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가능한…… 건가요?”
화연은 솔직히 조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류하늘은 혼자서 별관의 벽 하나를 녹였다.
S급 에스퍼가 아니면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 없는, S급 던전석으로 강화된 벽이었다.
“…….”
그리고 그녀는 누가 봐도 S급 물리계 에스퍼처럼 힘을 사용했다.
여현이나 이창결 부장이 별관의 저 벽을 녹이려고 하면, CCTV 속의 류하늘과 똑같은 모습일 터였다.
“근처에 다른 S급 에스퍼는 없었나요?”
다른 세 명이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화연이 물었다.
―네. 당시에 이반 하이제렌, 즉 최환성 에스퍼는 힘을 쓰고 있지 않았고, 센터에 침투한 그레이 측 각성자는 둘뿐입니다.
윤 교수의 답을 들은 화연이 한 손을 주먹 쥐어 입을 가렸다.
‘한 각성자의 몸속에 있는 그릇은 하나뿐이야.’
혹시라도 하나의 그릇이 에스퍼와 가이드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면, 이론상으로는 1. 그릇이 붕괴하여 바로 폭주가 일어나거나, 혹은 2.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 현상으로 미친 듯한 힘의 분출이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나야 했다.
S급 가이드로서, 각성자들의 그릇에 관하여 화연은 상당한 전문가였다.
자신의 논리가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나의 그릇에 다른 힘이 같이 담긴다면, 저렇게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될 수 없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윤 교수 역시도 화연과 똑같이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류하늘에게 그릇이…… 두 개가 있는 거죠?”
―아마도요. 한 몸 안에 두 개의 그릇이 있어야만 저게 가능해요.”
몸 안에 두 개의 그릇이 있다고 가정해보면…….
‘에스퍼가 자기 자신을 직접 가이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화연의 머릿속에 마냥 허무맹랑하다고는 볼 수 없는 가설이 떠올랐다. 이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논문에 유사한 내용이 있었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지. 방금까지만 해도 당연히 허무맹랑한 상상이라고 치부해버렸을 가설이기는 한데.’
‘저런 각성자가 존재하는 이상, 더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가 없어.’
류하늘이 S급 가이드로 각성한 건 분명했다.
각종 매체를 통해 가이드의 힘을 쓰는 모습을 수없이 확인했다.
“다른 과거 영상 다시 받아볼 수 있을까요?”
―네. 송신할게요.
네 사람은 다시 급히 다른 영상이나 자료를 보내달라 해서 재차 확인해 보았다.
영상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 속에는 S급 비선별 가이드인 류하늘이 멀쩡히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S급 가이드가 맞아. 절대 조작일 수 없어.’
류하늘이 가이드가 아닐 확률은 도무지 없어 보였다.
―저도 여러 번 검토한 끝에, 류하늘이 S급 가이드인 척 세상 전부를 속였을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윤 교수는 이미 그 과정을 거친 듯했다.
그런데 동시에, 별관 CCTV의 장면에 찍힌 모습은 영락없는 S급 에스퍼였다.
―CCTV 화면을 지울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내용을 조작할 수는 없어요.
―남은 건 별관 에이아이 해킹인데, 그게 가능했다면 그레이가 던전석만 훔쳐갔을까요?
윤 교수의 논리전개는 타당했다.
화연뿐 아니라 모두가 그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류하늘은 S급 가이드로 각성했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그 이후에, S급 에스퍼로도 각성했다.
“…….”
각성자가 재차 각성하는 것.
세계수가 각성자들을 선별해내는 시스템 내에서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정말 불가능할 건 없지 않나요.”
그나마 가장 덤덤한 건 영원이었다.
영원은 류하늘이 S급 에스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놀라기는 했으나,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가장 먼저 납득했다.
‘이유야 차차 알아내면 되겠지.’
‘영원히 밝혀낼 수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사실 영원은 이미 과거에 윤 교수에게 수업을 받으면서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윤 교수는 각성자 한 명이 에스퍼이면서 가이드일 수는 없다고 설명해주었는데, 영원은 그냥 그런 사람이 아직 탄생하지 않았을 뿐인 건 아니냐고 되물었다.
‘아직 없을 뿐, 미래에는 나타날 수도 있지 않나요?’
‘에스퍼이면서 가이드인 각성자가요?’
‘네. 저는 솔직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런 일이 발생하면, 각성자가 바로 폭주할 겁니다. 아니면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으로 누가 그를 죽이기 전까지 정말로 난리가 나거나요.’
‘몸 안에 그릇이 두 개면요?’
‘…….’
‘세 개나, 네 개면요?’
‘…….’
‘최환성 에스퍼 이전에는, 환상계이면서 물리계인 에스퍼도 없었죠. 모두가 그런 경우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나요?’
당시 영원은 각성자들에 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상상력이 더 풍부했다.
반면에 윤 교수는 다소 경직된 사고를 했다.
‘세계수는 그런 식으로 각성자를 선별하지 않을 거예요.’
‘각성자들 중에는 비선별도 있지 않나요.’
