촤락.
의총이 출력해온 설계도를 펼쳤다. 커다란 종이가 사무실 중앙 테이블을 거의 덮었다.
“그레이가 소환할 돔의 형태를 추측하여 그려본 겁니다.”
윤희유 교수는 복잡한 설계도를 대강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의총의 설명 없이는 이 복잡한 그림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저한테는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의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설계도의 중심에 있는 원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 원이 게이트로부터 안전한 돔의 외벽입니다. 그레이의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이죠.”
손끝이 옆으로 이동하다가 멈추었다. 가로 방향으로 길쭉한 타원이 중앙의 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 타원은 괴수의 접근을 차단하는 완충지대입니다.”
게이트가 돔 내에 발생하지 않더라도, 게이트에서 나온 괴수들은 돔에 접근할 수 있었다. 완충지대는 그런 상황을 대비하는 데 필요했다.
“괴수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요?”
“던전석만 충분하면, 이론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윤 교수는 뿔테안경을 매만지며 의총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이 돔은 완성되기만 하면, 그 주인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력으로는 붕괴가 안 되나요?”
“네. 에스퍼의 힘으로 아무리 벽을 때려봤자 어떠한 균열도 생겨나지 않을 겁니다. 경우에 따라 공격을 튕겨내기라도 하면 바깥에만 재앙이 펼쳐지겠죠.”
“그렇다면…….”
“네.”
“어떻게 부술 수 있죠?”
이제 본론이었다.
의총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술을 다시 뗐다.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세 가지나요?”
윤 교수가 설계도에서 눈을 떼고 의총을 바라보았다. 해결방안의 수가 그녀가 짐작한 것보다 많았다.
“네. 우선 첫째로는…….”
톡톡.
의총은 설계도 외곽을 따라 여러 곳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특히 여기, 여기, 여기랑 여기…….”
톡톡. 톡톡. 톡. 톡.
윤 교수의 시선도 손끝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이곳의 던전석들을 모두 흐트러뜨리면 돔이 사라집니다. 천장을 받치는 기둥이 사라지면 건물이 무너져내리듯이요.”
첫 번째 방법은 돔을 부수는 정공법이었다.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돔이 무너져내릴 것은 확실했다.
“한 번에 모든 던전석을 다 흐트러뜨려야 하나요?”
“절반 이상은 그렇게 하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둥이 몇 개 사라지는 정도로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래서 이 방법이 어렵습니다. 명확한 특징도 없는 던전석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가 매우 어려울 테니까요.”
엄청난 약점이지만, 그 약점을 발견해내기 힘든 게 문제였다. 또한, 그레이도 이 약점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던전석들의 좌표를 계산해 낼지도 모르는 의총을 죽이려 했을 터였다.
“돔을 빨리 소환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사용하는 던전석 양을 줄이고, 제가 던전석의 위치를 계산하지도 못하도록 설계를 변경하느라 그럴 겁니다.”
미미한 차이라고 해도 설계변경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결국에는 의총으로서도 추측할 수 없는 곳에 상당한 양의 던전석들이 배치될 수도 있었다.
‘분명 설계를 계속 바꾸는 중인 거야. 훔쳐간 초기 형태 그대로 돔을 만들어내려고 했다면 이미 이 세상에 돔이 만들어졌겠지.’
그레이의 편으로 돌아선 연구원들이 의총도 생각하지 못한 발견을 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다른 두 방법은요?”
윤 교수는 남은 방법들 역시 이만큼 어려울지 걱정하며 물었다.
“두 번째는, 이 돔의 주인이 될 그레이 딘하우스를 없애는 겁니다.”
“…….”
첫 번째 방법보다도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의총도 그 이상 부연하지 않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세 번째는, 일단 희망적인 가설인데…… 교수님께서도 제 가설에 동의하실지 궁금합니다.”
“말씀해주세요.”
“네. 그게…….”
의총은 이미 작은 실험을 몇 번 해보았다. 그를 통해 가설을 다소나마 증명했다는 생각이 들자 희망이 생겨났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 가설은 희망이 아니라 희망 고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돔의 외벽은 주인인 그레이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생성 과정에서 에스퍼의 그릇 같은 성질도 일부 띠게 됩니다.”
“네.”
“그래서 에스퍼의 공격으로는 절대 부술 수 없지만…….”
“…….”
“하지만, 에스퍼의 그릇에 손상을 가하는 힘이 있지 않습니까.”
“…….”
윤희유 교수는 그 힘이 무엇인지 바로 떠올렸다.
S급 가이드의 물리력.
그리고 세계 랭킹 1위가 제작한 돔을 부수려면, 그냥 평범한 S급 가이드의 물리력 이상의 힘이 필요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심영원의 힘.
영원이 그녀의 힘이 필요할 때까지 깨어나지 못한다면, 적어도 화연의 힘.
