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86화 (86/142)

제7장

과거의 잔해가 쌓인 현재

얼마 전의 과거.

비선별 러쉬가 시작된 후의 어느 날.

그레이는 태평양 위 작은 섬의 호화로운 저택으로 하늘을 초대했다.

햇살이 화사하게 해변을 내리쬐고 있는 브런치 타임이었다.

“어서 와요.”

그는 야외에 마련된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웃음으로 하늘을 맞았다. 그리고는 테이블을 빙 돌아가 앉기 편하도록 그녀의 의자를 빼 주었다.

레이디를 위해 격식을 갖추는 영국의 신사 같은 태도였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살면서 그런 대접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하늘은 반쯤은 들떠서, 반쯤은 실수할까 봐 긴장해서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늘은 그레이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이블 밑으로 손을 내려 옷에 땀을 닦아냈다.

물론, 그레이는 하늘의 그런 몸짓을 바로 파악하고 그녀가 그러는 이유도 눈치챘지만, 특별히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들어요.”

“아, 네, 네.”

하늘은 아침을 안 먹은 터라, 분명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배가 꼬르륵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허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에 긴장으로 위가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었다.

‘체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좋아.’

‘너무.’

이 분위기, 이 특별함이 하늘을 설레게 했다.

하늘은 예쁜 동화에 삽화로 들어갈 한 장면 같은 브런치 테이블의 풍경을 쭉 둘러보았다.

각종 스콘, 프렌치토스트, 에그타르트, 무화과 파이가 십수 가지 잼, 크림치즈, 버터와 함께 테이블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조금 더 먼 곳에는 각종 햄, 베이컨, 따듯한 감자요리, 페스토를 바른 가지 요리도 보였다.

테이블보부터 식기, 그 위의 음식이 내는 색감이 온통 다채롭고 화려했다.

하늘은 같은 반 친구의 SNS에 전시하듯 늘어져 있던 애프터눈티 세트 사진들을 생각했다.

그 안에서 식기 옆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동갑내기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안의 조잡한 것들, 해봐야 호텔에서 10만 원 이내에도 살 수 있어.’

‘여기가 훨씬 화려해. 훨씬 비싸기도 할 거야.’

‘훨씬 예뻐.’

‘게다가…… 걔한테 그 싸구려를 사준 남자랑은 비교도 안 되는 남자가 내 앞에 있어.’

하늘은 이 장면을 정사각형의 사진으로 담아 SNS에 전시한 다음 그 친구들의 기를 눌러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사진을 찍겠다고 할 수는 없는 거겠지?’

하늘은 그레이에게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튼 좋았다.

“어서 드세요. 마음껏.”

그레이는 매우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누구라도 반할 영화주인공 같았다.

하늘은 잠시 주저하다가, 앞접시에서 가장 먼 곳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으로 조심히 집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네, 네. 그……. 그레이 님.”

“응?”

“말씀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그레이가 웃었다.

하늘은 심장이 꽉 조여 들어가는 기분에 갑갑함과 황홀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레이가 쓰는 존칭이 없는 영어가 던전석을 넣은 기기를 통해 한국어로 통역되는 중인데, 계속 존댓말로 들리는 걸 보면 그가 상당한 배려를 하며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 같았다.

‘다정해. 완벽하고.’

하늘은 그가 자신을 편하게 생각했으면 했고,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래.”

그레이는 계속하여 그림같이 웃더니, 주저 없이 하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할게.”

그는 달콤한 프렌치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앞으로 끌어와 토스트 하나를 반으로 자른 다음 한 조각을 하늘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그 위에 블루베리와 메이플시럽을 직접 끼얹어주기도 했다.

“초코도 더 떠서 먹어. 여기.”

“네, 네!”

그레이는 코코아 시럽이 담긴 예쁜 식기까지 하늘의 앞으로 밀어주며 권하고는, 남은 토스트는 그의 접시 위에 올렸다.

그것 역시 열다섯 소녀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는 행동이었다.

‘하나를 나눠 먹고 있어……!’

둘 다 토스트를 먹는 동안 잠시 테이블 주변이 조용해졌다.

우물우물.

하늘은 음식을 씹으면서, 먼저 어떤 화제든 꺼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레이가 먼저 다정한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어 고민이 멈추었다.

“스카이.”

하늘이 직접 그레이에게 그 별칭으로 불린 첫 순간이었다.

그레이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지만, 하늘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오래도록 기억될 순간이었다.

‘…….’

‘스카이.’

‘나를…… 그렇게 불렀어.’

하늘은 끔찍한 사람과 동명인 자신의 이름을 매우 싫어해 왔다.

스카이.

‘분명히, 이게 새로운 내 이름이야.’

하늘은 앞으로 그 이름으로만 불리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가 감격에 젖어 있을 무렵, 그레이가 질문을 덧붙였다.

