떻게 관리자들이랑 협상할 수는 없을까?’

‘님들? 듣고 있어요? 대화 좀? 거래 좀? 선제시 부탁드려요. 넓은 아량으로 협상에 임할게요.’

당연히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관리자들의 협상 조건 같은 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영원은 포기하지 못한 채 합리성 따위는 내다 버린 망상을 길게 이어가다가, 끝내 나아지는 것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포옥 쉬었다.

‘하아.’

‘괴롭다.’

스마트폰과 K-컨텐츠의 위대함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취향 아니라고 쉽게, 쉽게 초반에 하차해버렸던 내 과거의 나날들 매우 반성한다.’

‘뭐든 좋아. 지금은 뭐라도 보여주면 무조건 꿀잼일 듯.’

횡령 사건과 국회 이슈뿐인 9시 뉴스만 보아도, 5천억 예산을 부어 넣은 블록버스터를 볼 때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어디에 눕기라도 하고 싶다.’

포근한 침대에 털썩 엎드려서 자다 깨다 하는 시간을 보내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부들부들한 이불과 폭신한 매트리스가 어디에도 없는 건 둘째 치고, 이 암흑 속에서는 영원의 의식이 끊기는 법도 없었다.

잠에 빠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 상태가 되는 건, 고통 속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운명 때문에 불가능한 듯했다.

‘구구단이라도 외워볼까?’

‘……구구 팔십일.’

‘……이제 인도 소녀인 척 19단이라도 외워봐야 할 판?’

‘……이딴 생각 하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 실화?’

차라리 출근을 하고 싶었다.

‘여현이의 펜트하우스에 있었다면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겠지만.’

‘이러느니 차라리 출근해서 일하고 싶다.’

무슨 소일거리라도 있는 게 이 무료함보다는 낫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노잼에 그냥 순응할 수 없어.’

‘고통에는 순응해도 노잼에는 그래서는 안 되지, 안 돼.’

결국, 영원은 난제를 타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뭔가 불가능하다 싶은 걸 해내서 무료함을 떨치는 거야.’

영원은 일단 이곳에서 이루어내면 좋을 만한 목표를 여러 개 후보로 떠올려 봤다.

첫째, 의식 차리고 깨어나서 여현이 만나기.

‘음……. 아무래도 꽤 어려울 듯.’

‘일단 다른 쉬운 것부터 해보고, 제일 어려워 보이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둘째, 더 이상 안 아프기.

‘첫 번째 후보만큼이나 어려워 보이는데. 이것도 일단 저 멀리 뒤로 미루어두기로 하자.’

그렇게 하루 이틀을 더 고민하다가, 영원은 그나마 쉬워 보이는 목표 하나를 후보군 사이에서 뽑아냈다.

제1 목표.

암흑의 의식 속에서, ‘내 몸 형체 만들어내기’.

지금 이 암흑 속에 존재하는 건 수레바퀴와 수레바퀴가 내뿜는 은은한 빛, 그리고 영원의 의식뿐이었다.

영원은 어둠 속에서 ‘인지’만 할 수 있을 뿐 이동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사실 여기엔 영원의 실체랄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눈이라고 할 만한 영원의 기관조차 여기에 없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영원은 앞에 있는 수레바퀴를 ‘본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사실 영원이 진짜로 그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의식으로 인식하게 된 것일 뿐.

그래서 영원은, 이 의식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형태로 구현해내는 것을 제1 목표로 정했다.

어쩐지 가능할 것도 같았다.

‘여러 이론적인 검증도 필요하겠지만, 수식 들먹이고 차원의 함수 들먹이는 건 더 재미없으니까 일단 다짜고짜 시도부터 해 본다.’

우선, 오른쪽 손부터.

당연히 해내기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 어려운 목표들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골라낸 쉬운 과제이다 보니 자신감은 있었다.

‘손 하나, 발 하나를 만들려고 애쓰다 보면 어찌어찌 전신에 다다르지 않을까.’

의식 속에서 의지로 형태를 구현해내는 것은 이론상으로도 불가능한 일 같지 않았다.

하루, 이틀.

영원은 계속 애를 썼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계속 더 큰 열정을 불어넣었다.

