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주어진 것 같은 불행은, 의외로 나만 겪은 불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기에, 따로 떨어져 살던 사람들도 종종 시차를 두고 비슷한 종류의 불행을 겪기도 한다.
“같은 종교 단체가 만든 비슷한 시설에 있었어.”
화연은 덤덤하게 말했다.
“훈육과 통제가 가혹하기로는 네가 있던 곳보다 더 유명한 곳.”
“…….”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아직도 음모론이 더해져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
“…….”
“언론에서는 ‘원인불명의 원자력발전소 붕괴 사고’라고 했어. 너도 들어본 적은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
“유일한 생존자가 한 명뿐이라고 알려져 있잖아. 그거, 나야.”
화연이 있던 시설은 대외적으로는 ‘그 누구도 살지 않는’ 발전소의 탈을 쓰고 있었다. 겉으로는 정말로 누구도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러다가 센터에서 시설의 불법행위를 파악한 다음에 문제가 생겼다.
센터 각성자들이 대거 출동한다는 소식을 접한 관계자들은 발전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사실상 자폭과도 같은 짓을 했다.
A급 에스퍼 16명이 동시에 폭주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화연의 생존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늘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장님이 정말 목숨 걸고 콘크리트 밑으로 구하러 들어오셨지. 정말 겁이 없으신 분이라.”
백율 부장은 A급 에스퍼들의 동시 폭주가 임박했고, 원자력발전소의 방사성 물질들이 어떤 피해를 줄지 모른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설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자애가 안에 살아있다잖아! 이 미친 XXXX들아, 좋은 말로 할 때 안 비켜!’
그리고는 화연을 구했다.
화연은 아직도, 일렁이던 화염 속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던 아름다운 꽃밭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죽음에 이른 게 아니고서야 이런 환상 같은 풍경을 생생하게 볼 수는 없는 거니까.
때마침 사신같이 검은 정복을 입은 누군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꽃밭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외양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름이 뭐니?’
‘화……연이요. 강화연.’
‘화연아, 나는 백율이야. 내가 여기서 너를 구해줄게.’
사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번에 부서졌다. 그녀가 자신을 구해주겠노라고 약속했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같이 나가보자.’
그녀는 처음엔 호기롭게 말했으나, A급 에스퍼들의 두 자릿수 연쇄 폭주는 쉽게 처리되지 않았다.
그때 화연은 비선별로 각성한 이후 처음으로 그 누구의 강요 없이도 에스퍼를 가이딩했다.
‘뭐야…… 너…… 혹시 가이드니?’
화연은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이딩 좀 부탁해. 여기서 나가면, 언젠가 세상을 같이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네.’
그러다가 천장이 크게 무너지며 엄청난 화기를 느꼈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그녀를 구한 백율은 더 빨리 회복하여 센터로 돌아갔다는 설명을 들었다.
며칠 뒤에 병원에 찾아온 백율은 화연에게 너는 아직 어리니, 당장 센터로 올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비선별 가이드는 센터에 귀하니까, 나중에는 꼭 센터로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화연은 자신은 당장 센터로 가서 세상을 구할 가이드가 되겠다고 주장했다.
‘당장요.’
‘화연아, 당장은 좀……. 학교부터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백율의 완곡한 거절에도 화연은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당장 가겠다고 주장했다.
학업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게 조건이라면 그렇게 할 테니, 수업을 마치고 오면 센터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결국에는 백율이 포기했다.
화연은 백율 부장이 속한 부서에 배치되었다.
이후부터 화연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가이딩을 연마했다.
병행한 학업에서도 엄청난 성취를 거두어 의대에 진학했고, 등급을 상향시켜 대한민국 비선별 가이드 중 유일한 S급이 되었다.
천재 강화연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 역시 시설에 있을 때는 인간들 모두를 증오했어.”
그래서 하늘의 이야기에서 감응하게 되는 지점을 찾아내기도 했고, 하늘의 고통에 이입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하늘에게 여기서 나갈 방법을 알려달라며 더 모질게 굴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람을 미워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곳이잖아. 하지만, 밖으로 다시 나와 보니 세상이 전부 다 그런 곳은 아니더라. 좋은 사람들도 많고.”
“…….”
“부장님에게 구조된 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다행인 일이었지.”
S급이 되었을 무렵, 마침 백율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가 은퇴하여 전담 가이드의 자리가 비었다. 빈자리는 당연히 화연의 차지가 됐다. 그 역시 행운이었다.