“혹시, 재밌는 이야기 하나 안 궁금해?”

“어떤…… 거요?”

그레이가 다시 다정히 웃어주고는 물음을 추가했다.

“김여현의 삼촌이 누구인지 알지?”

“역삼 센터의, 이창결 부장이요.”

하늘은 빠르게 답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지능과 상식이 모자라지 않고서야 누구라도 모를 수 없는 정보라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심영원에게 의문의 1패를 안기는 생각이었다.

“재밌는 얘기는 하나의 의문점으로 시작돼.”

“…….”

“대체, 둘의 다른 가족은 어디에 있지? K의 엄마는? 아빠는? 이창결이 삼촌이라는 건 진짜일까?”

김여현과 이창결이 친척 관계라는 걸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창결은 여현을 ‘현’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스스로가 김여현의 찐 삼촌팬임을 오래전부터 모두에게 주장해 왔기에.

실제 두 사람은 어깨가 넓고 팔다리가 길며 두상이 작은 체격이 매우 닮은 편이기도 했다.

“둘이 친척이면, 이창결은 K의 어머니와 남매겠지? 아마 남동생.”

“……네.”

성씨가 다른 두 사람이 삼촌과 조카 관계라면 이창결이 김여현의 어머니와 형제일 것이다.

“그럼 그 유명인사 둘 사이엔 K의 어머니가 있어야 하잖아.”

“…….”

“근데 이상하게 그 유명한 아들, 남동생 사이에 낀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알려진 게 별로 없지. K가 각성하기 몇 년 전에 자기 남편이랑 같이 일찍 죽어버렸다는 것밖에는.”

하늘이 알고 있는 것도 그게 전부였다.

“근데 사인이 없어. ‘그냥’ 죽었다는 거지.”

“…….”

“많아봐야 30대였을 젊은 남녀가 동시에 병사했을 리는 없고. 초등학교도 입학 안 한 애를 두고 부부가 동반자살을 했으면 뉴스가 나도 한참 크게 났을 거고. 그렇다면 사고사인데, 무슨 사고?”

하늘로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센터에서는 공개적인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기본적으로 김여현의 어린 시절을 건드리지 않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겪은 비극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건 삼가야 한다고.

“끔찍한 뭔가가 있었어. 나도 완벽하게는 모르지만. 그래서 김여현의 정신세계가 그 어린 날부터 이상한 쪽으로 망가진 거지.”

“…….”

“그래서 되지도 않는, ‘만인은 평등하고, 각성자들은 차원의 붕괴에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세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거야.”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레이의 논리도 이상할 터였다. 그런데 하늘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그레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페인의 효과를 누릴 수는 없었지만, 향은 좋았다. 그의 이야기에 빨려드는 스카이를 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김여현은 어렸을 때부터 괴물 취급을 받았어. 피부가 그 지경이 되기 전부터. 그런데도 저를 괴물 취급하는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지.”

“…….”

“본인이 센터 직원인 이창결도 자기 조카를 센터에서 꺼내주지 않았어. K가 그러기를 원했다고는 하는데, 10살 남짓한 어린애가 뭘 알았겠어.”

“…….”

“스카이, 동의하지? 어린 K는 그저 어른들의 말에 세뇌된 거야. 너는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하늘은 입맛을 잃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달칵.

아마도, 그레이는 그녀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하늘의 어린 시절 역시 그녀에게 꽤나 가혹한 편이었다는 걸.

세뇌.

그건 하늘이 경기를 일으키는 단어였다.

하늘은 어릴 적, 가이드였던 어머니와 떨어져 ‘믿음을 가지면 각성자로 각성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진 종교시설에서 컸다.

S급 가이드가 되지 못해 비관에 빠진 그녀의 어머니는, 정체불명의 종교에 심취해 어린 딸을 그곳에 유기했다.

하늘을 격리시설에 가둔 괴이한 종교인들은, ‘각성해서 세상을 구할 것’만을 하늘에게 세뇌했다.

“스카이.”

“네.”

“세뇌되지 않은 네가 옳아. ‘각성하면, 이 XX들 다 죽이러 올 거야’라고 생각하던 네가 완벽하게 옳아.”

“…….”

“그 미친 XX들은 각성자들이 얽힌 정말로 큰 사고를 쳐서 센터 인원들을 출동하게 만들었지.”

“…….”

“비선별자들을 납치해서 피를 뽑는 등 괴랄한 짓을 했으니까. 그 결과로 너를 비롯한 아이들은 다 감금시설에서 구출되었고, 그 자식들은 싹 다 감옥에 들어갔고.”

“…….”

“그 과정에서 K를 직접 만난 적도 있잖아? 그가 너를 구하지 않았다면, 너는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지.”

그레이는 정말로 모든 구체적인 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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