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08화 (108/142)

의총은 돔의 설계도에 관한 세부적인 설명도 이어갔다.

“교수님. 혹시 설명을 들으시다가 제가 아직 못 찾아낸 오류나 허점을 발견하신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네.”

“특히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하는 세 번째 방법은 확실하게 검증된 건 아니라서요. 그럼 일단 돔을 구성하는 기초부터 말씀드리자면…….”

의총은 설계도를 앞에 두고 S급 던전석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견고한 돔을 유지하는지, 어째서 돔의 벽을 가이드의 물리력이 부술 수 있을 것 같은지 등등에 관하여 자세히 논증했다.

이제껏 연구한 구체적인 사항을 모두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윤희유 교수는 중간중간에 의총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수첩을 꺼내 몇 가지 사항을 메모하기도 했으며, 책꽂이에 있던 논문을 꺼내와 나중에 확인해야겠다며 책갈피를 꽂아두기도 했다.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다음에야 의총의 설명이 끝났다.

“일단, 돔에 관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윤 교수는 새로 따라온 주스 한 잔을 의총에게 건넸다.

“고생하셨어요. 저도 당장 오류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못 찾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교수님께서도 당장은 가이드의 물리력으로 돔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네. 하지만…….”

윤희유 교수는 수첩을 슥슥 훑어보면서 말했다.

“몇 가지 이론은 좀 더 검토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대체 어느 부분을 파괴해야 돔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할지는 가이드님께서 더 연구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그러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해본 실험 결과도 전송해드릴게요.”

의총과 윤 교수는 테이블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테이블 주변은 찢긴 메모지, 간식을 먹은 흔적, 빈 커피 잔 등으로 어지러웠다.

“네. 그리고 일단은…… 영원, 화연 가이드님 모두 당장 저희를 도울 수는 없으니까, 센터의 다른 사람들은 계속 돔 및 주변 던전석의 좌표, 그레이의 위치를 찾아내는 일에 열중하도록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윤 교수는 혹시 모르니 세 번째 방법에 너무 열중하지는 말자는 취지로 말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전략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건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으니 일단 삼가자고.

의총 역시도 동의했다.

“네. 저도 일단은 괜히 가이드의 물리력으로 돔을 부술 수 있다는 얘기는 퍼뜨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희망에 모든 걸 걸고 눈앞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됐다.

“가이드님은 다시 사무실로 가시나요?”

“그래야겠죠?”

의총은 웃었다. 윤 교수 역시 웃었다. 당장 퇴근할 생각이 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현재 별관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퇴근 따위는 바라지 않고 일하고 있을 터였다.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윤 교수는 ‘야근 극혐’이라 중얼거리던 영원의 얼굴을 얼핏 떠올렸다.

그 말을 들을 때는 ‘공무원은 정시 퇴근이 원칙 아니냐’, ‘안 그러면 공무원 왜 하냐’며 항의하던 불평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 몰랐다.

“그리고 교수님.”

생각에 잠긴 윤 교수에게 의총이 설계도를 다시 말아 정리하며 말했다.

“두 번째 방법에 관해서도 말인데요.”

“……네.”

“어쩌면 김여현 에스퍼님이 그레이와 싸워 이겨서, 돔이 세상에 생겨나지 않게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사실 그것만 성공하면 돔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레이가 돔을 애초에 만들지 못하게 하거나, 그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었다.

또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해내기 어렵기는 하겠지만 두 번째 해결법도 먼저 포기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여현이 프론트 가이딩을 받을 수 없어 긴 시간 싸우지 못하는 건 약점이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하면 여현이 그레이에게 무력전 자체에서 뒤지는 건 아니니 싸워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레이의 하부조직들은 이미 여현이 상당 부분 무너뜨렸다.

최측근인 조지나 스피넬과 이반 하이제렌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목격되어 여현이 그 가까이까지 접근한 일도 있었다.

비록 너무나 빨리 관측범위를 벗어나서 여현이 그들을 붙잡지는 못했지만, 잘만 하면 그레이도 충분한 백업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네, 맞아요. 그레이에게 싸워 이길 가능성도 있죠.”

윤 교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건 김여현 에스퍼도 알고 있을 거예요. 자기가 그레이와의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걸. 그러니까 굳이 그걸 다시 알려 부담을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요.”

여현에게 성공에 대한 압박을 추가로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역삼 본부에서 누구보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고 있는 건 여현이었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총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어쨌든, 화연 가이드님이라도 하루빨리 돌아와 주면 좋겠네요.”

윤 교수는 의총에게 사무실 문을 열어준 뒤 간절함을 담은 말을 흘렸다.

의총은 사무실 밖으로 나선 뒤에 뒤돌아서서 윤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강화연 가이드님은 류하늘에게 지지 않을 거예요.”

화연은 의총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가이드였다. 그녀의 프론트 가이딩은 모든 가이드에게 교본과도 같았고, 그 외에도 그녀가 대단한 이유는 수없이 많았다.

의총은 노력형 각성자들이 산더미인 역삼 본부에서, 유독 심하게 미친 노력형으로 유명한 천재 강화연이 이런 식으로 끝을 맞이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며, 결국에는 반드시 살아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강화연이 아니라면, 이런 확신을 가능케 할 사람이 있기나 한가.

“맞아요.”

“그러니까, 저는 정말로 끝나기 전에는 끝이 왔다고 먼저 단념하지는 않을 겁니다.”