형체를 구현하는 일에 집중하니 고통도 옅어지는 것 같고, 무료함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그리고 사흘 뒤.

‘뭔가 만들었어!’

아주 흐릿한 무엇이 생겨났다가 지워졌다.

동그랗고 뿌연 무언가.

동시에 문제가 발생했다.

‘아악!’

‘악!’

‘아파!’

뿌옇게 영원의 실체가 잠시 생겨나자, 모든 고통의 감각이 그 작은 부분에 집중되었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영원을 덮쳤다.

‘헉, 으.’

‘…….’

하지만 영원은 조금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한 기분이었다.

‘뭐야, 나…… 해냈어.’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었지만, 성과가 난 이상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지.’

‘언젠가, 저 수레바퀴에 가까이 가서 걸터앉는 거야.’

영원은 더 큰 고통을 각오하고서 뿌옇고 동그란 구형처럼 만들어졌던 손을 좀 더 선명하고 도톰한 원판 모양으로 빚어냈다.

‘윽.’

형태가 선명해질수록 고통은 더해졌지만, 영원은 절대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고통이 올 걸 알고 있었으니, 그냥 왔구나, 하면 되는 거니까.’

영원은 점차, 수레바퀴에 다가가 곁에 드러눕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됐다.

‘내 신체 바깥에 무엇을 만들어내는 건 훨씬 어렵겠지. 그러니까 침대 하나 만들어내려면 이 속도로는 5년은 들여야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몸은 금방 만들어낼 수 있을 것도 같아.’

‘일단은 수레바퀴를 침대 대안으로 여기자.’

수레바퀴 옆에 드러눕겠다는 생각으로 의지를 다지자, 더 속도가 붙었다.

오른손 이후엔 왼손도 만들어냈다.

영원은 의지에 따라 약간씩 움직이는 오른손을 5초까지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 아프지만 성공했어. 역시 나는 먼치킨.’

영원은 마음속으로 팡파르를 울리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한 시간 정도 가진 뒤, 신체 내부의 기관들도 하나둘씩 만들어서 작동시켜보기 시작했다.

쿵.

잠깐 뛰는 심장.

깜빡.

한 번 깜빡여 본 눈.

스윽.

두 걸음 걸어가는 양쪽 다리.

‘먼치킨, 나이스!’

영원은 다소 고통에 지쳤다는 생각이 들 때면 수레바퀴의 존재를 멍하니 느끼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미약하게 차오르는 우울함으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쳤다.

‘나아가고 있어.’

‘이렇게 해서 결국 뭘 이룰 수 있을지 불분명하지만, 그거야 차차 알아가면 돼.’

계속 더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정신승리는 가능했다.

영원은 스스로를 정신승리력 우주최강이라 평가하며 입술만 구현해 내어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또 여현을 생각하기도 했다.

‘내 에스퍼님은 나를 절대 잊지 않아.’

영원은 그 확신을 잃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

‘……음.’

‘응?’

‘…….’

‘뭐지?’

‘헛것?’

저 멀리, 수레바퀴 뒤편에, 지나치게 영원의 취향인 외모를 가진 누군가가 옅은 형체를 띠고 나타나 아른거렸다.

김여현.

여현이다.

내 에스퍼.

그는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다가, 멍한 표정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

영원은 끔찍한 먹먹함 속에서 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수레바퀴에 이어서, 대체 어떻게 이 암흑 속에 여현의 형체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약간은, 아주 미약하게라도 연결된 느낌.

우리가 서로를 잃지 않은 느낌.

죽을 것같이 괴롭지만, 어째서 그가 눈앞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그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영원은 자신의 신체를 구현하는 일을 멈추고는, 주변을 천천히 살피는 여현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헛것이라 해도 좋아.’

‘내가 완전히 미친 거라 해도 좋아.’

여현은 수레바퀴 너머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사라졌다.

‘…….’

그 이후, 영원은 아주 오랫동안 수레바퀴 너머의 암흑을 느끼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여현은 다시 왔다.

‘…….’

영원은 다시 똑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를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무언가 실수를 하여 여현의 형체가 다시 사라져버리도록 둘 수는 없었다.

그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현은 또 사라졌다.

‘…….’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왔다.

조금 더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조금 더 수레바퀴와 가까운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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