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SS급 게이트는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그레이 딘하우스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 딘하우스에게는 아직 엄청난 양의 S급 던전석이 있고, 무력 또한 엄청납니다. 이제 사실상 그 힘에 대적할 자는 김여현 에스퍼뿐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막사 등등이 정리되는 와중, 윤희유 교수는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공직자들과의 화상 회의에서 지금은 절대로 안심할 때가 아님을 수차례 강조했다.
“곳곳에서 딘하우스에 동조하고 있는 세력 전부를 우리는 아직 정확하게 파악도 못 했습니다.”
―…….
“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은, 미꾸라지 같은 딘하우스와 그 일당을 잡는 작업은 이어져야 합니다.”
윤 교수는 이 회의를 참관하고 있는 이들 중에도 아직 가려내지 못한 그레이의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큰 시련이 하나 지나갔다고 안심하기는 매우 이릅니다.”
―그럼, 이제는 무엇에 열중해야 할까요.
대통령이 물었다. 윤 교수는 침을 삼킨 뒤에 답했다.
“끔찍한 돔의 탄생을 막고, 딘하우스까지 없애기 위해서는…… 일단 돔을 막아낼 방법을 알아내고, 그레이 딘하우스가 숨은 위치도 찾아내야 합니다.”
말로는 뭐든 쉬웠다. 실행은 쉽지 않겠지만.
회의는 계속 비슷한 주제를 맴돌다가 끝났다.
삑.
화면이 어두워졌다.
“하아.”
윤 교수는 이마를 짚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SSSSS급 게이트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었던 건 한순간뿐이었다.
그다음엔 다시 금방 심각한 상태가 됐다.
답을 찾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레이 딘하우스는 어디로 또 사라졌는가. 왜 그렇게 빨리 도망쳐야만 했는가.
외부에 강력한 게이트가 열리게 만드는 대신 내부만 안전한, 정신 나간 목적의 돔이 소환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김여현 에스퍼는 감정을 수습한 뒤 침착하게 그레이 딘하우스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언젠가, 심영원 가이드는 깨어날까.
영원과 여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마음이 무겁다고 하여 현실을 회피하고 숨어버릴 수는 없었다.
“이창결 부장님, 윤희유 교수입니다.”
―네.
윤 교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금방 서울로 돌아온 이창결 부장에게 연락해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확인했다.
“영원 가이드님 서울 돌아와서, 교수님들 진단은 받았나요?”
―네. 모두 의식을 회복하기 어려울 거라는 의견입니다.
“…….”
윤 교수는 자신도 기분이 이런데, 김여현 에스퍼는 대체 어떤 기분일지 짐작해낼 수가 없었다.
―현이는, 별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껏 모두가 최선을 다해 잘해온 것 같은데, 특히 영원과 여현은 믿을 수 없는 성과를 내온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을 맞게 된 것이 갑갑했다.
―저희는, 일단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나가도록 하죠. 영원 가이드님이 깨어나시길 바라면서요.
이창결 부장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네. 그런데, 김여현 에스퍼님은 마음을 잘 추스르셔야 할 텐데요. 아니면…….”
윤 교수는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는 현실이 미치도록 안타까웠다.
“그레이의 다음 공격이 들어올 때 상황이 다시 매우 끔찍해질 테니까요.”
―네. 저도 그렇게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여현에게 슬퍼하지 말고 바로 그레이를 찾는 데 열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에스퍼가 그의 유일한 가이드를 눈앞에서 잃은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그의 절망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네…….”
윤 교수 역시 그런 상황을 조금도 모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혹시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바로 말씀해주세요.”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통화가 끝나자 다시 한숨이 나왔다.
“하아.”
‘망할 그레이 딘하우스.’
윤 교수는 이를 악물었다.
***
[그레이VS센터… 센터 2연승, 완승]
센터 내부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은 것과 무관하게, 위 보도에 동의하지 않는 일반 대중은 흔치 않았다.
절대다수는 베이징,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연이은 싸움은 모두 센터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판단했다.
그레이 측의 에스퍼들이 영구히 힘을 잃었고, SSSSS급 게이트는 사라졌으니.
게다가 그레이는 다시 종적을 감추었고, 각성자우월주의자들 중에서도 그레이를 불신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더욱 그랬다.
