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88화 (88/142)

그리고 현재, 이곳.

그레이가 다가오는 중인 블라디보스토크.

영원이 가까워지는 다른 ‘대제’의 존재를 느낀 바로 그 순간, 그가 아주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소름 끼치는 다정한 인사.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모든 각성자들 중 영원 혼자만 매우 작은 그 목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

언뜻 평범하게도 느껴지는, 가까운 사이라면 익숙했을 인사.

그러나 그 평범함이 영원을 토하고 싶을 정도로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가 최근 영상을 통해 보여준 행보, 그의 선동에 동조한 이들이 자행하는 짓거리들, 그래서 희생되었고 여전히 망가지는 중인 인간과 자연…….

‘역겨워.’

많은 것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포에버.”

곧이어 그레이가 영원을 다시 부르는 소리는 여현에게도 들렸다.

쿠궁.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강력한 힘의 충돌이 발생했다.

저 먼 상공에서, 그레이와 여현 사이에 에너지의 영역충돌이 일어난 것이었다.

“보고 싶었어.”

“…….”

“그래서 너를 가지러 왔어.”

이어진 말은 더욱 가까이서, 더욱 크게 뱉어졌다.

‘아…… 왜 저런대.’

‘오늘따라 유독 제정신 아닌 듯?’

영원이 느끼는 불쾌함이 더 극심해졌다.

이번엔, 근처의 S급 각성자들 모두에게도 그 음성이 선명하게 들렸다.

쾅!

상공에서 여현과 그레이의 힘이 강렬하게 맞닿은 부분이 폭발했다.

“…….”

영원은 역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면의 불쾌함만 더욱 가중되었다고 생각했을 뿐.

동시에, 영원은 그의 말을 마냥 비웃기만 하지는 못했다.

그레이 딘하우스가 어느 때보다 진심일 거라는 생각에.

‘미친놈이 진심이면 정말 무섭단 말이지.’

정말 힘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그레이는 그의 방식으로 영원 자신을 ‘소유’하려 할 터였다. 시체를 가져가서든, 그가 만든 감옥 어딘가에 가두어두어서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속으로 다짐하는 찰나.

영원이 있는 곳의 땅이 진동했다.

쿠구궁.

소리만으로도, 진동하는 것의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쿵.

저편 산의 정상에서 산사태가 일어났다.

쿠궁.

이어서 다시 지축이 저 아래서부터 흔들렸다.

“미친.”

백율이 중얼거렸다.

이 땅 위에, 가까운 곳에서 그 격렬한 힘의 분출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의 힘이 만든 파동이 순식간에 지구 저 아래로 내리꽂혀 지천을 흔든 결과였다.

여현과 영원이 즉각 막으려고 반응해서, 겨우 이 정도에 그친 것이었다.

영원 역시 속으로는 백율의 반응에 동의했다.

‘미친 힘이야.’

‘대제의 연금술에, 세계 랭킹 1위 에스퍼의 힘까지 더해졌지.’

‘물론 사실상 1위는 내 최애기는 할 테지만(중요).’

‘도대체 대가로 뭘 지불하고서 이걸 쓰는 거야?’

영원은 희게 질린 표정으로 대지에 남아 있는 미약한 여진을 느꼈다.

백율은 영원의 곁에서 함께 여진을 느끼다 뒤편의 각국 센터 각성자들에게 소리쳤다.

“지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고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판단하에서였다.

“빨리 각국에 연락해서 재난 상황에 대응하게 하세요!”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에서 발생하는 전투는, 그 주변에 있는 국가에만 피해를 발생시키진 않을 터였다.

지구 어디에서 일어나든,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쩌면 저 우주에 떠 있는 달이나 태양계의 다른 행성까지 파급력을 미칠 수도 있을 터였다.

‘하려고 하면 어떤 미친 짓이든 할 수 있는 각성자들끼리 목숨을 걸고 벌이는 전투야.’

백율은 그렇다고 패닉에 빠지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런 위기는 처음이었지만, 위기상황을 넘겨 온 과거의 많은 경험이 평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자산이었다.

“역삼 본부도 위기대응 특별 강화하고!”

―수신하였습니다.

―인근 주민은 한참 전에 대피 완료하여, 일단 민간인은 근처에 없습니다.

그나마 인이어에서, 역삼 본부에 있는 요련의 침착한 반응이 바로 돌아와 다행이었다.

―이곳은 저희가 맡을 테니, 그곳에서 부디 다들 다치지 마세요.

쿵.

그때 지축의 진동이 갑자기 정지했다.

여현과 영원, 그레이의 힘의 대치가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추어 유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쩌저적.

그래도 힘이 맞닿은 부분의 땅이 저 멀리서 종이처럼 찢어졌다.

그레이가 가한 힘의 파급과 극강의 힘들이 대치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미약한 균열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쩌적.

굳이 미래까지 가보지 않아도, 근처에서 발생하는 지진만으로도 속보가 온 뉴스를 덮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쿵.

그래도 그레이는 아직 직접적인 인명피해를 발생시키진 못했다. 영원과 여현이 즉시 대응하고, 센터에서 발 빠르게 민간인들을 대피시킨 덕분이었다.

강력한 지진을 고려하여 설계된 주변 막사 역시 하나도 무너지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고 단단한 벽이 아닌 천으로 가벽을 세웠지.’

‘하지만 모두 금방 형체를 잃을지도.’

주어진 여유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레이는 금방 눈으로 볼 수도 있는 곳까지 다가올 터였다.

