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검은 공간.
“하아, 하아.”
화연과 하늘이 각자 서로의 공격에 당한 채로 멀찍이 떨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은 화연의 공격에 오른쪽 다리를 가격당했고, 화연은 하늘의 공격을 피하려다 넘어지며 인이어를 잃었다.
정확하게는, 인이어를 하늘에게 빼앗겼다. 하늘은 보란 듯이 화연의 인이어를 자신의 귀에 넣었다.
타닥.
화연이 인상을 쓰며 다시 하늘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화연은 의도적으로 트랩에 옷깃을 스치게 했다.
팡!
트랩이 곧장 반응했다.
“윽.”
폭발은 화연이 아니라 하늘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화연은 싸움 과정에서 트랩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비겁하게 꼼수를…….”
팡!
화연은 하늘의 말에 반응하지 않으며 재차 비슷한 공격을 했다.
“읏!”
다음 공격은 더 큰 타격을 미쳤다.
팡!
하늘이 왼팔에 가해진 충격에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으, 하아.”
그래도 아직 화연이 승기를 잡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싸움 경험이 월등하고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에 더 노련한 건 화연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타고난 체격이 더 우수했고, 하늘이 이 검은 공간에 대해 가진 정보가 월등한 게 문제였다.
직접 몸으로 다투어야 하는 싸움에선 체급 차이가 중요하고, 낯선 공간에서는 정보력이 엄청난 힘이 되니까.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해 우위를 점할 수도 있었지만, 이 검은 공간은 무엇 때문인지 중간중간에 가이드의 물리력을 방해하는 파장 같은 것이 몰려왔다.
그 빈도와 강도를 처음부터 알고 있던 하늘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당해주기만 할 화연이 아니었다.
퍼벅.
다시 화연의 직접적인 공격이 들어갔다.
“읍.”
쿵.
팡!
몸이 가까이 붙어 난투극이 잠시 일어났다.
그 싸움은 하늘이 뱉은 문장 하나로 잠시 중단되었다.
“K의 가이드, 죽었대.”
“……뭐?”
퍽.
빈틈을 보이자 바로 공격이 가해졌다. 화연은 어깨를 가격당했다.
“윽!”
이번엔 화연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하하. 하늘이 소리 내어 웃었다.
“백율 부장 말에 따르면.”
하늘은 자신의 귀에 든 화연의 인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금술로 게이트를 없애면서 그 대가로 목숨을 바친 것 같은데?”
“…….”
“포에버 때문에 SSSSS급 게이트도 박살 난 것 같기는 하지만, 게이트를 여는 시도야 던전석만 있으면 나중에 또 할 수 있으니, 이쪽이 이긴 싸움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하늘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화연은 이를 악물었다.
“아……. 정확하게는, ‘당장은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 K도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는데?”
“…….”
“어쨌든,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거잖아.”
화연은 다시 침착한 표정이 되었다.
팡!
그리고는 다시 하늘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늘로서는 예기치 못한 기습이었다.
“윽.”
갑자기 화연의 얼굴에서 절망이 다 떠나간 듯했다.
“방금 말한 거, 진짜야.”
“알아.”
챙!
스릉.
갑자기 둘 사이로 파동이 개입했다.
화연은 이 순간엔 공격을 멈추고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늘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둘 사이의 간격이 벌어졌다.
“죽었다니까?”
“들었어.”
하늘이 짜증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동요가 없어? 죽었다고 했잖아. 아니, 죽어서 좋은 거야? 다들 포에버가 주인공인 것처럼 굴고 있었는데 이제 네가 센터에서 가장 대접받는 메인 가이드의 자리를 차지할 테니까?”
“…….”
화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류하늘.”
“왜.”
“죽은 것처럼 보여도, 생명만 붙어 있다면 가이드님은 반드시 깨어나.”
“…….”
“그러니까 우린 아직 가이드님을 잃은 게 아냐.”
둘 사이에 개입했던 파동이 지나갔다.
팡!
화연은 다시 공격했다.
하늘에게서 인이어를 다시 빼앗아 바깥의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고, 시간 여유가 다하기 전에 여기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갈 필요도 있었다.
화연이 원하는 바를 알아챈 하늘은 인이어를 빼내 트랩으로 던졌다.
팡!
후두둑.
인이어가 망가졌다. 그리고 기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퍽.
화연이 하늘의 뒤로 접근해 하늘의 목 뒤편, 급소를 가격했다.
“욱!”
하늘이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곧장 화연이 하늘의 손목을 포박했다.
그리고는 정복에 보관하던 수갑을 손목에 채웠다.
철컹.
순식간이었다.
불필요한 행동으로 빈틈을 드러낸 게 문제였다.
“ㅇ…….”
하늘은 멍한 표정을 했다.
화연은 몇 달 전 요련과 별관 복도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돌이켰다.
동갑내기 친구라, 사석에서는 말을 놓고 잡담을 하고는 했다.