“다만, 이 가설에 교수님께서 동의하신다고 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요.”
“…….”
윤희유 교수는 사실 의총의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되었다. 해결이 필요한 문제야 뻔하니까.
돔을 부수는 수준의 힘을 사용할 S급 가이드가 여기에 없다는 것.
“그 문제는 화연 가이드님이 돌아오시거나, 영원 가이드님이 잠에서 깨어나신다면 해결…….”
윤희유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박의총 가이드님.”
“네.”
“우리도 김여현 에스퍼처럼……. 그렇게 현실성 없이 굴면 안 돼요.”
“…….”
“이게 정말 우리가 기댈 수 있을 만한 희망일까요?”
윤희유 교수는 그녀가 과거에 잃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요즘 부쩍 과거의 끔찍했던 순간들에 대한 생각이 늘었다. 완전히 극복한 줄 알았던 상처들이 다시 고통을 안겼다.
그녀를 괴롭히는 기억 중에는 여현의 부모님의 죽음도 있었다.
여현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젊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영원이나 화연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이 젊고 어린 사람들의 어깨에, 나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얹어주고 있었던 거지?’
윤희유 교수는 과도했던 자신의 낙관을 후회했다. 불면이 매일 밤 찾아왔다.
세상을 구한 이들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신은 그들이 지켜낸 세상에 안전하게 남았다.
자신은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러나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그들이 희생을 감수하고서 그녀를 지켜주는 것이 당연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윤희유 교수는 영원이 빠져 있는 잠 때문에 여현만큼이나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었다.
화연에 대한 부채감 역시 상당했다.
화연이 돌아올 가능성은 처음엔 영원에 비해선 상당히 높아 보였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단언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살아 돌아올 수도 있다는 의총의 말은, 지금 윤 교수가 떠안고 있는 엄청난 괴로움을 자극했다.
“교수님.”
“……하아.”
윤 교수는 안경을 벗고 얼굴을 가렸다.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었다. 그마저도 사치 같았다.
“교수님.”
괴로움에 갇혀 있는 윤 교수를 의총이 다시 불렀다.
“네…….”
“교수님께서 심영원 가이드님은 해내실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김여현 에스퍼님과 함께 세상을 구할 거라고.”
윤 교수는 자신이 그렇게 단언하고는 영원에게 의심 없이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것은 아닌지 후회했다.
동시에,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그녀의 희생 말고는 SSSSS급 게이트를 없앨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또 괴로워했다.
미안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격변 앞에서 이기적으로 굴고 있는 것은 그레이 딘하우스만이 아닌 것도 같았다.
“교수님. 이 시점에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
“말씀드리자면, 저도 믿게 되었어요. 끝날 때까지는, 사실 정말 끝난 게 아니라고요.”
의총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누구도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잖아요.”
허무맹랑하기는 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그렇지 않나.
세상을 포기하고 마음을 접는 게 더 나은 선택처럼 보이던 순간이 과거에도 많았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던 덕에 여기까지 왔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의총 자신은 세계의 멸망을 본 적도 있지 않았던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서도 놓지 않았던 희망의 끈을, 죽지도 않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죽었다며 놓아버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의총은 최근 며칠, 영원의 잠에 대한 여현의 반응을 보면서, 이상하기는 해도 여전히 희망을 품는 게 더 자신다운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여현 에스퍼의 생각은 제정신 아닌 믿음으로 보여.’
‘하지만 과거에 우리라고, 합리적으로 계산한 믿음만 가졌던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김여현과 심영원이 그레이 딘하우스로부터 세상을 구해내고 말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여기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더 잘해나갈 수 있다고.
“교수님. 아직 무엇도 끝나지 않았어요. 누구도 잃지 않았어요. 모두를 지키고 세상을 구하는 건 당연히 가능해요.”
“…….”
“…….”
“그래요.”
윤희유 교수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안경을 썼다.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가능해요. 제 아이는, 여현이는 당연히 평화로운 세계에 살 수 있어요.’
‘…….’
‘여현이는 여현이가 사랑하는 상대와 행복하게 살게 될 거예요. 저는 그런 미래가 오리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요. 저처럼 생각하시죠?’
‘……네.’
여현의 어머니는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도 웃으면서 여현이 살아갈 미래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 말했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다.
윤희유 자신도 그 희망에 설득되어 여태까지 버텨왔다.
“가이드님, 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해요.”
그의 말이 옳았다. 사실 영원도, 화연도 아직 살아있다. 모두 아직 숨 쉬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먼저 포기해버릴 수는 없다.
아직 잃은 것이 없는데, 모든 걸 잃었다는 그레이 딘하우스의 주장에 굴복할 수도 없다.
윤희유 교수는 진심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다시 찾아온 절망 앞에서도, 과거처럼 희망을 말하며 그녀를 또 한 번 일으켜 세워주는 동료가 곁에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