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장막을 이용한 광범위 공격이 무력화된 후.
퍽. 쾅!
여현과 그레이 사이에 거의 육탄전 같은 근접전이 이어지던 도중.
캉!
그레이의 근접 공격을 튕겨낸 여현은 지상 먼 곳에서 독특한 반짝임을 봤다.
동시에 익숙지 않은, 그러나 목격한 적은 있는 힘을 느꼈다.
쾅. 콰직!
그레이와 형체 없는 공격을 주고받다 잠시 시선을 내려 보니, 넓은 대지가 순금에 덮인 채였다.
쿠구궁.
우우우웅.
저 울림도, 반짝임도 영원이 만들어낸 연금술의 결과일 터였다.
“…….”
대량의 금을 손쉽게 만들어내는, 다른 차원으로부터 온 힘.
여현에게는 낯선 힘이었다. 다가가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K. 느껴지지? 저거.”
쾅!
그러나 여현에게 가까이 다가와 질문을 던진 그레이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 이쪽 세계 사람이기만 해서, 모르나?”
“…….”
쾅!
그레이의 공격을 재차 튕겨낸 여현의 시선이 차게 식었다.
파직.
둘이 가까이 붙었던 틈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튀었다.
캉!
반작용으로 여현과 그레이의 거리가 수백 미터로 벌어졌다.
“K. 포에버가 왜 저런…….”
“…….”
“공격도 아닌 짓을 애써서 하는지 알겠어?”
잠시 공격을 쉬어갈 때, 그레이는 웃음을 되찾으며 말했다.
아끼던 손목시계를 여현 때문에 저 아래로 떨어뜨린 이후 다시 처음 지어보는 표정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짓을, 왜 하는 걸까? 저거 다 금 시장에 팔아치워,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하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하든 여현의 눈빛에 더해지는 불쾌감이 그레이를 즐겁게 했다.
“진짜 모르겠어? 난 알겠는데.”
그레이는 여현을 깔보듯 말했다.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레이는 영원의 현재 심경을 정확히 알겠다고 생각했다.
‘대제의 자존심. 그걸 누가 건드리는 걸 견딜 수 없는 거지.’
‘거의 평생을 대제로만 살아왔을 텐데.’
‘존재에 관한 문제니까.’
그레이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짙어지기만 했다.
“나만 그 이유를 아는 게, 신경 쓰여?”
콰직.
둘이 다시 가까이서 맞붙었다.
콰광!
여현이 순식간에 그레이의 목덜미까지 손을 뻗었고, 공중에서 작게나마 핵융합이 일어났다.
쾅!
살의를 띤 공격이었다.
먼저 빛이 났고, 충격파가 번졌으며, 소음은 그 이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콰과광!
힘이 가해진 것은 찰나였으나, 그 충격은 오랫동안 파도처럼 주위로 번져 나갔다.
“하.”
그럼에도 그레이는 또 웃었다.
“질투해?”
K를 도발하면 할수록, 그의 내적 평정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 거라 확신하면서.
그건 좋은 일이었다.
쾅!
비슷한 공격이 또 왔다.
그레이는 그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몇 번을 해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거야.’
지금 그레이와 여현의 힘은 아슬아슬하게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현의 미세한 동요에 따라 판도가 얼마든지 갈릴 수 있었다. 그레이에게 좋은 쪽으로.
‘K가 흥분한다면 이쪽이 더 유리해지지.’
‘섬세한 컨트롤은 K의 특장점인데, 그걸 잃을 수 있으니.’
‘여태까지 K는 흥분해서 싸워본 경험도 거의 없어.’
‘괜히 내가 연금술까지 써서 어떤 준비나 희생을 감수하지 않더라도, 유리한 지위를 점할 수 있어.’
그러나 다음 순간 그레이는 불쾌한 변화를 감지했다.
‘그런데 K 저 자식, 왜…….’
동요하던 여현이 잠시 인이어를 만지더니, 매우 평온한 표정이 되어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
동시에, 엄청난 힘이 필요한 무모하고 막강한 공격도 멎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여현은 잠시 멈추어, 인이어에 대고 또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포에버?’
‘가이드랑 대화?’
그래도 그레이는 크게 개의치 않으며 다시 도발을 시도해보았다.
“너랑 방금 말한 네 가이드, 포에버 말이야.”
“…….”
“너는 알 수 없는 그녀의 본심을 난 확실히 이해해.”
그러나 기대한 반응이 이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
K는 다만 차분한 눈으로 자신에게 빈틈이 없는지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맨 처음에는 그냥 내 편이 되라고 몇 마디 말 좀 했다고 완전히 눈이 돌아버리지 않았나.’
그레이는 K에게서 갑자기 분노가 사라진 게 이상했다.
내면의 흥분상태도.
갑자기.
왜?
여전히 웃는 표정은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여기서 시간을 얼마나 더 벌어야 하는지도 생각했다.
일단은 캘리포니아의 연구소에서 결과가 오는 데까지 기다릴 시간이 필요했다.
쾅!
그때, 그 생각의 빈틈을 타고 여현의 공격이 들어왔다.
그레이는 인상을 쓰며 그 공격을 옆으로 흘리려 했지만…….
퍽.
펄럭.
무언가가 허리를 강타함과 동시에, 어깻죽지의 상의 일부분이 잘려나갔다.
“…….”
이제 몸에서 떨어진 것은 시계만이 아니었다.
시계. 그리고 이제는 왼쪽 팔을 덮었던 옷감들까지.
“K.”
이제는 그레이의 눈빛에 조금 전 여현만큼의 분노가 실렸다.
“나와 포에버에게는, 너는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공감대가 있다고.”
이제는 여현이 차분했다.
여현은 냉담한 시선으로 다시 그레이의 약점이나 빈틈을 찾아내려고만 했다.
