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은 그레이를, 영원은 하늘을, 백율과 화연은 이반과 후방 대피 및 엄호를 맡았다.
센터의 지시가 없었더라도, 영원, 여현, 백율, 화연은 지금 같은 배치로 그레이 측의 공격에 대응했을 터였다.
여현은 물리적인 파괴력으로 그레이를 당해낼 유일한 자는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특히, 영원이 베이징에서 힘을 쓴 후유증으로 여전히 미약한 근육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자신이 아니면 영원이 그 상태로 그레이를 상대해야 할 텐데, 영원이 궁극의 연금술을 사용할 시 치러야 하는 ‘대가’라는 것도 여현을 걱정시켰다.
‘그럴 일 없도록 지켜야 해.’
‘절대, 상처 입는 일 없게.’
영원이 깊은 잠에 빠지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걸 견딜 자신도 없었다.
쿵.
여현과 그레이, 두 사람의 힘이 상공의 거대한 영역에서 부딪쳤다.
쿠궁.
힘 대 힘의 영역 전쟁이 한창인 둘의 전장은, 공기마저 희박한 구름 위편이었다.
쿵.
하늘로 충격파가 번졌다. 세계 각국의 관제센터는 전부 비상상황을 외치며 모든 비행기의 이륙을 중지하라 소리 질렀다.
같은 시각, 영원은 하늘과 대치하며 전략을 떠올렸다.
‘셀프 가이딩이 가능한 에스퍼라니. 치트키야.’
‘하지만, 딱히 두려울 건 없고.’
‘원조 본투비 치트키 입력된 사기캐로서 이런 건 내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지.’
‘어떤 약점은 있을 텐데.’
‘에스퍼에게 치명적인 가이드의 물리력. 그걸 사용하면…….’
영원은 하늘의 그릇을 부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이렇게 지쳐 있는 몸으로 해내기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것도 같았다.
‘던전석을 도둑맞은 빚도 청산해야 하고.’
물론 영원은 던전석을 훔치라고 명령한 수괴는 그레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다.
‘주동자는 또 주동자대로 엄벌을 받게 해야지.’
‘무조건.’
콰광!
영원과 하늘의 대치는 영역 싸움이라기보다는 하늘의 화려한 개인기 열전으로 시작됐다.
영원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공격들이 자신에게 닿기 전 하늘의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하늘. 그런 이름이라고 했나?”
영원은 하늘이 잠시 다른 공격을 장전하려고 할 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늘이 잠시 멈칫했다.
영원이 말을 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제대로 해봐. 지금처럼 실망하게 하지 마.”
“…….”
“굉장한 걸 보여줘야지. 고작 이것밖에 안 돼?”
“…….”
“나는 유치원생 놀아주려고 놀이터 온 건 아닌데.”
도발 스킬도 어디에 가서 뒤진 적은 없던 만능의 연금술사 대제.
영원은 툭툭 던진 말에 하늘이 부들부들 흥분하는 걸 느끼며 그녀를 유심히 관찰했다.
힘이 더 농축됐다.
‘그래. 그래 줘야지.’
‘아직 불안정해.’
‘한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영원은 더욱 차분하게 텐션을 낮추고는 관찰에 집중했다. 새롭게 특이한 힘을 알아가는 탐색전은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흥미롭게 느껴졌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싸움을 하려는 하늘과 그를 관찰하는 영원이 마주한 전장은 영원의 유도에 따라 순식간에 바다를 건너 서측 산맥 위로 변했다.
‘바다에서 약간 먼 내륙. 주위에 사람이 없어 누구도 다치지 않는 곳.’
‘여기가 좋겠어.’
영원은 하늘을 유인해낸 다음, 스스로도 서서히 힘을 쓰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런 식의 일대일 전투는 오랜만이었다.
‘적당한 연금술로 대응하고, 가이드의 물리력으로 저 에스퍼의 약점을 공략할 거야.’
‘아직 근육통이 남아 있기는 하지.’
‘그렇지만 뭐, 할 수 있어.’
묘한 긴장이 영원을 사로잡았다.
‘저쪽이 상당히 강한 거야 이미 각오했지만, 아주 말도 안 되게 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영원은 작게 소망했다.
그리고 여전히 막사 근처에 있는 백율과 화연은, 최환성이 연기하는 이반을 상대하면서 대피가 필요한 이들을 안전히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게 그들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임무라고 판단했다.
“부장님, 저는 연구원님들 막사 주시하고 있을게요. 그쪽 가까이에서.”
―그래.
화연은 프론트 가이딩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정도로 백율과 거리를 벌리면서 백율, 요련과 인이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화연 가이드님. 퇴로는 남측 바다 쪽으로 할 것처럼 교란하면서, 북쪽으로 낼 겁니다.
“네.”
화연은 먼 곳 땅 위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백율과 이반을 계속 주시하며 그들로부터 멀어졌다.
백율은 여전히 그녀가 펼친 꽃밭 위에 있었고, 이반 하이제렌은 조지나로부터 그녀가 지배하던 영역을 넘겨받은 듯했다.
스르륵.
펑!
그들이 대치하는 영역에는 여전히 게이트들이 소멸하지 않은 채로 있었기에, 괴수들이 종종 튀어나와 전장을 교란하기도 했다.
‘괜히 조지나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경계하면서 들어가지 않는 것보다는 게이트를 몇 개라도 정리해두는 편이 나았을까.’
물론 백율은 그 이상의 후회는 하지 않았다.