백율 부장 덕에 S급 던전들을 돌며 최전방에서 귀한 경험을 많이 했다. 가이드의 힘에 관한 여러 실험을 해보기에도 최적인 환경이었다.
덕분에 가이딩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여럿 찾아내 정말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
“처음부터 평정을 유지하는 게 쉽진 않았어. 내게도 악몽과 분노는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도저히 도와주고 싶지 않은 짜증 나는 인간들도 꽤 만났지.”
“…….”
“내가 악몽에 시달리며 세상을 비관하는 순간이 오면, 부장님은 새벽에 건 내 전화를 받고는 그렇게 말했어. ‘화연아.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걸 계속 알려줄게.’ 애가 징징대는 게 얼마나 귀찮으셨을까. 그런데도 항상, 늘.”
백율 부장은 화연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화연은 백율 부장의 말이 증명되었음을 인정했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다.
“너의 불행을 알아. 그 깊은 불행을 넘어서라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아. 쉽지 않은 일이니까. 누구도 네게 네가 불행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요할 권리는 없어.”
“…….”
“내가 해냈으니까 너도 해내라고 말할 생각도 없어. 그것도 비인간적인 강요지. 너만의 고통과 슬픔, 분노, 충격…… 거기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럼에도, 화연은 하늘이 과거의 불행을 극복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여전히 불행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세상이 너에게 좀 더 친절하고 아늑한 곳이면 좋았을 텐데.”
“…….”
“너보다 세상에 먼저 태어나,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아늑한 곳으로 만들어두지 못했다는 미안함도 느껴.”
하지만 절대, 정말로 절대, 그렇다고 하여 하늘의 악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너는 너의 불행에 사로잡혀도 돼. 영원히 그 고통에 묶여 있어도 되고, 네가 고통스러워하고 싶은 시간만큼 내내 괴로워해도 돼.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너는, 너만 불행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해.”
“…….”
“네가 너의 불행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돼. 불행에 영원히 사로잡혀 있는 건, 대체 누구를 위한 거야? 너 자신?”
“…….”
“네가 불행했다는 게, 네가 아무나 불행하게 만들어도 되는 이유는 되지 못해.”
화연도 그녀 자신의 과거를 기억했다.
시설에서 끊임없이 외우던 그 구호, 문장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화연은 영원히 그 불행한 기억과 자기연민에 갇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네가 행사하는 폭력은 과거를 극복하는 방식도, 과거를 응징하는 방식도 될 수 없어.”
“네가 뭘 알아.”
“…….”
“너는 나보다 안락한 곳에 있었어!”
“…….”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화연이 있던 곳은 그녀에 비해 조금도 안락하지 않았다.
외부인의 눈에는 완벽히 발전소로만 보이는, 사람이란 게 지상을 나돌아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류하늘.”
“…….”
“그렇게 생각해서 편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 자유야.”
화연은 자신이 겪었던 불행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정했다.
“나도 내 불행이 극복할 만한 것이었기를 바라니까.”
화연은 스스로의 불행을 자랑하며 하늘의 주장을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피해자로만 평생을 살 생각은 없어. 그 기억을 안고서도 계속 불행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거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거야.”
“아냐. 너는 불행하지 않았어. 네 불행은 없었어. 너는 그런 곳에서 살지 않았어.”
“…….”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긴. 그리고 이런 불행을 겪은 게 너나 나, 오직 둘만의 문제도 아냐.”
화연은 병원에서 ‘쟤는 정말 머리 안이 다 꽃밭인가?’ 싶어서 친해지기 싫었던 옆 병실의 동갑내기 친구 하나를 떠올렸다.
고요련.
요련 역시도 다른 시설에서 구조되어 병원에 온 아이였다.
지잉.
때마침 가이딩 밴드에 요련에 관한 연락이 들어오기도 했다. 화연은 손목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화연아, 요련 가이드님 임무 완료]
[센터 첩자 전원 파악 끝]
[그레이에게 요련 가이드님의 정체가 알려지게 하려고 해]
[환성을 통해 빼낸 정보가 요련을 통해 누설된 거라고 생각하면]
[환성이 스파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을 거란 게]
[요련 가이드님 의견]
화연은 역시 고요련은 참 대단한 친구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뗐다.
