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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12화 (112/142)

여현은 펜트하우스 밖에서 느끼는 자극에는 더욱 무뎌져 갔다.

빛, 음향, 수많은 종류의 힘…….

외부의 모든 것은 얇은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듯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눈앞의 모든 것이 진정한 나의 세계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느낌.

여현은 반면에, 영원이 잠든 펜트하우스 내부에서 느끼는 자극에는 갈수록 더 예민해져만 갔다.

영원을 비추는 조명의 미세한 밝기 차이, 링거에서 뿌연 액체가 떨어지는 속도 차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만 느낄 수 있는 표정과 숨소리의 변화, 심장이 뛰는 속도의 증감…….

그 외에도 수많은 사소한 것들이 주는 자극에 여현은 폭풍우가 몰아쳐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영원과 함께 있는 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엔 조금도 마음이 쓰이지 않는데, 내부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 하나에도 생각과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 반응이 병적이라는 걸 여현도 알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떨칠 방법은 없었고, 모든 사고가 그녀에게 지배당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멕시코시티에서 일을 마친 다음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곧바로 영원의 곁으로 왔다.

그리고는 그만이 발견할 수 있는 차이를 주의 깊게 살폈다.

작은 진동이 정적을 깰 때까지.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현아]

[깨어있니]

메시지가 도착한 걸 알았지만 여현은 잠시도 영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영원을 바라보는 일을 잠시라도 중단하기 싫어서, 시선을 옮겨 메시지를 재빨리 확인했다.

이창결 부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네]

답을 보내자 다음 메시지가 금방 돌아왔다.

[잠시 들를게. 영원 가이드님 관련한 용건이야]

[네]

여현은 짧게 답한 다음 다시 영원을 바라보는 일에 집중했다.

보고 있는다고 하여 더 나아지거나 달라질 건 없지만, 계속 그러고 싶었다.

그게 돌아버릴 것 같은 불안을 다소나마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요즘 이 넓디넓은 펜트하우스에서 여현이 머무는 유일한 공간은 사실상 영원이 잠든 방 하나였다.

잠깐 들르는 다른 공간이라고 해봐야 씻기 위해 오가는 욕실과 드레스룸이 다였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여현은 자신의 침실로 가지 않고 영원의 침대 옆 소파에 앉은 채로 잠시 눈을 붙이기만 했다.

감히 잠든 영원의 곁에 누울 수는 없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잠들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계속 그러고 있다 보면 잠깐씩은 아늑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

여현은 차츰 끔찍한 생각이 발목을 타고 뱀처럼 몸을 기어 올라오는 기분을 느꼈다.

‘네가 상상하는 차원을 한참 넘어선 고통이야. 기계 가이딩에 비할 정도도 아니야.’

‘심지어 그 고통은 끝없이 이어지겠지. 무려 SSSSS급 게이트를 없앴으니.’

전선 없는 스피커를 타고 들려온 그레이의 음성.

그것이 아무 소음 없는 이 방 안에서 다시 들리는 듯했다.

“…….”

사실 여현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주의를 기울여 보면, 영원의 잠든 모습은 그리 평온하게 보이지 않았다.

영원은 가끔 아주 미미하게 인상을 썼고, 고개를 양옆으로 돌리며 괴로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녀가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꽤 이전부터 여현을 괴롭히고 있었다.

연금술의 대가로 그녀가 어떤 것을 치러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숨이 턱턱 막히게 만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확인사살을 당한 것이다.

영원이 지금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그녀가 보이는, 그가 그녀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표정이 고통에 대한 반응뿐이란 게 여현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현은 그레이 측 각성자들과의 싸움에서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는데, 당장 가이딩 기계가 고통을 주고 있지도 않은데, 극심한 고통에 심장이 후벼 파였다.

이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건 내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 여현을 더 힘들게 했다.

영원은 이 세계를 파멸에서 구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집어삼키고 눈을 감았다.

앞으로 얼마나 긴 세월을 더 고통 속에서 감내하기로 한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여현 자신은 처음엔 영원이 자신을 버리고 가는 거라 생각하며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 짧은 순간의 원망을 후회했다.

그러나 사과를 할 수도 없었다.

들을 수 없을 테니까.

고통에 익숙하다고 했던 과거의 말들이 밀물처럼 끊임없이 밀려 들어와 여현을 덮쳤다.

영원은 허풍을 떠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정말로 고통에 익숙할 터였다.

여현 자신보다 훨씬.

그리고 과거의 어떤 고통보다, 지금의 고통이 가장 거세겠지.

지켜보는 고통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이 순간 더 괴로운 것은 그녀겠지.

드르륵.

드르르르르륵.

여현은 멀리 있던 가이딩 기기 수십 개를 힘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기계 가이딩을 받기 시작했다.

의총이 얼마 전 S급 던전석을 엄청나게 넣어 가이딩 효율을 높여 준 것들이었다. 효율이 높아진 만큼 기계가 가하는 고통의 크기도 커졌다.

물론 여현은 기계가 가하는 고통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더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만큼 큰 고통을 느꼈으면.