‘…….’
‘그 각성이 정말 무작위라면, 이미 선별되었던 각성자가 재차 비선별로 각성하지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요.’
아무튼, 영원의 질문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것도, 그레이의 편에서.
류하늘을 담은 에이아이의 CCTV가 그를 증명했다.
네 사람은 해당 영상을 다시 처음부터 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놓친 것은 없나,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닌가 살피면서, 처음보다도 훨씬 더 주의 깊게.
“S급. 양쪽 다.”
백율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도 동의했다. 화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도달한 결론은 같았다.
“쓰는 힘의 양을 보면, 스스로 가이딩하는 게 분명해요.”
백율이 그렇게 말했고, 나머지도 모두 그 생각에 동의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거리가 좀 떨어진 두 개의 그릇이 있을 거예요.
―너무 가까이 붙었다가는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 같은 상태가 되어서, 미친 듯이 힘을 사용해 통제 불능의 상황에 이르렀을 테니까요.
―갖가지 작은 확률이 곱해져서, 그녀의 능력이 탄생한 거죠.
류하늘.
S급 가이드이자, S급 에스퍼라니.
상대하기 매우 어려울 것 같은 상대가 한 명 더 늘었다.
영원이 그를 가장 빠르게 인정했다.
‘솔직히, 적은 확률로 엄청난 능력을 얻은 건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
‘여현이랑 나만 해도…….’
영원은 막사 안의 네 사람만큼 확률 타령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도 세상에 없지 않나, 진심으로 생각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것만은 분명하네요.”
―맞아요. 던전석을 털러 역삼 본부 중앙으로 진입하는 게 웬만한 담으로 되는 일이 아니에요. 그걸 해냈으니 멘탈도 장난 아니겠죠.
능력도, 정신 상태도 미친 10대.
‘좀 무서워해야 할까?’
영원은 자신의 10대는 어땠었는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지금보다 다소 불안정했던 것은 맞는 듯했다.
―아직 사춘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은 10대이기에, 자아의 불안정함이 문제를 더욱 키울 수도 있어요.
―저쪽 동네에, 매우 주의해야 할 미친 인간이 또 하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그레이를 기다려주세요.
―그나마, 최환성 에스퍼가 류하늘을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데이터를 많이 쌓고 있을 겁니다.
―최환성 에스퍼는 환상계이면서도 물리계니까. 특이한 능력을 타고난 자신과 류하늘의 공통점을 발견할지도 모르죠.
―그 능력이 수반하는 독특한 약점을 발견해주면 금상첨화고.
―일단은, 추가 정보가 더 전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윤 교수는 차분히 말했다.
그녀도 이제는 더 당황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했다.
막사 안의 네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현도, 백율도, 화연도, 류하늘의 능력을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이드로 각성하고, 에스퍼도 되었다는 거죠……. 에스퍼의 가장 큰 약점이 없는 에스퍼네요. 가이딩의 결핍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에스퍼라니.”
백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괴수와의 싸움을 이어가자고 제안했다.
마침 SS급 게이트에서 나온 괴수가 이쪽 영역을 침범했다는 호출이 오기도 했다.
―혹시 밖으로 나와 주실 수 있나요!
넷은 자리를 정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특이한 사람 한 명 더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어요. 세상이 원래 그렇잖아요.”
영원은 막사의 천막을 걷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현이 막사를 빠져나오지 않고 안에 그대로 남아 있어, 나가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여현아?”
영원은 생각에 잠겨 있는 여현을 불렀다. 백율과 화연은 이미 밖으로 나가 괴수와 대치한 뒤였다.
쾅!
곧 싸움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쿠쿵.
SS급 게이트에서 나온 괴수라고는 해도, 게이트 자체에 비하면 큰 위협은 아니었다. 백율이 먼저 간 이상 여현까지 급히 달려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영원은 재촉하지 않고 여현을 기다렸다.
“무슨 일 있어?”
“……류하늘.”
여현이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았다.
“응. 류하늘. 뭐, 더 걸리는 거 있어?”
여현이 몸도 움직이지 않고 고민에 휩싸여 있는 이유가 뭘까.
영원은 류하늘이 에스퍼이면서 가이드라는 특이점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이름이, 이상하게 익숙해요.”
갑자기 이상한 기시감이 덮쳤다.
류하늘의 이름과 영상, 사진을 전달받은 것은 최근이다.
그런데 불현듯 차오른 묘한 느낌은, 그보다 먼 과거의 잔재였다.
“…….”
“그리고 또, 얼굴도 어딘가가…….”
“……어디서 본 것 같아?”
“네.”
여현의 답은 확고했다.
어딘가에서 분명히 보았다는 생각이 착각 같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도 그 시점이나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최근은 분명히 아니에요.”
영원을 만난 이후는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이 분명한데, 언제쯤에 보았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10대?
그 이전?
혹은 20대가 된 다음?
여현은 기억을 깊게 헤집어봤다.
대체 류하늘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아무 단서도 찾을 수가 없어, 매우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