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는 저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우습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유일자라는 세계 S급 에스퍼 랭킹 1위가, 어서 빨리 먹을 게 만들어지기를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부웅.
우우우우우우웅.
그는 방을 빼곡히 채운 연성진들 속에 서 있었다. 모두 아르케미-크리스탈을 빚어내기 위한 연성진이었다.
연성진이 은은한 빛을 내며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럴 때마다, 그 위에 놓인 인간들의 심장까지 함께 진동했다.
우우우우웅.
‘오랜만에 직접 연성진을 그렸는데, 나쁘지 않아.’
‘정말 매우 오래되었군.’
‘그게 다른 무엇도 아니고, 아르케미를 만들기 위한 것일 줄은 얼마 전까지도 예상 못 했지만.’
‘정말이지 우스워.’
그레이는 실제로도 웃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연성진을 재촉했다.
‘빨리 빚어내.’
‘연성을, 어서.’
‘빨리.’
아르케미를 향한 강렬한 갈망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레이에게는 연성진이 연성해 낸 아르케미가 줄 편안함이 필요했다.
‘아르케미에 중독된 건 아냐. 그런 건 절대로 아니지.’
그레이는 며칠 계속된 자신의 의존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통은 힘들지 않아. 지루해서 끊어내고 싶은 거야. 그뿐이야.’
‘정말로 그냥, 무언가 변화가 있길 바랄 뿐.’
‘고통은 지루해.’
그 생각과 같이, 실제로 그레이는 열이 끓고 숨통이 조여지는 듯한 고통이 힘겹진 않았다.
다만 불쾌감이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계속 해소되지 않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레이는 스스로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맸다.
그래서 더욱 아르케미를 만드는 일에 몰입했다.
필요한 재료는 계속 조지나에게 명령해 얻어냈다.
‘심장을 얻어와.’
‘더.’
‘더.’
조지나는 늘 그랬듯 조금의 이의도 없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주었다. 동시에 그레이의 요청대로 그 과정을 담은 영상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스카이가 가장 가까이에서 조지나를 도왔다.
그레이는 멀리서 조지나, 스카이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았다.
‘이번 아르케미를 만들기 위해, 인간들을 죽이러 갔던 이들이 얼마나 더 잔혹해졌더라?’
그레이는 끔찍한 영상들을 즐겁게 돌이켰다.
‘아프리카 서부보다는 북미 쪽이 재미있고 좋았어.’
몇몇이 그레이의 명에 따라 모든 대륙을 누볐다.
‘왜 갑자기 대학교 하나의 전교생이 싹 다 사라졌는지가 한동안 미스터리겠지.’
그레이는 각성자 전담 수사반이 출동해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으리란 생각에 즐거워했다.
특히, 스카이가 모든 면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레이가 원하는 세계 방방곡곡에 순식간에 다녀와서 그가 원하는 업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시키지 않은 일들까지 척척 해냈다.
가끔은 뉴스에 그녀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레이 곁에 선 타락한 소녀로 불렸다. 같잖은 것들은 그녀를 욕하면서도, 조금도 막아내지 못했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우니까 다들 막아낼 여유가 없지. 누가 끔찍하게 죽어도, 왜 그렇게 죽었는지 모르고. 학살이었다는 것도 먼 훗날에야 알 거야.”
그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끝까지 모르려나? 워낙 우매하고 멍청하니까.”
지금도 온 세상천지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아르케미의 재료가 되어버린 이들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모두가 영원히 눈치채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니, 아닌가.”
그레이는 아르케미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고 있을 유일한 사람을 떠올렸다.
포에버.
그러자 그레이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저 깊은 심연으로.
가지고 싶은데, 당장 손에 쥘 수 없는 것.
그의 명령이라면 뭐든 따르는 스카이도, 그녀를 데려다주지는 못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았다.
오직 묘했다.
“금방 만날 거야. 이 혼란한 때에.”
그녀가 하고 있을 고생이 그려졌다. 그를 상상하는 건 나름 유쾌했지만, 그 옆에 있을 다른 에스퍼를 생각하면 또 짜증이 일었다.
K.
쉽게 죽이지 않아, 너무 키워버린 것.
그레이는 K 대신에 기분이 나아지는 것들만 생각하려 애썼다.
세상에서 계속되는 소요.
폭력, 유혈사태, 전쟁.
“모두 다 내가 시작해준 덕분이야.”
그레이는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세상은 원래 이런 모습이어야 했다.
“이전이 이상했지.”
그레이는 혼잣말했다.
“사람 하나 죽일 때도 최대한 숨죽여서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앞으로는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똑. 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가 천천히 몸을 돌려, 거대한 문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삐걱.
목재 문이 열렸다.
“그레이.”
문을 연 것은 이반이었다. 그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레이와 그 앞의 연성진들을 보았다.
“연성, 또 하는 거야?”
“보면 알지 않나?”
“이제 합체가 주는 고통은 저물 거라 했잖아.”
“그렇긴 해. 근데 그냥, 좋거든. 먹을 때의 느낌이.”
“…….”
그레이는 최근 며칠, 이반이 이전보다도 더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가 가끔씩 튀어나왔다.
‘악의가 점점 커지면서, 그냥 죽이고 싶은 인간이 늘어나서인가.’
‘아니면 이반 하이제렌이 정말로 쓸모없는 유기체가 되었는가.’
‘저것도 시체로 만들어 재료로 사용해주어야 할까?’
그레이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이를 향해서도 위험한 생각을 했다.
아무런 죄책감이나 죄의식 없이.
때때로 주변의 모든 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과거부터 늘 있어온 일이었다.
죽일지, 말지.
살려둔다면, 어떤 쓸모가 있어서 살려두는 것일지.
