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율 부장은 사무실에 들어선 화연을 보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달칵.
화연은 열고 들어온 문을 닫고는 백율의 반응을 기다렸다.
“……다친 데는 없고?”
백율은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다소 잠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네. 멀쩡해요.”
화연은 살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백율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꽉 안았다가 놓았다.
“혼술하고 계실 줄 알았어요. 예상적중. 근데 안주라도 좀 같이 드시지, 스트레이트로 이게 뭐예요.”
화연은 위스키병을 가리키며 타박하듯 말했다.
백율은 가만히 한 걸음 멀어진 화연을 보다가 검은 생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그러게.”
“……걱정하셨어요?”
“꽤…… 많이.”
백율도 화연의 몸을 한 번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고마워, 돌아와 줘서.”
“……네.”
“근데 진짜 다치거나 아픈 데 없는 건 맞아?”
백율은 안 그래도 마른 편인데 살이 더 빠진 듯한 화연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네. 배는 좀 고프긴 한데.”
“기다려 봐.”
백율 부장은 사무실을 나서서 탕비실로 가 화연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빵과 따뜻한 차를 챙겨 돌아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며칠간 굶은 뒤 바로 먹으면 탈이 나겠지만, 화연은 밍밍한 빵과 차 정도는 이 상태에서도 소화해낼 S급 가이드였다.
화연은 사무실 중앙의 소파에 앉아 감사하다고 말하며 빵과 차를 받아들었다.
“근데 제가 설마 쉽게 죽겠어요? 누가 제 목숨을 자기 목숨 걸고 구했는데.”
화연의 맞은편 소파에 마주 앉은 백율이 작게 웃었다.
“그걸 잊지 않고 있었다니 다행이네.”
화연은 하늘을 어떻게 따돌리고 나왔는지 간략하게 이야기하며 빵을 천천히 먹었다.
화연은 하늘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사실도 말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백율은 화연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금방 SSSSS급 게이트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위기감을 느낄 수 없는, 오랜 전담 사이의 안정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로.
생각해보면 생사의 갈림길에 함께 다녀온 게 처음도 아니었다. 이 이상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러던 중 화연의 시선이 채워지다 만 위스키 잔과 거의 다 비워진 위스키병이 있는 곳으로 다시 향했다.
“저도 좀 센치한 기분이라 같이 한잔하고 싶은데, 술은 안 되겠죠. 그리고 당장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더 급히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화연이 생각하기에, 이미 벌어진 사건을 보고하는 시간은 충분히 가진 듯했다.
이제,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한 논의를 시작할 때였다.
“가능하다면 윤희유 교수님도 이곳에 모시면 어떨까요? 윤 교수님 의견도 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래. 주무시고 계실 수도 있으니까 내가 메시지로 가능한지 여쭤볼게.”
톡톡.
백율은 화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으로 윤 교수에게 화연이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와줄 수 있겠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새벽 1시가 넘어서 메시지를 받은 윤희유 교수는 당장 달려가겠다는 답변을 곧바로 보냈다.
답장을 보냄과 동시에 백율에게 전화를 걸어 화연을 바꿔달라며 다급히 찾기도 했다.
―화연 가이드님!
“네, 교수님.”
―어쩜 좋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아, 네…….”
―지금 사무실이니까 10분도 안 걸려요. 금방 갈게요! 곧 봐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챙겨 갈까요?
“아, 일단은 괜찮습니다. 말씀만도 감사해요.”
화연이 미지의 공간에서 나왔다는 정보는 요련, 이창결 부장, 의총에게도 전해졌고, 그들은 바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차례로 (주: 모두 역삼 본부 내 본인의 사무실에서 출발해) 백율의 사무실로 도착했다.
다들 빈속에 먹어도 괜찮을 법한 부드러운 음식을 한두 개쯤 손에 든 채였다. 약밥, 카스텔라, 단팥빵 등등.
화연은 감사하다며 음식을 받아 들고는 그것들을 조금씩 포크로 뜯어 먹었다.
그렇게 여섯 명이 백율 부장의 사무실 소파에 모두 둘러앉게 된 시간은 1시 20분경이었다.
영원이 보았다면 이미 퇴근한 장제권만 정상 공무원이라고 한 뒤 ‘이 X친 프로 야근러들……! 님들 싹 다 공무원 아닌가요……!’라며 질린 표정을 할 풍경이었다.
다들 화연의 무사 귀환에 기뻐했지만, 즐거워만 하는 환영 시간은 짧았다.
“영원 가이드님을 깨어나게 할 방법이 있어요.”
화연이 급히 본론을 꺼내든 덕이었다.
“완전히 확실하진 않은데, 가능성은 충분해 보여요.”
“…….”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전문가시니까, 제 얘기를 듣고 이게 타당한 생각인지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화연을 보고 있던 다섯 모두 표정을 굳힌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어질 화연의 설명만을 기다렸다.
“여현 에스퍼님 쪽에서 영원 가이드님과의 매칭률을 최대한 높인 다음, ‘역가이딩치료’라 이름 붙일 만한 치료를 해낸다는 게 주요 골자예요.”
다섯은 화연이 말하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다가 의총, 윤 교수, 요련이 차례로 질문을 꺼내놓았다.
“S급 던전석을 이용한 가이드의 치료를 역으로 해보자는 말씀인가요?”
“두 사람의 높은 매칭률에 기대서요?”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하면, 대체 무슨 방법으로?”
