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여현은 그레이를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비며 게이트 웨이브를 효율적으로 처리했고, 그레이는 돔의 소환이 먼저라며 공개된 장소엔 나타나지 않았다.
왜 숨어 있느냐며 그레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영상 업로드만은 이어갔다.
그레이의 영상에는 그의 세력이 여현에게 격파당하는 모습이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레이 측의 SNS, 채널 등을 통해서만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각성자우월주의자들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그레이가 가장 최근에 올린 영상은 비밀리에 입수한 센터의 내부 보고서에 관한 것이었다.
―K의 전담 가이드인 포에버에 대한 내용인데…….
그가 클립으로 묶인 종이 더미를 흔들었다.
―한국어로 작성되었으니 번역해서 알려드리죠.
―요약하자면, 한국 센터 의료진들이 ‘포에버가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사실상, 사망.
그레이는 또박또박 보고서의 내용을 읽어주었다.
―‘산소호흡기 없이 호흡은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그게 전부다.’
―‘특정 뇌간반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뇌 일부는 기능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뇌파가 잠시 완전히 정지하면서,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기형적인 형태를 보이는 등, 뇌에 회복할 수 없는 영구손상이 가해졌다는 징후가 다수 관찰된다.’
그레이는 웃으며 보고서를 들고 흔들었다.
―소소하게 내 건물만 부수고 다닌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죠. 그건 사실 다이너마이트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이제 K는 프론트 가이딩을 영원히 받을 일이 없다는 거 다들 알겠죠?
그레이는 여현을 향해서도 비웃는 말을 남겼다.
―K. 나랑 장시간 붙어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거잖아.
―근데, 나랑 만나면 그런 전투를 피할 수 있겠어? 죽을 싸움이 하고 싶어?
―아무튼, 여기저기 생겨나는 게이트들 다 정리하고 다니느라 고생이 참 많아.
―언젠가 보자. 네가 죽을 날에.
그레이가 짚어낸 여현의 약점은 사실이었다.
여현은 영원이 잠든 채로는 프론트 가이딩을 받을 수 없었다.
“딘하우스. 자신 있으면.”
그러나 여현은 개의치 않았다.
“입만 나불대지 말고 나와.”
그게 여현의 답이었다.
***
안 좋은 수치들에도 불구하고 여현은 여전히 영원이 깨어날 거라 믿는 듯했다.
영원이 마지막 안녕을 고하고 SSSSS급 게이트에 뛰어들던 순간을 기억하는데도 그랬다.
그녀가 삶이 그곳에서 다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순간.
‘내가 너의 유일한 영원이었어.’
그 순간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내게 너보다 특별했던 사람은 없어.’
‘…….’
‘내 모든 시간을 통틀어, 사람도, 무엇도 없어.’
그렇지만 여현은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도 영원이 그를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 숨 쉬고 있다.
곁에 있으면 약하지만 분명한 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니 깨어날 것이다.
다시 나를 안아줄 것이다.
여현에게 영원이 깨어나리란 믿음은 종교적인 신념처럼 변했다.
이제는 영원을 바라볼 때 약간의 안정을 느끼는 듯도 했다.
기다리면 일어날 테니까.
여현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자신과의 영원을 약속했던 그녀가 자신을 두고 떠나갈 리 없으니.
그래서인지 최근 종종 별관에 들르는 여현은 얼마 전에 비하면 꽤 평정을 찾은 것처럼도 보였다.
짧은 보고를 위해 가끔 여현과 마주치는 각성자들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속닥거렸다.
“김여현 가이드님 좀 괜찮아지신 것 같지 않아요?”
“확연히 드러나던 살기는 좀 사라지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레이가 그렇게 광역 어그로를 매일같이 끄는데도…….”
“그나마 다행이에요. 시간이 다소라도 흘렀으니 전담 가이드님에 대한 마음을 좀 추스르셨을까요.”
그런데 그는 멀리서 여현을 지켜보는 자들의 평가일 뿐이었다.
여현과 가까운 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상태가 더욱 불안정해졌다고 느꼈다.
그들은 특히 여현이 영원에 대해 말할 때 엄청난 위화감과 함께 그런 기분을 느꼈다.
방금도 이창결 부장은 여현과 대화하며 표정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
“부장님. 딘하우스가 가져간 S급 던전석 관련해서요.”
“어, 그거 관련해서 무슨 일?”
“가이드님이 도둑맞아 속상해하시니까, 빨리 찾아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
“아직도 제가 못 찾아 둔 걸 아시게 되면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어…… 뭐…….”
“그레이가 있는 곳에 보관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그레이가 있을 만한 후보지들과는 별도로, 던전석이 보관되어 있을 것처럼 보이는 곳들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
“부장님 부원들이 지금 그 업무 담당하고 있는 걸로 들었는데요.”
“……맞아. 찾아서 전달해줄게.”
