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긱.
하늘은 도망치고 싶었다.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그런데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고마운 마음은 없겠지?”
“…….”
“왜냐면, K는 네 목숨을 구했을 뿐, ‘각성하면 세상 따위는 개나 줘버리면서 다 죽여버리고 각성자들만이 우월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네 말에 동의해주지 않았으니까.”
“…….”
“네 생각은, 그냥 PTSD 같은 것으로 취급했어.”
그레이의 말이 맞았다.
“네가 몸이 나으면, 정신 역시 회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 회복? 대체 우리한테 회복이 왜 필요해? 이게 제대로 된 정상인데.”
그레이와 하늘이 생각하는 ‘정상’은 일치했다.
“그리고 너는 오랜 시간 각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버려졌지.”
“…….”
“사실 K는 그때의 너를 이미 잊었을 거야. 왜냐면, 당시 넌 기억할 가치가 없는 비각성자였으니까.”
무가치한 비각성자. 그래서 김여현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당시에도, 지금도, 하늘은 그렇게 생각했다.
‘개인의 영달보다 세상을 구하는 일, 타인을 위하는 일을 우선시하겠다는 센터의 미친 XX들은 비정상이야.’
‘내가 각성하기만 하면 니들을 다 발밑에 두고 꾹꾹 짓밟을 거야.’
‘내가 비각성자라는 이유로 나를 무시해 온 XX들, 그거 후회하게 다 개처럼 취급할 거야.’
하늘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레이의 동의로, 믿음은 더욱 짙어졌다.
“스카이.”
“…….”
“난 너의 편이야.”
“…….”
“김여현은 틀렸어. 네가 옳아.”
“…….”
“그리고 이제 너는 선택됐어. 이제 네가 주인공이야. 같잖은 세계평화를 주장하는 센터의 K 같은 저능아들이 아니라.”
류하늘은 김여현을 증오했다.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당한 세뇌에 굴복해 세상을 구해내겠다고 결심한 그를.
그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에스퍼였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에 동의해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각성하면, 함께 세계의 재난을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가 보인 반응은 딱 그 정도였다.
‘센터의 분들은, 항상 제게 미안해해요.’
김여현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자신을 가두고 세뇌했던 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죠. 이상한 사람들도 있고.’
‘그래도 소수나마, 어린 제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 애쓰는 분들이 있어요.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걸 너무 많이 봐서, 더 잃을까 괴로워하면서도 말이에요.’
‘제 삼촌도 그렇죠.’
강원도 지하에 갇혔던 것도, 그 이후의 각종 사건도, 그의 곧은 가지를 휘어지게 하지 못했다.
‘전 고통이나 감정에 무뎌요.’
‘그래서 삼촌의 슬픔이나 걱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모르는 건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제게 가혹하다 싶은 부분이야 좀 있죠.’
‘하지만, 세상은 원래 복잡한 곳이잖아요.’
‘사실 회색 지대는 어디에나 넓어요.’
‘그 안에서, 그나마 옳다 여기는 일을 찾았고, 그를 계속 해나갈 힘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하늘로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그냥 김여현이 죽어버렸으면 했다.
저딴 이해할 수 없는 철학을 늘어놓는 놈은 죽었으면.
그 화상에 휩싸여 그대로 픽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확 폭주해 죽어버렸으면. 그래서 센터는 무너지고, 관련자들까지 싹 다 죽어버렸으면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여현은 살아남아 영웅이 되었다.
계속, 계속.
알 수 없는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했다.
류하늘 자신은 이후에도 오래도록 각성하지 못한 쓰레기 패배자였고.
“김여현은 너를 학대했던 쓰레기 같은 종교에 세뇌된 거야. 멍청하게.”
그레이는 하늘이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K를 그 매트릭스 속에서 꺼내주려 했는데, 그 멍청한 자식은 깨어나지 못했어.”
“…….”
“네가 더 특별해.”
하늘은 심장이 더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스카이. 나는 네가 가이드로 각성한 뒤 에스퍼로 다시, 그렇게 두 번이나 각성할 줄 알았어. 그런 너의 각성을 기다려왔어.”
하늘은 그레이에게 홀렸다.
그레이는 동시에 생각했다.
‘이 15세 꼬마는 포에버보다, K보다, 심지어는 조지나보다도 멍청해.’
‘이런 종류의 미성숙한 여자애들, 인정욕에 자기 전부를 거는 어린애를 가지고 노는 거야 언제나 숨 쉬는 것보다 쉬웠지.’
그레이의 아름다운 미소에 더러운 생각들이 가려졌다.
“증명하자, 너와 나, ‘우리’가 옳다는 걸.”
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끄덕였다.
***
대한민국의 첫 각성자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한반도 위에서 처음 나타난 에스퍼로 짐작되는 후보 두 사람, 그와 그녀는 각성자들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기 전에 각성했다는 것.
‘안녕하세요. 윤희유 조교님 맞으신가요?’
그리고 그 혹은 그녀와 처음으로 그 능력에 관한 면담을 하기 시작한 것이 젊은 날의 윤희유라는 것.
‘네. 제가 맞는데요.’
