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 이후, 외근을 마친 백율 부장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레이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있고, 한국에서는 사건 사고가 거의 터지지 않아 급한 업무가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달칵.
자잘한 결재서류까지 다 확인한 백율은 지친 표정으로 위스키를 땄다.
촤륵.
투명한 잔이 갈색 액체로 가득 찼다. 언젠가 화연이 스코틀랜드에 출장을 다녀오며 선물한 싱글몰트였다.
백율은 과일, 견과류나 비스킷 같은 안주 없이 천천히 미지근한 술만을 들이켰다.
삐빅. 삐빅.
잔을 반쯤 비웠을 때 인이어를 넣어 둔 케이스가 울렸다. 발신자는 이창결이었다.
탁.
백율 부장은 술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 인이어를 착용했다.
“어, 왜.”
—방금 요련이한테 센터 스파이 최종 목록 전달받았어. 방금 너한테도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
좋은 소식이었다.
“잠시만. 좀 볼게.”
백율은 보안 라인을 통해 전달된 파일을 바로 확인했다.
총 47명.
그 안에는 센터 역삼 본부의 본부장 이름도 있었다. 피가 차게 식었다.
A급 에스퍼, 윤주성.
그래도 가장 우려했던 사람,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
백율은 수년 전 이창결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명단에 적힌 이름과 그 옆에 붙은 얼굴 하나하나를 머리에 새겼다.
‘율아. 우리는 앞으로 이 작전을 수행하며 누구라도 의심해야 해.’
‘누구? 염두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길 바라지만…… 만약 역삼 본부 센터장이나 대통령이 모두 그레이의 편으로 이미 돌아섰다면, 혹은 나중에라도 돌아선다면…….’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그러길 바라.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기를.’
‘…….’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우리는 아주 조심해야 해. 정말로, 아주.’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여겼다. 이창결이 심각한 피해망상에 빠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합중국의 대통령마저 그레이의 편이 된 현재 상황을 보면 이창결의 판단은 옳았다.
이창결이 자신의 등급을 상향시키지 않으면서 요련의 작전을 돕지 않았다면, 윤주성 본부장이 그레이의 편이 되었다는 건 절대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목록에 윤주성 본부장은 있지만, 대통령은 없어.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 아직 우리나라가 완전히 다 썩어있지는 않은가 봐.
“……그러게.”
정말로, 그나마 다행인 일이기는 했다.
특히 걱정하던 불확실성 중 하나가 해소된 거니까.
이 국가의 모든 기관을 적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능성이 드디어 지워졌다.
—요련이가 정말 여러 번 확인했어. 다른 가능성은 없다고 보여.
“알겠어. 목록 숙지하고 있을게. 가이드님한테 정말 고생 많으셨다고 전해 줘. 그나마 여유가 생겼을 때 좀 쉬시라고.”
—말은 나도 여러 번 했지. 좀 쉬라고. 근데 무슨 매칭률 기기 테스트를 새로 해야겠다나 뭐라나? 아무튼, 다시 별관 어디 연구실로 갔어.
퇴근 따위는 없다는 듯이 사는 옆 부서의 가이드는, 자연스럽게 비슷한 성향인 백율의 전담 가이드를 떠올리게 했다.
백율은 이창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고서는 말했다.
“그럼, 이제 누구를 경계하면 되는지 분명해졌으니 보안 관리가 좀 수월해지겠네.”
—어. 그렇겠지. 아, 그리고.
“그리고?”
—보고서 밑에 달아 놓은 의견 보면 알겠지만, 그레이에게 ‘고요련이 스파이’라는 걸 여러 경로를 통해 알릴 거야.
이창결의 말을 들으며 백율은 보고서 하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센터 내 스파이들, 최환성 에스퍼를 통해 역으로 정보를 얻는 건 요련이에게서 이미 얻어낸 정보인 것처럼 감추려고 해.
앞으로는 요련을 통해 얻는 정보를 포기해야 하더라도, 그레이에게 센터 내 스파이를 다 파악했다는 것과 환성이 스파이라는 걸 감추는 편이 더 이득이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위험해진 때에 요련이 더 오래 위험에 노출되는 것도 좋지 않았다.
백율 역시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알겠어. 너도 고생 많았다. 요련 가이드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쉬어.”
—그래. 너도 쉬는 시간 생겼다고 술은 좀 작작 처마시고 집에나 빨리 튀어가라.
“끊는다.”
—ㅇ…….
백율은 이창결의 답을 듣기 전에 연결을 끊어버리고는 다시 위스키를 몇 모금 더 마셨다.
그다음엔 가이딩 밴드를 사용해 화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스파이가 다 파악된 것은 중요한 일이니, 즉시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 화연이 어디에 있는지와 무관하게.
[화연아, 요련 가이드님 임무 완료]
[센터 첩자 전원 파악 끝]
[그레이에게 요련 가이드님의 정체가 알려지게 하려고 해]
[환성을 통해 빼낸 정보가 요련을 통해 누설된 거라고 생각하면]
[환성이 스파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을 거란 게]
[요련 가이드님 의견]
백율은 47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목록을 다시 훑었다.
여러 번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 많았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아.”