―왜 희생은 우리만 하는 거죠?
―그야, 그레이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희생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는 우리에게도 우월의식을 느끼고 있어요.
―아니, 대체 이 상황에 그레이는 어디에 피신해 있는 겁니까?
각성자우월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레이를 숭배하는 건 멈추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반대편에서는, 센터가 다시 평화를 찾아줄 게 분명하다는 희망도 번져갔다.
그러나 국지전이 끝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늘 자 각성자우월주의 관련 사망 54,302명]
사건 사고는 지구 전역에서 끊임없이 벌어졌다.
유럽의 자잘한 소요 사태는 조금도 멎지 않았고, 다른 대륙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의 사망자 수는 통계에도 제대로 잡히지 못했다.
센터 멤버들을 투입하여 방어 전선을 구축하기에는, 자잘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비선별자들 중에서도 그레이의 반대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
그들은 혼란 속에서도 다시 찾아올 평화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제까지도 익숙했던 이웃과 마을이 순식간에 적과 낯선 전쟁터로 변모했더라도, 우리는 다시 안전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영원 가이드님은 살아날 거예요.
―우리도,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테니까.
그들은 뉴스를 통해 전해진, SSSSS급 게이트를 없앴다는 영원의 능력에 더 큰 희망을 얻었다.
그리고는 그녀와 김여현을 믿는다고 소리쳤다.
그레이 딘하우스에 반대하는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그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잠들어 있는 영원도,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은 여현도 그 목소리를 듣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
여현은 고요히 있었다.
영원이 깨어나기를 가만히 기다리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오랜 정적 뒤, 그는 영원을 안고 몸을 움직여 서울로 돌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식은 사고 현장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가 온종일 하는 일은 침대에 누운 영원의 곁에 앉아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각성자 전문 의사들 몇몇이 ‘심영원 가이드님은 아마도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을 것’이라 진단을 내렸지만, 여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런 미약한 생명 활동으로 기기의 도움 없이 살아 계시다는 걸 사실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발호흡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동공반사, 혈압 등을 고려할 때 식물인간 상태보다는 뇌사 상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측정된 모든 수치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워진 그녀의 상태를 드러냈다.
어떤 수치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래도 여현은 기다렸다.
영원이 오랜 시간 잠들어 있을 수는 있겠다는 사실만은 받아들이고서.
언젠가 깨어날 것이다.
여현은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내린 ‘당장 3초 뒤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판단에 동조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잠들어 있는 것뿐이야.’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거야 어렵지 않아.’
여현은 믿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주기적으로 숨이 막혔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서 더욱 영원의 곁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멀어질 수가 없었다.
‘변할 건 없어.’
영원은 그렇게 말했다.
여현은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을 돌이켰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여현에게는, 영원으로 인해 세상 모든 것이 변했다.
영원이 나타나 그의 세상이 뒤집혔고, 영원이 깊은 잠에 빠지면서 다시 그를 둘러싼 세계가 전부 변했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고, 그녀가 오기 전에 어떻게 자신이 삶을 견뎌내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현은 영원의 숨소리만 집중해서 들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미약한 호흡은 멎지 않았다.
하루.
또 하루.
그레이 딘하우스가 종적을 감추고, 세계가 혼란에 빠진 며칠.
여현은 회복된 식도로 어떤 음식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창결 부장이 다가와 팔에 놓은 수액을 거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대로 동상처럼 머물렀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영원의 상태는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사락.
여현은 용기 내어 조심스레 영원의 손을 잡아보았다. 체온이 찼다. 생명을 지닌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여현의 손끝이 떨렸다.
‘일어나요.’
속으로 애원했다.
그리고 영원히 기다릴 것을 약속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사흘이 지나갔다.
엄청난 시간 동안 기다림뿐인 고독 속에 있었던 것 같은데, 겨우 일주일의 절반쯤 온 게 다라는 사실이 끔찍했다.
여현은 고통 속에서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체 무엇을 해야 하지.
여현은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하루가 더 흘렀을 때, 여현은 이 자리에 영원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녀가 바라던 것은 이게 아니다.
여현의 차게 식은 눈이 바깥으로 향했다.
그레이 딘하우스.
그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잔인함을 품은 눈이, 그의 유일한 가이드를 다치게 한 상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