‘그, 그게……. 김호균 교수님께서 같은 연구실 박사과정 중인 학생이라고 소개해주셨어요. 교수님 행정 관련 업무를 도와드리고 계시니까, 비슷한 건이면 찾아가 보라고요.’
‘그렇긴 한데…… 누구시죠?’
윤희유도 처음에는 몰랐다.
갑자기 나타난 여성이 제 삶의 노선을 어떻게 틀어버릴지.
인생을 뒤흔드는 변화의 시작은 예고 없이 왔다.
‘좀, 얘기가 길어질 것 같거든요.’
‘아, 그러면 연구실은 좀 그래서.’
‘앗. 지금 어려우신가요? 그러면 저는 내일도…….’
‘아뇨, 아뇨. 여기엔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저쪽 교내 카페에라도 가시겠어요?’
‘네. 좋아요. 제가 지금 임신 중이라 카페인 말고 허브티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윤희유는 임신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른 몸의 여성과 어쩌다 교내 카페에 앉게 되었으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 그리고 배 속 아이의 아빠…… 말인데요.’
‘네.’
‘갑자기, 저희 둘 다 초능력 같은 걸 쓸 수 있게 되었어요.’
‘네……?’
윤희유는 그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숙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종교는 안 믿는다고 할 수도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그 자리에 계속 있지 않았을 텐데, 그날은 무언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윤희유는 라떼를 마시면서, 임산부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다음엔 그녀와 연락처까지 주고받았다.
‘급한 일 생기면 연락 주세요.’
정말 처음부터 초능력 이야기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산부는 이야기 도중에 몸 곳곳의 멍을 보여주었는데, 사실은, 혹시라도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녀를 폭행하고 있는 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어 연락처를 주어버린 면이 컸다.
‘남편분과 관련된 거더라도요. 뭐든. 특히 몸에 그렇게 상처가 남을 만한 일이면요.’
‘네, 네.’
며칠 뒤, 여성은 정말 ‘남편과 관련한 이상한’ 일이 생겼다며 급히 윤희유를 불렀고, 윤희유는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갔다.
쾅!
본 것은, 정말 초능력이었다.
남편 쪽이 쓰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힘.
‘가끔씩 통제가, 통제가 안 돼요.’
여현의 힘의 불안정함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다소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는, 어쩐지 남편의 힘 때문에 저와 아이가 금방 죽을 거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아이의 어머니는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여현이.’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은 여현이에요.’
그녀는 아이만은 살려, 아이에게 김여현이라는 이름을 꼭 붙여달라고 말했다.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도 전해달라고.
윤 교수는 부부가 죽을 일은 없을 거라 했다.
그러면서 둘의 가까이에서 각종 데이터를 수집했고, 각성자에 관한 수많은 이론을 검증해냈다.
김여현은 건강히 태어났다.
그러나 부부의 안 좋은 예감대로, 에스퍼였던 커플은 게이트 내에서의 폭주로 함께 세상을 떠났다.
게이트가 무엇인지, 폭주가 무엇인지 누구도 정확히 모르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게이트에 휩쓸려 들어갔던, 여현을 지키기 위해.
여현을 구해낸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을 그 안에서 구출해내기 위해.
그들이 먼 곳으로 떠난 다음, 이창결은 어린 조카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현아. 세상엔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
‘…….’
‘네가 무언가를 잘못한 게 아니야. 그리고 누나랑 형이 사랑하는 아이를 두고 어딘가로 영영 가버리려고 했던 것도 아니야.’
‘…….’
여현은 가만히 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너에게 더 안전한 세계를 주려고 그런 거야. 네가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고 안전한 곳에서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해서.’
‘…….’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싶단 바람 때문이었어. 너를, 정말 너무 사랑하고 아껴서, 모든 걸 주고 싶었던 거야.’
‘…….’
‘두 사람에게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건 너였어. 이렇게 두 사람이 가버렸다고 해도, 우린 그걸 잊어서는 안 돼.’
이창결은 어린 조카를 품에 안고 울었지만, 여현은 울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이창결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품에 안겨 있었을 뿐이었다.
‘나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
조금 더 성장한 여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덮쳤던 불행도, 그를 두고 가버린 두 사람에게 닥쳤던 불행도, 무엇도 깊이 원망하지 않으며,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휩쓸렸던 시련이 어떤 것이었는지, 여현은 성장하며 더 구체적으로 알아갔다.
센터에서 마주치는 헌신적인 사람들을 보며, 세상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이해했다.
그럴수록, 그를 세상에 있게 한 두 사람 역시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만날 수는 없지만.’
‘이들과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한 신념을 품은 부모였겠지.’
‘세상을 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계속하여 수많은 위험을 감수했을 거고.’
감정, 특히 애정과 슬픔에 무딘 면이 있는 여현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을 지키겠다.
갈수록 여현에게도 그런 작은 바람이 피어났다.
어린 여현에게는 일단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이창결이 소중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진심으로 센터의 공무원들을 지켜주고도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누구보다 강렬한 감정을 품게 한 가이드를 만났다.
그녀가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있게 하겠다.
영원을 지키겠다.
여현에게는 이제 그것이 타협 불가능한 원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