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궁.
김여현과 그레이 딘하우스.
두 사람은 그레이가 펼친 검은 장막 근처 상공에 마주 서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둘은 모두 동요 없는 표정이었다. 둘은 힘만을 사방으로 뻗어내며 영역 싸움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찾아내지 못했다.
쿵.
양쪽에서 펼친 힘의 영역이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했다.
쿠궁.
여현과 그레이 사이의 거리는 약 1km.
평범한 이에게는 먼 거리라 해도, 둘에게는 서로의 모든 행동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
“…….”
그러나 두 사람은 오래도록 아무런 말도 섞지 않았다.
그레이가 영원에게 역겨우니 치우라는 거절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K.”
그레이는 의기소침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한번 웃어 보이고는 여현을 긁는 말을 뱉었다.
“여자들은 여러 번 찍으면 넘어오기도 해. 비싸게 구는 건 그것대로 매력 있지.”
“…….”
여현의 눈이 살기로 채워졌다.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입은 열지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인가?”
그레이는 여현에게, 너 역시도 나의 편으로 돌아설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당연히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여현은 차게 식은 눈으로 그레이를 응시하기만 했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답을 달라고 여현을 다그치는 대신, 검은 장막 곳곳에 전구 같은 구슬들을 박아 넣었다.
전구가 하나둘 켜지듯, 검은 배경에 빛나는 점이 수없이 생겨났다.
“K.”
“…….”
“너에게는 상처가 있어. 제대로 된 사랑도, 가이딩도 받지 못해서 어딘가가 비틀려 있지. 그래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거야.”
여현은 그레이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만 하면 어린 날의 상처 타령하는 저 화법은 항상 아무런 설득력이 없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여현은 딱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레이 역시,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듯 장막에 더 많은 구슬을 박아 넣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분출이 예고되는 중이었다.
여현은 그를 슥 살피더니, 자신의 힘이 방어할 수 있는 영역을 그 아래로 더 넓혔다.
쿠궁.
장막과 여현의 힘이 닿아 거대한 충격음이 발생했다.
그레이는 즉시 인상을 썼고, 여현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까득.
그레이가 이를 씹었다.
‘저 미친 XX.’
그레이는 최대한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소 질린 기분으로 이를 더욱 악물었다.
까드득.
‘에스퍼의 힘 하나로…….’
‘정말 미친 수준의 방어력을 내고 있잖아.’
‘괴물 XX가 지 가이드랑 몇 마디 말 섞었다고 질투에 진짜로 빡친 건가.’
그레이는 여현이 무엇 때문에 정말로 기분이 나빠졌는지 알겠다는 생각에 현 상황이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 우스움이 진정한 즐거움이 되진 않았다.
이 순간을 그저 즐거운 상황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여현의 힘과 대응이 상상 이상인 게 문제였다.
숨겨둔 모든 힘을 되찾았는데도.
이 짧은 시간에 더 강해진 건 그레이 자신만이 아니었다.
‘미친놈인 줄이야 오래전부터 알았지.’
K는 아홉 살일 때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꼬마였다.
‘정말로 진작 죽였어야 했는지도.’
모든 힘을 되찾았는데도 이렇게 팽팽한 긴장이 유지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에스퍼의 힘으로는, K에게 굴복하게 되리라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연금술을 더해도 이 정도인 건 정말 놀라웠다.
‘궁극의 물리계.’
그런 그레이는 모든 걱정을 떨치고 웃었다.
‘이런 긴장은 오랜만이지.’
‘나쁘진 않아.’
그레이는 스카이가 알아서 자신의 일을 해내 준다면, 모든 게 잘 정리될 것이라 믿었다.
그렇다면 승산은 얼마든지 있었다.
“K.”
“…….”
“그래. 솔직히 그동안 우리는 너무 오래 끌었어.”
“…….”
“세계수의 평가나 서열질이, 우리 사이의 위계를 나타내진 않잖아?”
이제 서열을 제대로 정리할 때가 됐다.
그레이는 여현 역시 그에 동의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 중 한 사람은 죽어줄 때가 됐어.”
“……그래.”
“…….”
그레이는, 여현이 입을 열어 동의해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파직.
쿠구궁.
힘이 한 차례 요동쳤다.
여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죽어.”
쾅!
여현이 날린 무형의 힘이 그레이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ㅇ.”
모두가 완벽하다고 일컫는 그의 신체에, 아주 옅게나마 상흔이 남았다.
슥.
그레이가 손바닥으로 상처 난 볼을 닦았다. 넓게 핏자국이 묻어나왔다.
“…….”
쿠구궁.
여현의 힘이, 검은 장막 전체를 우주로 밀어냈다.
콰직.
손목을 감싸고 있던 그레이의 시곗줄까지 망가졌다.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명품 시계가, 손목에서 떨어져 저 구름 밑으로 추락했다.
그레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
그리고 같은 시간, 서쪽 아래편의 산맥.
영원과 하늘이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드드득.
두두두두둑.
영원은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주시했다.
그녀는 S급 물리계 에스퍼의 힘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발아래 깔린 검은 것은 계속 그 넓이를 넓혀가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은 그녀의 뒤편 산맥의 절반을 사실상 ‘들어 올리고’ 있었다. 영원이 연금술을 이용해 훼방을 놓아도 무지막지하게 힘을 쏟아부었다.
‘괜히 긁어서 자극했나?’
‘음…….’
영원은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 지금 자신은 약간 망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저 위편에서 형성된 여현과 그레이의 팽팽한 대치상태를 곁눈질로 살피자 그런 기분이 더 심화되었다.
‘예감이 정말 안 좋아.’
‘아니, 베이징에서까지만 해도 분명히 내 인생의 장르는 원톱 먼치킨물이었던 것 같은데…….’