이창결 부장은 여현에게 ‘미래에 심영원 가이드님이 S급 던전석을 아직도 못 찾았다고 싫어하실 일이 올까?’라고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부원들에게 연락해 S급 던전석이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위치 후보를 몇 군데 전달해달라고만 했다.
그다음엔 별다른 부연 없이 그 목록을 여현에게 보내기만 했다.
비슷한 상황을 계속 겪는 건 이창결 부장만이 아니었다.
의총 역시도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었다. S급 던전석 추가 확보를 위해 용기 내 여현의 사무실을 찾아간 방금도 그랬다.
“에스퍼님, 혹시 영원 가이드님의 S급 던전석…… 센터 측에서 추가 매입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요.”
오색문어의 던전에서 얻은 미니 문어는 여현이 보관 중이었다. 그러니 여현에게 동의를 구하여 매입해야 한다 판단하고 여현에게로 온 것이었다.
전담 에스퍼와 전담 가이드는 배우자 관계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그로 인해 양방으로 재산 상속이 인정되기도 하니, 법률적으로도 그게 맞는 거라고 판단했다.
“글쎄요. 가이드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네?”
의총은 여현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답변을 할 줄은 몰랐다.
“가이드님 거잖아요. 제가 가진 게 아니라.”
“아…… 네, 그렇긴 하죠.”
“제가 임의로 처분하면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여현은 차분하고 진지하게 답했다.
영원이 여현에게 불만을 표시할까 정말로 걱정된다는 듯이.
그 일이 바로 내일쯤 일어나리라 믿는 것처럼.
의총도 그런 여현 앞에서 ‘영원 가이드님이 나중에 불만을 표할 일은 없을 것 같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네. 그럼 뭐, 나중에 가이드님 의견이 바뀔 수도 있는 걸 고려해서 가능한 한 고가에 매입하고 차후에 재협상을 한다는 조건을 넣는 쪽으로…….”
의총은 횡설수설 답했다.
그리고는 영원이 깨어날 것을 전제한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해서 여현을 다시 찾아갔다.
여현은 영원이 깨어나면 계약 조건을 다시 협상할 수 있다는 조건을 꼼꼼하게 확인한 뒤 계약서에 서명하고 던전석 300만 개를 의총에게 추가로 인도했다.
여현 가까이의 모두가 말을 조심했다.
혹시라도 잘못 발을 헛디뎌 여현의 머릿속에 있는 얇은 얼음을 깨버릴까 봐.
여현이 영원의 곁만을 지키며 다시는 펜트하우스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리면 큰일이었다.
영원을 완벽하게 잃었다는 생각에 난동을 부리다가 폭주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로 끝장이었다.
그때엔 세계 종말을 위해 그레이의 돔 같은 걸 기다릴 필요도 없을 터였다.
어떤 면에서는 김여현이 그레이만큼이나 위험했다.
모두가 이게 건강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현의 장단에 맞추어 주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가 그래도 사무실에 출근해 일이라도 하려고 하니 그게 어디냐고 합리화하면서.
또한, 그들 역시도 영원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영원의 상태에 대한 언급을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규칙이 암묵적으로 생겨났다.
굳이 말을 꺼내야 한다면 영원의 ‘잠’이라는 표현을 썼다.
‘영원이 잠들어 있으니 그건 안 되겠다’는 식으로.
여현에게 현실을 직시시키고 그들 역시도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저 멀리 미루어졌다.
게다가 센터의 현안은 여현과 영원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공간에 하늘과 함께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화연도 문제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화연은 인이어를 사용할 수 없는 듯했고, 가이딩 밴드로도 자세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류하늘과 문제가 있어요]
[약간 더 걸릴 것 같네요]
[그래도 반드시 나가겠습니다]
바깥의 동료들은 화연이 처음 백율 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는 큰 걱정을 덜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타 없이 완성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정도면, 안전한 상태일 테니까.
그런데 시간이 계속 흘러도 화연이 나오지 않았다.
화연이 있는 곳은 물과 식량이 없는 공간임이 분명했다.
이제 수분 공급이 부족해 생명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는 시점이었다.
[괜찮니]
백율 부장은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내 화연의 상태를 확인했다.
[네]
답은 종종 돌아왔다.
그러나 언제 나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나갈게요. 반드시]
반드시 나가겠다는 말은, 당장은 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로만 읽힐 뿐이었다.
어쨌든 영원에 비해서야 가능성이 커 보이기는 했지만, 갈수록 그마저도 헛된 희망은 아닌지 경계해야 했다.
백율은 자신도 혹시 여현처럼 과도한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리하여 여현의 계속되는 승전보에도 불구하고 센터의 분위기는 내내 여러 가지로 어수선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모두가 지친 상태에서 희망을 얻을 계기가.
똑똑.
“윤 교수님. 박의총 가이드입니다.”
“네.”
“돔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널리 알리기 전에, 혹시 논리에 허점이 있을까 하여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기도 하고요.”
“들어와 앉아요.”
의총은 자신의 성과가 전환의 계기가 되길 바라며 윤희유 교수의 교수실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