화연은 세 사람의 질문이 끝난 뒤,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두 사람 사이의 압도적인 매칭률에 기대서, 가이드가 에스퍼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메커니즘을 역으로 이용해보자는 거예요.”
“…….”
“보통의 에스퍼랑 가이드라면 불가능하죠. 하지만, 김여현과 심영원이니까, 가능할 수 있어요.”
여현과 영원은 평균과 가장 멀리 떨어진 극단의 전담 조합이었다. 능력이든, 매칭률이든, 뭐든.
그러니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할 수 있었다.
의총이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영원 가이드님이 치료를 위해 이미 80% 정도까지 매칭률을 높여두셨을 거예요. 하지만, 그 이상 매칭률을 높일 방법을 저는 모르겠네요.”
“네, 일단 매칭률을 높이는 부분에 난관이 있기는 해요. 그건 영원 가이드님 쪽에서 전권을 가진 것처럼 보였거든요. 하지만, 방법은 있지 않을까요?”
화연은 다른 사람들은 떠오르는 바가 없는지 묻듯, 앞에 있는 다섯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요련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로 과거에 오류로 인해 나온 결과라고 생각했던 매칭률을 떠올렸다.
[90.01%.]
매칭률이라는 건, 80% 정도만 되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치였다.
매칭률 90.01%.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오류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영원이, 한참 후에야 매칭률을 임의로 높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얼핏 알려주었다.
그러자 영원에게 그 방법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이 순간 그때 들은 얘기가 약간의 도움은 될 터였다.
“영원이는…….”
요련이 입을 떼자 모두의 시선이 요련에게로 모여들었다.
“가이딩을 시작할 때 수레바퀴 같은 것을 돌려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본능적으로, 의지를 통해서요.”
“…….”
“그렇다면, 만약 에스퍼 쪽에서 매칭률을 조정할 수도 있다면 그건 역가이딩을 시작할 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요련의 말이 새로운 단서가 됐다.
“그런데 김여현 에스퍼님이 영원 가이드님에게 역가이딩을 할 수 있을까요?”
백율 부장이 물었다. 역가이딩은 능력이 우월한 에스퍼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창결 부장 역시 지금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 이 건물에서 영원에게 역가이딩을 시도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느꼈다. B급이라 평가받은 비선별 가이드에게. 그걸 믿고 싶지 않아 여현에게는 확실히 A급 이상이기는 한 것 같다고만 말했다.
여현이 그저 S급 에스퍼이기만 하다면 영원을 상대로 역가이딩이 가능할 거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창결 부장은 얼마 전 보게 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며 말했다.
“다들 느끼셨겠지만, 여현이도 등급이 상향된 것 같아요.”
“…….”
모두 짐작은 하고 있었다. 김여현에게 그보다 더 성장할 단계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현이가 먼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고, 랭킹 역시도 업데이트되고 있지 않기는 한데…… 상위 랭킹에 오를수록 세계수가 특전을 부여하기도 하니까, 어쨌든 역가이딩, 가능할 수도 있어요.”
가능성이 없지 않다면, 시도해보는 것이 맞았다.
“그럼 제 생각엔 또…….”
이후에도 논의는 계속 이어졌다.
무엇이 필요할지,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지, 준비물은 S급 던전석이면 충분할지.
각자의 전문적인 지식을 더하며 논의를 확장해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만한 전문가들이 모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희망을 찾아냈다.
마지막 단계에서 시행할, 던전석을 이용한 치료에 대한 전문가는 의총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미친 소리겠지만, S급을 초월하는 등급의 에스퍼와 가이드가 90%가 넘는 매칭률에 이른다면, 가능할 겁니다. 당연히.”
그러나 오로지 희망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셔야 해요. 이 작업은…….”
윤희유 교수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문제를 분명하게 강조했다.
“김여현 에스퍼에게 쉽지 않은 과제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할 수도 있어요.”
“이를테면요?”
이창결 부장이 윤희유 교수에게 물었다.
“미친 쾌락이 만들어 낼 영원한 종속.”
“…….”
“S급 던전석까지 이용해서 가이드와 깊숙이 연결되려고 한다면, 김여현 에스퍼님이 스스로 부서질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
“기계 가이딩 외에는 다른 어떤 가이드에게도 가이딩 받을 수 없는 몸이 되는 걸.”
매칭률 90%가 넘는 가이딩.
그건,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황홀경에 에스퍼를 다다르게 하는 일일 터였다.
쾌락에 관한 한계치를 한참 초과하는 감각을 겪으리란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에 더해, 둘 사이의 감각을 연결해 무의식에까지 개입하여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바꾸어내려고 한다니.
상대의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다가, 그 힘에 끌려가 상대에게 완전히 종속될 수도 있다.
개인의 감각을 완전히 박살 내, 다른 그 누구도 찾지 못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한 명의 가이드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에스퍼가 되는 것이다.
그에는 ‘각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김여현이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문제였다.
“현이가 금방 멕시코시티에서 돌아온 것 같아요.”
이창결이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얘기를 해 볼까요?”
“…….”
다들 말없이 긍정의 뜻을 표했다.
“저희가 현이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여현에게는 그가 감당해야만 하는 대가가 조금도 문제 되지 않을 것 같다.
연락을 위해 핸드폰을 든 이창결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김여현은 그의 가이드인 심영원에게 그 이상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돌아서, 다른 가이드들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엔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게 분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