‘역시, 그건 훼이크였고 실제로는 그냥 노답 개고생 현판이었던 듯.’
하늘은 영원의 짐작보다 강했다.
물론 하늘의 한계가 상상 이상이라고 해서 영원이 진득한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다.
‘할 수야 있지.’
‘당연히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이기기까지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게 문제야.’
어쩐지 근육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몸에 또 상당한 시련이 주어질 것만 같았다.
‘다시 한 걸음 멀게 느껴지는 백수 잉여물의 꿈…….’
‘그래…… 처음부터 여기는 귀염 뽀짝 로판이 아니었어.’
영원은 높은 곳을 보며, 일단 여현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전담 에스퍼가 머나먼 곳 S급 게이트 안에 홀로 있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앞에 그레이가 있다는 점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지만.
“너, 한눈팔지 마.”
콰광!
하늘이 영원에게 산을 조금 떼어낸 것을 던졌다.
말이 ‘조금’이지 웬만한 빌딩 하나만 했다.
파삭.
영원은 하늘이 날린 산의 파편을 단번에 부쉈다. 바윗덩어리가 모래가 되어 공중에서 쏟아져내렸다.
“포에버. 내가 말했던가?”
하늘은 그레이가 영원을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배운 듯했다.
포에버.
영원으로서는 늘 위화감이 드는 호칭이었다.
“나는 단기간에 연금술까지 배웠어. 많은 걸 깨우쳤지.”
“…….”
영원은 그때쯤 발아래 깔린 검은 것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했다.
연금술을 위한 준비단계.
‘그렇다고는 해도, 근육 키우려고 운동도 시작하기 전에 스테로이드부터 치사량으로 넣은 수준인데.’
스스로를 악의에 바쳐 내면부터 갉아 먹히는, 주화입마에 빠져들기 딱 좋은 형태라서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게 맞았다.
“응. 보니까, 그런 것 같네.”
짐작은 했지만, 직접 그 내용을 확인받으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레이가 소모품 취급을 하는데, 모르는 모양이지.’
S급 에스퍼의 힘뿐만 아니라, 더 이상한 것이 그 위에 얹혔다.
“…….”
“포에버. 굉장하지 않아? 너는 이걸 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어?”
“…….”
영원은 연금술을 위한 준비는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숨 쉬는 것처럼.
하지만 굳이 그걸 알려주어 열등감을 더 자극하진 않기로 했다.
“너. 그레이를 위해 아르케미를 만드는 것도 도운 모양이지?”
대신 확인해야 할 것을 물었다.
“…….”
“원인이 발견되지 않은 학살. 주동자는 아니더라도, 가담은 했겠지.”
“…….”
하늘은 가장 악랄한 짓을 한 건 조지나라고 항변하지 않았다.
영원은 그 반응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역삼 본부는 그레이의 생각만큼 정보수집력이 약하거나 멍청하지 않아서, 그레이가 벌인 일이 어떤 것인지 대강은 다 알았다.
각국 센터에서 몇몇 사건은 예측하여 막으려고 해보기도 했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네가 어리다고 하더라도, 열다섯이면 이젠 옳고 그른 걸 모를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영원은 10대들의 범죄에 관대한 타입이 아니었다.
갱생의 여지가 있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심각한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은, 쉽게 변할 수 없을 정도로 꼬인 경우가 많으니까.
‘매우 성숙한 성인에게도 사회화가 덜 된 시기가 있었겠지.’
‘사람에 따라 그 발달 시기가 다를 수는 있어.’
하지만 류하늘처럼, 어떻게도 정당화할 수 없는 짓을 이미 저질렀다면, 일단 쉽게 용서해주어선 안 됐다.
‘갱생할 수도 있지.’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처벌은 받아야지.’
‘이미, 저 아이가 간접적으로라도 상처 입힌 사람들은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지도 않으니.’
영원은 그레이가 뿌린 영상에 담겼던 잔혹한 장면을 기억했다.
―아악!
―아아악!
보지 못한 것들은 더 많을 터였다.
영원이 본 몇몇 영상 안에서 하늘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거나, 화면을 향해 손가락 하트나 V자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그냥 밖에서 멀쩡히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다.
영원은, 검은 땅 위에서 하늘과의 거리를 재고,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하늘의 그릇에 손을 대 무언가를 조작하면 하늘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일 것이다.
폭주가 일어나든,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이 일어나든.
영원은 저 멀리에 있는 SS급 게이트와의 거리도 계산했다.
“요련 언니.”
인이어에 대고 말하자, 역삼 본부에 있는 요련이 곧장 응답했다.
―응.
“SS급 게이트 안에서 S급 에스퍼가 힘을 미친 듯이 쓰면, 바깥 세상까지 폭주의 여파가 번질까?”
―게이트 등급이 더 높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도 같은데.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영원의 중얼거림을 들은 하늘이 인상을 찡그렸다.
“포에버.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뭘 것 같아?”
“내가 순순히 저 안으로 끌려가 줄 것 같아? 여기는 그냥 다 알면서 따라서 와 준 거야.”
“……하늘아.”
영원은 꽤 차분하고 다정히 하늘의 이름을 불렀다.
하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람을 그렇게 막 죽이면 안 돼. 네가 저지른 일 중 어떤 것들은 식물이나 무생물에게 해도 잔인한 짓이야.”
“…….”
“안타깝지만, 아이에게 위험한 장난감은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해.”
영원은 하늘 역시도 영원히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간단한 비유를 이해했을 터였다.
“그 힘, 빼앗아줄게.”
“…….”
“내가 베이징에서 한 거 봤지?”
경험치도 쌓았겠다, 이번에도 당연히 해낼 수 있었다.
“또 보여줄게.”
영원은 다시 극심한 근육통을 각오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