‘내가 개발한 기기로 새로 도착한 비선별 가이드님 테스트를 해봤거든.’
‘매칭률 기기?’
‘응. 근데 기기가 고장 났는지, 김여현 에스퍼님이랑 매칭률 90.01%. 그런 결과가 나왔지 뭐야. 아무튼, 너무 이상하고 내가 설계를 잘못한 것 같아서 결과지는 다 폐기하기로 했어. 아, 이것도 괜히 얘기한 것 같은데. 그냥 모른 척해주라.’
‘그래, 뭐, 그럴게.’
영원이 나중에 여현과의 매칭률을 조정할 수 있다는 걸 화연에게 알려주기 전까지는, 무의미한 잡담일 뿐이라 여겼던 대화였다.
그런데 매칭률 조정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짬을 내어 윤희유 교수를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수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요련이 본 매칭률이 사실인지, 그저 기기의 오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90% 이상의 매칭률이 나오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정말 있다면 무엇이 가능할지 가상으로라도 알고 싶었다.
다만, 영원과 여현을 실제로 염두에 둔 가설이라고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기대만큼 흥미로운 답변을 들었다.
‘정말로 90%가 가능하다면, 생명 자체에 개입할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죽어버릴 사람을 살려내는 거죠.’
그러니 살릴 수 있을 터였다.
여현 쪽에서 영원과의 매칭률을 90%까지 어떻게든 올리게 할 수만 있다면, 영원이 다시 깨어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이곳에 갇혀 있는 화연 자신뿐이었다.
인이어가 망가졌으니 이 안에서 그 사실을 알릴 방법은 없었다.
반드시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영원 가이드님은 깨어나.”
“못 깨어나! 포에버는 SSSSS급 게이트를 소멸시킨 대가를 치른 거야!”
수갑에 갇힌 하늘이 몸부림쳤다. 화연은 그녀를 쉽게 제압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녀는 가이드기도 해.”
영원은 연금술사일 뿐만 아니라 그녀를 깨울 엄청난 매칭률의 에스퍼가 있는 가이드였다.
화연은 하늘에게 자세한 이유를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톡톡.
[곧 나갈게요]
화연은 가이딩 밴드로 백율 부장에게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다음, 가이드의 물리력으로 하늘의 급소를 겨냥하고 말했다.
“이제, 여기서 내가 나갈 방법을 설명해.”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
영원은 어둠 속에 있었다.
외부의 무엇도 파악할 수 없었다.
꿈 같은 것에 의식이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이 어둠뿐인 의식 속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고통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여태껏 경험한 어떤 고통보다 압도적인 고통이었다.
이 고통의 끝이 언제일지 역시 감도 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영원은 고통 앞에서 체념하며 불평불만을 삼켰다.
그러면서 여현을 처음 만난 때를 생각했다.
그의 불행에 설득되어, 다시 귀찮은 일을 떠맡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리고 별관 밖으로 나와, 김여현이 자신에게 엄청나게 위험한 존재라고 판단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의 예감은 정말 현실이 되어버렸다.
깨달았을 때 바로 도망쳤어야 했을까.
아니.
영원은 제 삶을 통틀어 여현을 만난 뒤 그의 곁으로 가기 위해 애썼던 것만큼 잘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그가 명동에서 죽지 않게 할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도 먹었으며, 즐거운 대화를 오랫동안 나눌 수 있었다.
그를 품에 수없이 안았고, 수없이 가이딩도 했다.
모두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의 곁에 계속 머무르며 그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된 것 역시 잘한 일이었다.
매우.
앞으로 영원히 고통받는다고 해도, 그 생각은 변치 않을 터였다.
‘끔찍한 것들만 가득했던 세상에서, 그토록 강렬한 확신을 주는 상대를 만났다면…….’
‘삶의 끝을 헌정할 만한 상대였던 거야.’
영원답지 않은 운명론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목숨을 걸 만한 일에 걸었을 뿐이라고.
다행이었다.
이제껏 살아있다가, 여현의 세상을 구하고서야 끝을 맞이할 수 있어서.
‘다시 눈뜰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후회되는 건 없었다.
한 번쯤 더 여현에게 너를 만난 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말 행운이었다.
만남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약간은 사랑 같았다.
사랑이었다.
‘…….’
‘그래.’
‘그런가 봐.’
그 고백을 용기 내어 할 기회가 없었다 해도, 그마저도 후회는 없었다.
그저, 나의 에스퍼가 나를 잊지만 말아 주기를.
영원은 그런 소망을 품으며,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할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주아주 오래.
그러면서 영원은 멀리 보이는 수레바퀴를 발견했다.
‘매칭률 조정할 때에 봤던 건가?’
희미하게 빛나는 것은, 여현과의 관계에 대한 흔적이었다.
영원은 웃었다.
어째서 저런 게 여기에서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약간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떤 기적이 일어나 다시 여현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 구원은 원래 스스로 하는 거지.’
영원은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리라 기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