멕시코에서 비우고 온 그릇이 점점 차올랐다.

그러나 공허했던 빈 곳이 충족되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이 점점 채워져 갈수록 가이드의 결핍만 선명해졌다.

그릇을 채우는 힘이 영원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는 게 괴로웠다.

영원이 자신의 곁에 있을 때부터 그녀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정말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아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적 없었다.

그런데도, 과거에는 그 모든 일상이 그토록 제게 과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하는 마음이 일었다.

심장이 꽉꽉 조여들었다.

돌 것만 같이 갑갑했다.

위이이잉.

가이딩 기계들이 큰 소리를 내며 더 거세게 고통을 안겼다.

여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고통은 견딜 수 있다.

지금 그는 영원이 느끼고 있을 고통을 걱정할 뿐이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계속하여 억장을 무너뜨렸다.

“…….”

혼잣말로라도 영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 하면 목이 메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할 권리도 없는 것 같고,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정말로 여현은 그를 가둔 괴로움 속에서 서서히 메말라가고 있었다.

내면이 다 바스러졌다.

위이이이잉.

고통 속에서 영원이 눈을 뜨기만을 소망했다.

깨어난 그녀에게 가이딩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가이딩이야 영영 안 받아도 괜찮았다.

그녀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어도 좋으니, 사소한 무엇이라도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게 부디 눈을 뜨기만을 바랐다.

가이딩에 대한 갈망보다, 그녀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미치게 했다.

살아나겠지.

당연히 눈을 뜨겠지.

언젠가 다시 이름을 불러주겠지.

언젠가는.

계속 버티며 살아가다 보면 그녀가 깨어나리란 믿음을 놓을 수 없는 건,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여현에게는 그것이 그의 생존을 이어갈 유일한 끈이었다.

센터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보다도 여현의 고통은 깊었다.

다들 여현이 끔찍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러면서 각자 여현이 느낄 고통의 크기를 짐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실상을 알지 못했다.

여현의 감정은 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깊고 어두운 저 한참 아래의 지하에 있었다.

오열하고 싶다.

그러나 여현은 누군가에게 기대 어리광부린 경험이 한 번도 없어, 감정을 어떻게 분출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저 센터에서 부수라고 하는 것들을 차례로 부수어갈 뿐.

그녀가 지켜내려고 했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쓸 뿐.

영원이 구해낸 세계인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버려버릴 수는 없으니, 그녀를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레이 딘하우스는 없애야 한다고.

오직 영원을 위해서.

지잉.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10분 뒤쯤 도착해]

여현은 이창결 부장의 메시지를 확인한 다음, 정적 속에서 다시 영원을 지켜보는 일을 이어갔다.

***

이창결 부장은 백율의 사무실을 떠나기 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오류를 찾기 위해 재차 논리를 정돈했다.

여현에게 의미 없는 희망 고문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가이드에게 남은 어떤 상처라도 치유될 가능성이 있어요. 죽음의 목전에 다다르게 만든 상처라 해도.”

백율 부장의 사무실에 모인 여섯 명은 다시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그 대가로…… 김여현 에스퍼님은 영원히 단 한 명의 가이드에게만 가이딩을 받을 수 있는 몸이 될지도 몰라요.”

“그렇죠. 영구히 종속시키는 각인이 새겨진 것처럼.”

윤희유 교수와 화연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영원한 종속.

각인.

언뜻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나, 제정신인 에스퍼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제정신인 에스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영구히 가두는 끔찍한 족쇄일 것이, 누군가에게는 감금 같지도 않은 감금일지도 몰랐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던 현상이 현실에 펼쳐지는 걸 최근 너무나 많이 보아온 터라, 뭐가 더 벌어져도 놀랍지는 않을 것 같아요.”

윤희유 교수는 희망을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각인이라니.

영구한 치유라니.

그런 게 가능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SSSSS급 게이트라고 과거에 나타난 사례가 있었던가? 절대 아니다.

김여현과 심영원 사이의 매칭률도 그랬다.

S급을 초과하는 각성자끼리 90%의 매칭률이 나올 수도 있다는 소리는, SSSSS급 게이트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허무맹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90.01%.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숫자인가.

하지만 김여현과 심영원 두 사람은 존재한다.

매칭률 조정,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 S급 던전석을 사용한 치유…….

사실, 둘 사이에 있었던 말도 안 되는 일은 이미 한두 가지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각인.

그건 두 사람 사이에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정신적인 각인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듯도 했다.

“……그럼, 이제 가서 현이한테 제가 대표로 전달할게요.”

이창결 부장이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화연 가이드님도 아까 영원 가이드님 상태를 확인해야 확실해질 부분이 있다고 하셨으니까, 같이 가시죠.”

“네.”

화연과 이창결은 함께 백율 부장의 사무실을 나서서 여현의 펜트하우스로 향했고, 금방 한강 근처에 다다랐다.

똑똑.

이창결과 화연은 여현의 펜트하우스에 이르는 모든 관문을 막힘없이 통과해, 여현과 영원이 있는 방 문 앞에 섰다.

“……네. 들어오세요.”

여현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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