그레이로서는 더욱 짜증 나는 일이었다.
―딘하우스 님.
―게이트 병합 설계는 거의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의총 가이드의 설계도 일부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어서…….
인이어를 통해 들려오는 보고도, 그레이의 짜증을 심화시키기만 했다.
“해. 그냥, 따라서만 해. 의미는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더라도.”
그레이는 짜증을 가득 담아 말했다.
“어쨌거나 작동하기는 한다는 거 아냐.”
여현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쾅!
이번엔 그레이가 강한 힘을 실어 충격파를 날렸고, 여현이 그를 또 튕겨냈다.
“얼마든지, 최악의 결과가 일어나도 되니까.”
그레이의 목소리에 심한 한기가 서렸다.
“그냥 준비해.”
모두가 다 죽음의 폭풍에 휩쓸린다 해도, 자신이 지는 것보다야 나았다.
“K. 애석하게도.”
팽팽한 긴장이 형성됐다.
“너는 포에버가 연금술을 쓰며 느끼는 감정에 영원히 공감할 수 없을 거야. 포에버와 너 사이에는 서로 이해 못 할 영역이 늘 있을 게 분명해.”
“…….”
“대제의 깊은 고독. 연금술의 대가로 얻는 고통. 그 모든 걸, 너는 절대 온전히 알지 못할 테니까.”
“…….”
“너의, 연인도 아닌 그 가이드는 어쩌면 자신의 일상에 더 공감해 줄 수 있는 다른 연인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
“…….”
“포에버는 내 도발에 걸려들었어. 난 포에버가 어떤 부분을 못 참는지 잘 아니까,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걸 처음부터 알았지.”
파지직.
스릉.
그레이는 다시 하늘에 암막 커튼을 치려 했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레이를 중심에 두고 잉크처럼 번져 나갔다.
“글쎄.”
돌아온 여현의 반응은 작고, 차분했다.
“내 가이드를 화나게 할 방법을 잘 안다는 게, 내가 부러워할 일은 아닌데.”
K를 건드린 건 확실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열등감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파지직.
여현은 다시 그레이의 장막을 밀어내기 위해 힘을 펼쳤다.
“너야말로 나와 내 가이드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어.”
그레이가 말하는 이해의 문제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영원이 겪어온 과거의 순간들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기는 했다.
“함께, 어느 곳을 보느냐지.”
하지만 그레이는 처음부터 틀렸다. 같은 연금술사인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원이 저와 같은 에스퍼가 아닌 게, 여현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게다가 넌 금방 죽을 테니까, 같이 공감하고 뭐고 할 기회나 시간 자체가 영구히 사라질 거야.”
쾅!
질투는 인다.
감정이 그렇다면, 상대를 없애면 된다.
“내 가이드야.”
여현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영원히, 나만을 가이딩할 거고.”
“…….”
“네가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데, 내가 왜 널 견제하겠어.”
“…….”
“그냥 죽이기만 하면 돼.”
그레이를 사라지게만 하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여현의 말에, 그레이는 웃었다. 그러면서 응수했다.
“무슨, 둘 사이에 각인이라도 되어 있나?”
“…….”
“너만 가이드할 전담 가이드라고? 그래 봐야 얼마든지 다른 전담으로 갈아탈 수 있잖아? 결혼도 아니고, 계약서도 제대로 안 적힌 그런 전담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다니. K. 생각보다 순진하네.”
“…….”
“게다가 여자들은, 남자들의 생각보다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거든.”
“…….”
“잊고 있었어? 넌 화상 범벅 괴물이잖아.”
괴물.
그 단어에 그레이는 힘을 실었다.
“여자의 사랑을 받는 건 외모보다는 인성이라고 자위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지. 지켜보는 내 눈엔 한심하지만, 불쌍하게는 생각해 줄게.”
하하. 그레이는 본인의 화려한 외모를 과시하려는 듯, 더 아름답게 웃었다.
“그레이.”
여현이 그레이를 불렀다.
그다음에는 비웃음을 담은 어조의 말을 이었다.
“방금. 내 가이드가.”
“…….”
“가이딩이 필요하면 꼭 말하라고 하던데.”
방금, 여현은 연락을 받았다.
힘든 상태기는 한데, 일단 류하늘의 힘은 잠시 동안 못 쓰게 만들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짬을 내어 곁으로 오겠다고 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그 순간 이 관계와 그 대화에 낄 수 없는 제3자에 대한 분노가 순식간에 잊혔다.
어차피 영원은 그레이에게 가지 않는다.
그레이 딘하우스는 영원과 자신의 관계 밖에 있다.
불순물, 쓰레기일 뿐인 제3자.
그가 지껄이는 말 따위에 휘둘려 주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곧 시체가 될 너를.”
“…….”
“내가 왜 신경 써야 할까.”
여현이 웃었다. 그레이처럼.
사락.
그리고 마스크를 벗었다.
“……!”
“걱정이야 고마운데.”
그레이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내 가이드의 취향은 너보다는 나라서.”
여현은 영원이 그의 얼굴을 좋아한다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
그레이는, 어쩌면 여현의 얼굴이 다 치료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은 하고 있었다.
망가지기 전에 꽤나 인형 같은 외모였으니 다 자란 얼굴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저렇게 생긴 K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떤 남자도 제 옆에 서면 오징어가 되듯, K 또한 치료해봤자 제 심미안을 채우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
그런데 아니었다.
여현은 괜히 사람들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게 싫어 마스크를 벗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둘뿐인 공중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뭘 하려고 하든.”
“…….”
“해봐.”
이제는 여현이 도발했다.
그레이의 흰자에 핏줄이 돋아났다.
두 사람 모두가, 눈에 광기를 띠고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