그레이는 이반이 무언가 꺼림칙한 짓을 하고 있어서 경계심이 이는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악의가 커지는 시기와 맞물려, 오랜 시간 머물렀던 사람에 대한 권태로움이 더 커진 것뿐이라 여겼다.
“그레이. 조지나가 시간을 계속 더 끌어야 하는지 궁금해해. 나 역시 그렇고.”
“그래. 그걸 물으러 올 줄 알고 있었지.”
우웅.
지직.
캉.
그때 연성진들이 모두 함께 빛을 잃었다. 아르케미-크리스탈의 조각들만 작은 산더미처럼 쌓여 남은 채였다.
우웅.
그레이는 연성진 없이 그것들을 작은 구슬 형태로 쪼개어 같은 크기로 만들었다.
“슬슬.”
“…….”
“이제 슬슬 가야지.”
20분.
고통은 딱 그 정도의 시간만 더 이어질 터였다.
“20분. 그 시간만 기다려.”
“……그래.”
“그 이후엔 이제 정말로 갈 거니까.”
이반이 침을 삼켰다.
“……그러지.”
“그래서, 동쪽의 자세한 상황은 어때?”
“상황? 박의총은 이미 게이트가 열린 상태에서 S급 던전석으로 게이트를 키우는 걸 역행할 방법은 아직 못 찾고 있는 것 같다고 해.”
“그냥 그럴 것 같은 거야, 실제로 그런 거야? 추측 말고 사실을 말해.”
“캘리포니아의 연구원들은 확신하고 있어. 박의총이 당장은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던전석을 연구해 온 연구원들이 역삼 센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련 전공자들은 세계 각국에 많았고, 그중 역삼 센터만큼이나 전문가들이 많은 캘리포니아 센터는 전부 그레이의 편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그 외에 그레이의 편인 백악관 산하 연구실, 다른 비밀결사 단체 연구실의 연구원들도 이제는 다 그레이를 위한 작업만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게이트 충돌은 그들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그래, 뭐. 지금까지 시간을 벌었으니 됐어.”
그레이는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SS급 게이트 두 개가 열려 있을 거라는 데 만족하는 듯했다.
“이반. 난, 베이징에서의 실패에 갇혀 있지는 않아.”
그레이는 얼마 전의 실패에 대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반이 다소 긴장했다.
화가 난 그레이가 갑자기 무슨 미친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
“엿 같지.”
“…….”
“죽이고, 욕하고, 응징하고 싶지. 무능한 것들과, 막아낸 것들에게 모두.”
그런데 그레이는 말만 저렇게 할 뿐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갚아주기는 해야지. 박의총, K, 포에버…… 모두를 짓이기러 가고 싶어.”
“…….”
“살인의 정당한 명분을 찾은 것처럼 느껴져. 좋아. 실패는 항상 그런 명분과 디딤돌이 되는 거지.”
그레이는 몸을 느리게 풀며, 연금술을 이용해 옷을 바꾸었다.
편안하던 실내복은 순식간에 정장으로 바뀌었다.
또각.
발에도 구두가 신겼다.
“이제 우리도, 가자.”
“……그래.”
“놀러 가자.”
그레이가 환히 웃었다.
외양은 악의를 얻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스카이. 이리로 와. 같이 가서 놀자.”
그레이의 부름에, 하늘 역시 곁으로 왔다.
***
블라디보스토크는 폭풍전야였다.
SS급, S급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괴수를 처리하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고, 막사 안의 연구원들은 갈수록 초췌해졌다.
그레이가 올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았으나, 정확한 일시를 찍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가 SNS에 영상을 추가로 업로드하면서 분기점이 찾아왔다.
―스카이.
―그녀를 지켜봐.
―그녀가 곧 믿을 수 없는 눈부신 능력을 보여줄 거야.
―기대해.
영원과 역삼 센터 멤버들을 향해 던지는 말 같았다.
말을 마친 그레이는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영원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호흡도 잊고서 몸을 바로 뒤편으로 돌렸다.
저 방향.
‘!’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그레이 딘하우스.
다른 자일 리가 없었다.
변화를 느낀 건 영원만이 아니었다.
여현도, 백율도, 화연도 영원과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은 모두 얼마 전 영원이 그레이가 얻었을 악의에 대해 들려준 설명을 떠올렸다.
‘연금술은, 가이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신에, 그 대가를 필요로 할 때가 있어요.’
‘저의 경우라면 매우 깊은 잠, 그리고 고통.’
영원은 주변의 적을 초토화시킴과 동시에 잠에 빠졌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오랜 시간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는 했다.
‘그리고 가끔…… 악의.’
‘저는 그 악의를 덜어내려 많은 시도를 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지만, 그레이는 그럴 의지도 없었던 것 같아요. 설령 시도했다 해도 실패한 게 분명하고요.’
‘악의는 폭주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그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제정신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기도 해요.’
‘주의하세요.’
‘분명히 더, 강해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왔다.
반드시 올 거라는 예상대로, 결국 왔다.
‘우리는 그를 막을 겁니다.’
‘베이징에서도 잘 막아냈듯이.’
영원은 자신 있었다.
그러나 긴장했다.
쿵.
콰광.
소리가 닿기 전에, 먼저 사방이 난장판이 됐다.
“악!”
비명도 한 템포 느리게 터졌다.
그레이가 있었다.
“…….”
영원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크기의 악의를 안고.
“…….”
쿵.
쿵.
들리는 건 세계가 진동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영원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대제.’
영원은 오랜만에, 압도의 감정을 느꼈다.
순연한 힘을 지닌 다른 대제가 앞에 있다.
영원은 그의 강함을 인지했다. 어떤 사고과정도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마치 이 세상 어디에 금이 있는지 감각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