사건 현장에 달려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순간에는 상념에 젖을 여유가 없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고 쉬어갈 시간이 주어지면 머릿속 한쪽으로 밀어두었던 감상들이 몰려왔다.
‘술기운이 돌아 더 그런가.’
달칵.
천천히 마신다고 했는데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듯했다. 백율은 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댔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갔다.
촤르륵.
블라인드를 걷었다.
저편 본관의 불빛들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
역삼 본부의 풍경은 몇 달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그 풍경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달라진 것만 같았다.
퇴근 후 함께 술을 마시며 농담을 주고받던 각성자들 중 상당수가 대놓고 센터를 배신하고 떠나기도 했다.
그중 몇몇은 백율이나 여현이 붙잡아 감옥에 넣었고, 몇몇은 아직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김여현(ES2)…센터의 배신자 이지준(ES7)·김지설(EA19) 검거]
[속보: 배신자 진나진(GS5), 베를린서 목격]
화가 약간 났다. 분노는 그들을 향하기도 했고, 다소나마 그들을 믿고 있던 자신을 향하기도 했다.
그래도 백율은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잊지 않으려 했다.
지금 당장도, 저편의 불빛 하나하나가 전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이들의 방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괴로운 건…….’
백율은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 다시 위스키 잔이 놓인 테이블 앞으로 갔다.
무언가가 얹힌 듯 불쾌하고 긴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센터 소속 각성자들의 배반 때문이 아니었다.
화연의 생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언젠가 나올 거라는 믿음은 헛된 희망인가?’
‘별관 지하 60층 사무실을 쓰는 누구랑 똑같이 굴고 있는 건가?’
백율은 여현이 영원에게 품은 희망은 다소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화연은 또 다를 거라 생각하게 되는 자신이 우스웠다.
‘에스퍼들이 원래 다 이런 건가.’
그동안 수많은 인간의 죽음과 실종을 봤다.
닫힌 게이트나 던전 앞에서 그들의 가이드가 살아 돌아올 것이라 부르짖는 에스퍼들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나도 똑같은 모양이지. 바보같이.’
백율은 다시 빈 잔 위로 위스키병을 들었다.
촤륵.
잔이 다시 반쯤 차올랐다.
똑똑.
그러다 들려온 노크 소리에 기울어졌던 병이 다시 바로 섰다.
백율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새벽 1시.
퇴근하지 않은 부원이 있었나, 백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위스키병과 잔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누구인지 파악하려 하다가, 행동이 정지했다.
들어오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이 열렸다.
달칵.
“부장님.”
“…….”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타박.
발소리와 함께 화연의 모습이 보였다.
다소 초췌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살아서 숨 쉬고 움직이는 강화연이었다.
“저 방금 나왔어요.”
“…….”
“많이 걱정하셨죠.”
가끔, 바보 같다고 생각되던 희망과 간절함은 응답한다.
***
멕시코시티의 남부.
콰지직.
여현의 힘이 그레이 측 각성자들이 운영하던 공장을 짓눌렀다. S급 던전석을 이용한 물품을 은밀히 제작하던 곳이었다.
건물 외벽이 쿠킹호일이라도 된 양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쩌저적.
쿠구궁.
여현은 건물의 형체를 완전히 박살 내면서도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천여 개의 S급 던전석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난품을 반드시 제자리로 돌려두어, 그의 가이드가 실망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제발, 제발!”
공장에서 튀어나온 각성자들 대부분은 전의를 상실한 채 여현이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바랐다.
물론 여현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 중 S급 에스퍼 한 명은 끝까지 격렬하게 반항하기도 했으나, 그래 봐야 여현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여현은 눈앞의 현실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만 마주했다. 그저 공장을 부수고, S급 던전석들을 모두 수거해간다는 목표에만 집중했다.
센터와 협의한 목표만을 생각하는 것. 목표를 이루면 다시 영원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결핍을 견디며 평정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지직.
그런데 여현이 공장을 정리하고 떠나려는 와중, 저 멀리에 있던 스피커 하나가 소리를 냈다.
멈칫.
여현이 몸을 돌렸다.
—K.
그레이의 목소리가, 전기선 하나 연결되지 않은 기계를 통해 들렸다.
—엄청난 연금술을 해내면, 그를 행한 연금술사는 꽤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 편이야.
“…….”
—그냥 편안하게 잠만 자는 것 같지? 아닐걸. 포에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고통을 견디고 있을 거야.
여현은 스피커를 바로 부수지 못했다.
—네가 상상하는 차원을 한참 넘어선 고통이야. 기계 가이딩에 비할 정도도 아니야.
“…….”
—심지어 그 고통은 끝없이 이어지겠지. 무려 SSSSS급 게이트를 없앴으니.
“…….”
—대제가 그 힘의 대가로 어떤 고통을 받게 될지 포에버가 네게 설명해 준 적이 없었나?
“…….”
문득 어떤 장면이 스쳤다.
‘혹시 싫은 이유가 가이드의 고통 때문이라면, 적어도 나한텐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내 고통 때문에,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마.’
고통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니 특별히 네가 걱정할 게 아니라던 그녀의 태도.
가까스로 유지되던 여현의 평정은 다시 처참하게 흐트러졌다.
콰과광!
그레이의 공장이 있던 일대는 또 깨끗한 공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