“네. 우리는 그렇게 바라고 있기로 해요. 꼭 두 사람 다 우리의 곁으로 올 거라고.”

영원과 화연. 두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를 생각하면, 두려움과 불안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도 같았다.

이 순간 윤 교수와 의총은, 영원이 돌아올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여현을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강하고, 이런 식으로 그들의 세계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니까.

***

화연과 하늘이 있는 검은 공간.

화연은 하늘을 수갑에 결박한 이후로 며칠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이 나갈 방법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화연.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하늘은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나갈 방법을 알려주는 것을 극구 거부했다.

화연은 점차 인내력을 잃어가면서도,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늘을 괴롭혀서 나갈 방법을 알아내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늘에게 음료와 식량을 조금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묶어두고 굶길 수는 없으니까.

하늘은 화연의 탈출에 조금도 협조해 주지 않으면서도 음료와 음식만은 받아먹었다.

그러다 보니 음료도 다 떨어졌고, 식량이랄 것도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하루 이틀이 한계였다.

“류하늘.”

하늘을 부르는 화연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에너지가 고갈된 터라 서 있기도 힘들어서 검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왜.”

하늘 역시 결박된 채로 힘겹게 답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앉아 있는 화연보다 바닥에 누워 있는 하늘이 더 생사의 기로에 가까이 다가선 것 같기도 했다.

“너도 이런 상태인데 밖에서는 누구도 너를 구하러 들어오지 않고 있잖아.”

“…….”

“센터 사람들이야 나를 구하러 들어올 방법을 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는 네 편인 사람들이 너를 이런 취급 하게 그냥 두는 거야?”

“…….”

“그 사람들은 네가 굶어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가?”

화연이 보기에, 하늘의 현 상태가 밖에 전해졌다면, 하늘을 아끼는 누구라도 하늘을 구하러 이곳에 들어왔을 것만 같았다.

또한, 하늘의 상태가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이곳에 둘만 갇혀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하늘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들어오는 게 맞았다.

그런데 누구도 하늘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화연은 그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하여 물었다.

“구하러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인가?”

“…….”

“아니면 그냥 너를 나한테 내던진 거야? 네 힘을 증명하지 못하면 너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누가 봐도 그레이는 하늘을 소모품 취급하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는 화연마저 어이없을 정도로.

그런데도 그레이를 향한 하늘의 추종은 맹목적이었다.

“……그레이는.”

“그레이는?”

“나를 믿기 때문에 나를 기다리는 거야.”

화연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류하늘보다는 강화연이 먼저 수분 고갈로 죽을 거라고 믿고 있다는 건가? 하.”

“아니야.”

하늘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레이는 나를 존중해. 여긴 그레이가 내가 설계할 수 있게 허락해 준 공간이란 말이야.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서.”

“그래?”

“내가 정한 ‘암호’로만 출입할 수 있으니 내가 언제라도 그 암호를 말하고 나가면 된다는 걸 그레이는 아는 거지.”

화연으로서는 더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암호만 말하면 나간다고? 그런데 왜 안 나가?”

“너를 가이드의 물리력으로 이기고 나가야 하니까!”

하늘의 목소리는 미약했으나, 그에는 강력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화연은 그 분노에 반응하기보다는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방금 하늘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런데, 암호라고?”

“내가 있던 시설의 구호야!”

하늘은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차 악을 썼다.

하늘이 며칠 동안 몽롱한 표정으로 자주 그녀가 있었던 시설에 관해 말했기에, 화연은 하늘이 말하는 ‘시설’이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 구호를 소리 내어 말하면 여기에서 나갈 수 있어.”

그제야 화연은 이 괴이한 공간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게 됐다.

‘암호’라는 어떤 문장을 말하면 바로 여기에서 나갈 수 있다고.

그리고 아마 하늘이 먼저 그 문장을 말하고 나가면 화연 역시 그 문장을 따라 말하고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늘은 특별히 탈출에도 집착하지 않고, 허기에 괴로워하면서도 홀로 여기서 먼저 나갈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화연의 의식이 살아있을 때 암호를 말해버리면 화연도 따라 나갈 수 있는 문제가 있으니.

그리고 그 원리를 이해한 화연은 순식간에 기분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혹시라도 나갈 수 없으면 어쩌지, 약간은 걱정하고 있었는데.’

걱정이 전부 증발했다.

특히, 하늘이 굳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이곳의 암호가 무엇일지 바로 알 것 같았기 때문에 더욱.

“그 구호를 말하면 바로 나갈 수 있다는 거지?”

화연은 재차 확인만 했다.

“맞아. 시설에서 그 종교에 미친 자식들이 내게 주입한 문구. 구원과 불행에 관한 말. 너는 절대로 모르겠지만.”

“…….”

“네가 먼저 의식을 잃으면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물리력을 짜내서 널 죽이고 나갈 거야. 그로써 나는 그레이에게 내 힘을 증명하는 거지.”

화연은 대답하지 않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하늘에게 다가갔다.

그다음엔 고개를 숙여 하늘의 귓가에, 한 문장의 앞부분을 속삭였다.

하늘의 눈이 커졌다.

화연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

“너…… 어떻게?”

하늘은 화연이 그 문장, ‘암호’를 알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외부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구호였다. 짧고 흔한 구절도 아니었다.

하늘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화연은 다시 허리를 펴며 살짝 웃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