“고요련이라고 있어. 걔도 만만치 않은 시간 동안 다른 시설에 갇혀 있었는데, 처음부터 별 트라우마를 안 겪은 것 같아. 여러 가지로 대단한 긍정왕이랄까.”
“…….”
“시설에서 나온 뒤에 각성해서 센터로 온 다음에야 제대로 친해지기는 했는데, 매사 밝고 긍정적인 태도가 나한테도 도움이 많이 됐어. 여전히 좋아하는 친구고.”
요련 역시 후천적으로 등급을 올리기도 했다. C급에서 A급 정도로. 비록 외부에는 C급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너도 알지? 만난 적도 있을 거고.”
화연은 하늘이 숨겨온 것을 안다는 태도로 말했다.
“……고요련?”
그 이름에 하늘이 묘하게 반응했다. 화연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며 웃었다.
하늘의 표정이 굳었다.
“대한민국 센터뿐 아니라 국제 센터 기구에 그레이가 박아 놓은 고위 관계자들이 있다는 거, 오래전에 윤 교수님이 파악했어. 그래서 스트레스에 매우 시달리셨지.”
그 첩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낼 방법을 고안해 내기 위해, 이창결 부장, 백율 부장과 윤희유 교수는 엄청난 계획을 짰다.
신입 C급 가이드를 다중 스파이로 활용하는 것.
그 계획을 위해 이창결 부장이 사실상 S급 에스퍼라는 걸 센터에 숨겨야 하기도 했다. 요련을 몰래 돕기 위해서.
“고요련은……!”
“너를 도운 적도 있는 스파이라고? 뭐, 넌 그렇게 생각하겠지.”
고요련. 하늘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 센터 내부의 정보를 알기 위해 이반과 함께 그녀에게 연락을 한 적도 있었다.
하늘은 그녀를 이창결의 측근이면서 오래전에 센터로부터 돌아선 스파이로만 알고 있었다.
그레이는 센터에서 스파이를 축출해내는 역할을 맡았다는 강화연마저도 요련만은 친구로서 신뢰하고 있으니 요련은 센터에서 절대 찾아낼 수 없을 스파이라고 했다.
“요련이는, 한 7중 스파이까지 해내는 연기 천재야. 실제로도 좀 맹하고 아방한 구석이 있기는 한데, 그런 점 때문에 사람들이 더 걔를 잘 믿지.”
화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 싫었다.
“너도 그러지 않았어? 요련이가 다중 스파이 짓을 할 인상은 아니잖아.”
“…….”
“어쨌거나 그 결과로, 요련이가 드디어 몇 년 만에 센터 내부 첩자 명단을 다 채웠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센터 전부.”
이제야 몇 년에 걸쳐서 해온 일이 끝났다.
“이제 센터 내에서 무슨 일이 이어나는지, 그레이 딘하우스가 파악해내기 정말로 어려워질 거야.”
수년에 걸친 요련의 가면극이 드디어 결실을 봤다.
“그럼, 나는 충분히 떠들었으니까 먼저 돌아갈게.”
화연이 하늘로부터 두어 걸음 멀어졌다.
“내 사람들이 있어서 내게는 너무나 행운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세계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 많았다.
더 이상 걱정시킬 수 없었다.
백율 부장 역시 그녀를 아주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잘 있어.”
화연은 하늘에게 아까 반쯤 말했던 주문을 완성했다.
“나는 신의 사도로서 선택받아 구원된다. 구원은 연쇄적으로 구원을 잇는다. 선택받지 못한 그대는 그대의 평범한 불행 속에 영구히 머물도록 하라.”
하늘은 어둠 안에 남았다.
검은 공간에, 완벽하게 홀로.
***
같은 시간, 영원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수레바퀴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건 수레바퀴 하나뿐이었다.
‘저거 대체 뭐지.’
‘왜 안 사라지고 계속 있는 거지?’
‘내 에스퍼님 그리워하라며 감정을 통해서까지 고통을 주는 건가?’
영원은 괜한 고민은 하지 않기로 하며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고통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아파서 죽겠네, 죽겠어.’
그래도 영원은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아르케미에 기대어 고통을 지우려고 하지 않던 과거처럼.
스스로 택한 일의 결과로 책임을 지는 것이니, 앞으로도 계속 고통스러운 상태를 쭉 견뎌내 가기로 했다.
여현이 보고 싶기는 했다. 다시 품에 안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건 간절히 바란다고 이루어질 일은 아니었다.
영원은 응답받지 못할 꿈이나 바람은 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