괴수들까지 신경 쓰느라, 다른 각성자들이 조금 불편하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백율 편에는 다른 센터의 S급 각성자들도 있었다. 이반 하이제렌 편으로도 그레이의 편에 선 S급 각성자들이 서서히 도착할 터였다.
―화연아. 무조건, 일반인들부터.
“네.”
―가이딩은 늦어져도 되니까.
화연은 백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백율의 꽃 위에 앉아 이동했다.
‘갈수록 싸움은 격화되겠지.’
참가하는 인원만 보아도 이 꽃밭 위에서의 싸움은, 여현이나 영원이 하는 싸움보다도 훨씬 더 난잡해질 터였다.
‘그런 난투전이 벌어지기 전에 대피로로 빼낼 사람들부터 빼내야 해.’
센터도 같은 생각을 공유 중이었다.
―연구원님들 먼저 대피하십니다.
첫 시작은 각성자가 아닌 연구원들이었다.
―SS급 게이트에 대한, 필요했던 근거리 관측은 거의 끝났으니, 그 데이터로 북극 쪽에서 실험 이어가실 겁니다.
“그럼, SS급 게이트를 S급 던전석으로 처리할 방법을 찾아내면…….”
―이창결 부장님, 장제권 가이드님을 구할 방법을 저희가 전달하겠습니다.
―설계도를 구현하여 넘겨드린다거나 하는 방법을 찾아보죠. 그리로 연구원들이 다시 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네. 알겠어요.”
화연뿐 아니라 백율, 여현, 영원은 각자의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임무도 잊지 않았다.
SS급 게이트가 더 미친 상태로 변모하지 않도록 막는 것.
그리고 그중 한 SS급 게이트 안에서 입구로부터 3억 광년이 떨어진 곳에 있는 이창결, 장제권을 구하는 것.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견된 진행이었고, 그레이 측의 각종 공격에 대응할 전략도 있었다.
이제 그 전략을 그대로 실행해야 할 때가 왔을 뿐이었다.
―센터에서 최대한 백업하겠습니다.
―게이트 처리 관련해서, 의총 가이드님이 뭐라도 찾아내시거나 하면 그 내용도 바로 전달할게요.
“네.”
화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A급 에스퍼들의 엄호를 받아 급히 막사를 빠져나가는 연구원들을 살폈다.
이반 하이제렌은 SS급 게이트에서 급히 튀어나온 괴수를 상대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어줄 모양이었다.
펑!
퍼벙!
저편에서 약간 과장되게 괴수와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내막을 아는 사람만이 눈치챌 수 있는 아주 미미한 차이였다.
화연은 그에 속으로 감사하며, 일단 연구원들과 A급 이하 각성자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기만을 바랐다.
쾅!
물론 저편에서 오는 소소한 방해는 있었다.
콰광!
화연은 이쪽으로 덤벼드는 그레이 측 S급 에스퍼들과 싸우는 센터 측 S급 가이드들을 백업했다.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어. 그게 그레이의 방식이니까.’
‘우리 편처럼 보여도, 주의는 또 해야지.’
화연은 S급 가이드로서 광범위한 영역을 관찰하며 모든 에스퍼들을 서포트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같은 편 에스퍼들 하나하나의 행태를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그렇게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 부근 땅과 상공 모두에서 전쟁에 불이 붙었다.
그레이는 여현을.
하늘은 영원을.
이반과 다수의 그레이 측 각성자들은 백율과 화연 및 센터 각성자들을 상대했다.
콰광!
각기 다른 전장에서, 서로 다른 세 진영의 힘이 동시에 맞붙었다.
쿠궁.
그리고 그즈음.
영원의 귀에 아까부터 계속 듣기 싫었던 음성이 닿았다.
“포에버.”
작게 들리는 목소리.
그레이가 보낸, 다시 매우 옅은 진동만을 가지고 그녀에게 가까이 온 음성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의사를 물을게.”
“…….”
“자발적으로 내게로 와. 그렇다면 너를 해치지 않을게.”
고민할 가치가 없었다.
다만 영원은 단칼에 거절의 말을 해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듣고 씹어주면 되는지를 잠시 고민했다.
쿵.
하늘이 거대한 바위 더미를 땅에서 끌어 올려 던지는 바람에 답을 찾는 고민은 잠시 뒤로 미뤄야 했지만.
파직!
돌은 산산이 부서져 흙이 되어 땅으로 다시 떨어졌다.
영원은 멀리서 자신을 보는 하늘의 시선에서 열등감을 읽었다.
조지나와 비슷했다.
세뇌라도 된 듯, 그레이의 관심에 목마른 이들의 질투.
영원은 입을 열었다.
“……난.”
파직.
그러면서 하늘이 또다시 집어 던진 바위를 가뿐히 막아냈다.
“싫은데.”
“…….”
“네가 그냥 역겨워. 치워.”
영원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
“…….”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그레이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스릉.
그로부터 순식간이었다.
다시 모든 사위가 깜깜해지고, 허공이 새까만 장막에 덮인 것은.
쿠구궁.
다시 지축이 요동쳤다.
그레이뿐 아니라, 하늘 역시 그녀의 검은 힘을 바닥에 깔았다.
‘뭐야…….’
영원이 발을 딛고 선 땅까지도 검게 변했다.
파스슥.
검은 영역과 닿은 생명들이 모두 말라 바스러졌다.
“…….”
쿠구궁.
상공에서는 그레이가, 땅에서는 하늘이 데칼코마니 같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예감이 안 좋아.’
힘을 감추고 있던 베일이 모두 열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