영원은 S급 미만 각성자들과 연구원들의 대피로 확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행히 많은 이들이 곧장 철수 작전의 매뉴얼을 따라 행동하고 있는 듯했다.

“가까이.”

그즈음 여현이 영원을 향해 작게 말했다.

그레이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건지, 더 가까이 오라는 건지, 그 의미가 불확실했다.

영원은 어떤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여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정말로 그레이 딘하우스가 왔다.

“오랜만.”

그는 상공 저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그레이는 등장부터 환상계의 정점에 선 에스퍼다운 면모를 보였다.

화악.

머리 위로 밝았던 하늘 전체가 순식간에 어두운 색을 입었다.

바탕은 매우 짙은 보라색.

미약하게, 구름이나 오로라처럼 섞인 오묘한 핏빛.

그 위로 곳곳에 노란빛, 주황빛을 내는 천구들이 동글동글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통통 모습을 드러냈다.

‘저거 다 아래로 떨어질 거야.’

영원이 판단을 마치기도 전.

와르르.

핵폭탄 같은 구슬들이 과일 바구니가 엎어지는 것처럼 상공에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펑.

펑펑.

펑펑펑.

그것들은 눈처럼, 비처럼 내렸다.

“피해!”

거대한 구슬들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으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현과 영원의 대응으로 빛나는 구슬들은 불꽃놀이 같은 효과를 내며 하늘 곳곳에서 수없이 터졌다.

펑펑펑.

펑펑펑펑.

그러나 모든 파편이 땅에 닿기 전에 증발시키기는 어려웠다.

“악!”

“와악!”

S급이 아닌 에스퍼들은 파편이 땅에 닿아 만들어진 충격파에 동요했다.

‘비슷한 무력으로 서로 붙을 때는, 지키는 싸움이 원래 더 어려워.’

영원은 표정을 굳히고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화아아악.

그 와중에 그레이가 2차 시도를 준비했다.

더욱 어두워진 장막이 다시금 밝아지려던 하늘을 덮었다.

하늘은 더 어두워졌고, 핏빛은 더 선명해졌고, 더 밝게 빛을 발산하는 구슬들이 10배는 더 많이 그 위에서 반짝였다.

“내가, 그리웠지?”

그를 등지고 공중에 떠 있는 그레이가 슥슥 손을 흔들었다.

‘그럴 리가.’

크릉.

하늘이 한 번 전체적으로 빛나며 들썩였다.

같은 S급 각성자들마저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화려한 공격의 장전이었다.

‘그레이의 의식을 구현하면 저런 느낌인 거지.’

영원은 그의 화려하면서 난잡한 의식세계가 참 자신을 질리게 한다고 생각하며 표정을 더욱 차갑게 굳혔다.

그레이의 옆에, 류하늘과 이반 하이제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올 겁니다.”

백율이 말을 마치기 전부터, 영원과 여현은 멀리서 더 많은 각성자들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저 세 명이 속도가 빨라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북극 방향으로, A급 이하, 그리고 SS급 게이트 연구원들 퇴로 확보되었습니다.

요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금만 버텨주세요.

역삼 본부에서 빠르게 대응해주고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배치상, 그레이는 여현 에스퍼님, 류하늘은 영원 가이드님, 이반은 백율 부장님께서 맡아주시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화연 가이드님께서는 백 부장님 서포트랑 같이, 후방 엄호 부탁드려요. 무사히 대피 가능하게요.

10여 개가 넘는 국가와 소통하면서 대응책을 짜주는 센터의 전수에 일단 네 사람은 협조하기로 했다.

“네.”

사락.

백율과 화연은 인이어에 답하며, 미리 펼쳐둔 꽃밭에 있는 각국 센터의 A급 이하 각성자들을 보호하려 자리를 이동했다.

콰쾅!

뒤이어 여현이 그레이의 장막 밑으로 하늘에 넓게 펼친 방어막이, 그레이의 장막을 하늘 위편을 향해 밀어 올렸다.

그리고는 그레이의 장막이 스스로 폭파하게끔 했다.

퍼벙!

공격이 내리꽂히기 전에 먼저 다 터뜨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판단하에서였다.

다행히 그 판단 덕분에 추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공에 머무르고 있는 그레이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가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도 안심할 수 없었다.

진짜 전투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영원은 이제 여현과 떨어져 류하늘을 상대할 때였다.

하늘이, 저 멀리서 영원을 겨냥하고 힘을 장전하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스르륵.

괴상하고 독특한 힘.

‘저쪽도 물리계 S급.’

누구와도 사력을 다한 전투를 해본 적 없는 폭탄 같은 소녀. 센터에서 권유하지 않았더라도 영원 자신이 류하늘을 맡는 편이 나을 터였다.

‘게다가…… 내 피 같은…… 던전석을 훔쳐간 도둑이야.’

영원은 절대로 도둑맞은 던전석을 잊어줄 생각이 없었다.

“여현아.”

영원은 떨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여현을 불렀다.

그레이 역시 조지나를 가까이로 부르는 게 느껴졌다. 프론트 가이딩을 받으면서 공격을 쉬는 것 같은데도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손 좀.”

영원은 그레이를 향한 경계를 놓지 않으며 여현의 손을 잡았다.

꽉.

그렇게 여현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엄청난 매칭률의 짧은 가이딩이, 순식간에 여현의 그릇을 채웠다.

그레이도 비슷한 준비를 마친 듯했다.

“더 필요해지면, 인이어로 호출해.”

“……네.”

“다치지 마.”

“네.”

그렇게 둘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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