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눈이 소복이 쌓인 침엽수의 숲.
그곳에서 여현은 마스크를 벗고 나무 한 그루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에스퍼 정복의 한편이 너덜거리기는 해도,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저 영원을 기다리며 휴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원이 백율의 꽃밭에서 쉬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이었다.
여현은 거의 한계까지 비워진 그릇이 주는 고통을 견디며 영원만을 생각했다.
안전하게 오고 있을지.
여현은 틈틈이 가이딩 밴드를 확인했다.
고통 자체보다, 영원이 곁에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싫었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사락.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여현은 영원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멀리까지 넓게 펼쳐둔 레이더를 통해서도, 그녀가 가까이 올 때 반응하는 심장을 통해서도, 영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현아!”
기다리던 목소리까지 들렸다.
여현은 고개를 들어 가까이 오는 영원을 눈에 담았다.
높이 솟은 나무들 사이에 착지한 영원이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빠르게 뛰어왔다.
하얀 눈밭을 가로지르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얀 정복. 바람에 나풀거리는 가벼운 단발. 전체적으로 옅고 차갑지만, 자신을 향하는 시선은 따뜻하다.
사박. 사박.
“여현아. 나 왔어.”
저를 향해 뛰어오는 영원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양 눈이 멀쩡하게 회복되었지만, 방금까지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경험이 온몸을 덮쳤다.
속이 울렁였다.
“…….”
여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괜찮아?”
영원이 더 가까이 와 몸을 낮추었다.
“…….”
여현은 말없이 영원만을 보았다.
색소가 옅은 회갈색 눈동자가, 걱정을 담고 세심히 그를 살폈다.
여현은 영원에게 무어라 답을 할 수 없었다.
‘전담님, 지금 말도 못 할 정도로 지쳐 있나.’
‘약간 병약미를 더한 느낌도…… 심각하게 잘생긴 외모를 후광처럼 빛내고 있어.’
영원은 갑자기 떠오른 주접 생각을 멀리멀리 치우고는, 여현이 말이 없는 건 당장 가이딩을 해달라는 무언의 의사표시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즉시 곁에 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
여현의 눈이 조금 더 크게 뜨였다.
인형 같은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안아, 그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될 줄 몰랐다.
당연하게 수백 번은 해온 것 같은 일인데도, 긴장했다.
그의 목 주변을 영원의 손이 덮었다.
영원은 여현의 몸이 잠시 떨리는 것조차, 그에게 가이딩이 매우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일 끝내고 틈내서 좀 쉬어보려고 하다가.”
영원은 솔직하게 변명하며 가이딩을 시작했다.
사락.
편안한 힘이 전해졌다.
여현에게 완벽한 휴식을 안길 가이딩이었다.
여현은 잠시 굳었다.
그러다가 긴장을 서서히 놓아버리면서 영원이 주는 아늑함에 빠졌다.
기다리던 휴식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영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호흡이 점점 느리고 깊어졌다.
게이트 내에서 무리했던 여파가 모두 씻겨 내려갔다.
여현을 안은 영원도 그의 몸에서 긴장이 떠나가는 걸 느꼈다.
목에 닿아 있지 않은 영원의 손이 여현의 몸을 도닥였다.
“고생 많았…… 으.”
여현의 팔이 영원을 강하게 안는 바람에, 영원의 말이 중간에서 이상하게 끊겼다.
여현은 영원을 꽉 안고서, 계속하여 느리게 숨을 쉬었다.
영원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말없이 가이딩만을 이어갔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괜찮으셨나요?”
그릇이 다 채워질 즈음에야 여현이 물었다.
“응?”
“베이징이요.”
“아……. 응. 잘 해냈어.”
영원은 약간 힘든 부분이야 있었지만, 결국 계획대로 다 잘 해냈다며 자기 자랑을 재잘거리듯 늘어놓고는 혼자 웃었다.
여현은 직전에 영원이 여현의 몸을 토닥였듯, 영원을 안은 채로 그 등을 토닥여주었다.
“고생 많으셨네요.”
“으응.”
영원은 아직 근육통이 남아 있었지만, 여현이 다독여주는 손길에 고통이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설명한 것보다도 더 엄청 힘들게 해냈는데…….’
‘이러니까 더 엄살 부리지도 못하겠네.’
영원은 어쨌거나 서로 잘 해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이딩을 마쳤다.
여현은 영원의 가이딩이 끝난 다음에도 영원을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
영원은 여현이 언제 놓아주려나, 생각하며 가만히 안겨 있었다.
동상이몽 같은 순간이었다.
이 순간의 여현은 정말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S급 게이트를 끝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릇을 거의 다 비울 정도로 힘을 쓴 것은, 자진해서 무리한 결과였다.
‘잠재력의 한계를 알고 싶었지.’
‘그리고 기대한 것 같아.’
‘달려와 줄 거라고.’
이렇게, 바로 영원이 달려와 줄 것을 알고서 벌인 일이었다.
적어도 무의식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이드가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보살피듯 안아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기대가 더 극단까지 힘을 쓰도록 부추긴 것이다.
여현은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인정했다.
“여현아, 이제 괜찮은…… 거지?”
영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여현이 잠시 텀을 두고 답했다.
“……네.”
“여현아, 근데, 진짜.”
“네.”
“이번에야 상황이 이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떨어져 있을 때 괜히 무리하면 안 돼.”
“…….”
“에스퍼한테는 한계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지.”
여현 자신에게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가 짐작하는 것보다 한참 강했다.
이런 걱정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연약하거나 무모하지도 않았다.
“네. 그럴게요.”
다만, 자신은 분명 한계가 있는 에스퍼이기는 하다는 생각에, 여현은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가이드가 필요한 에스퍼니까, 가이드님이야말로 계속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
여현은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힘을 잃어갈 때, 절대로 떨어져 있는 일 없도록.”
“……응. 그래.”
가이딩으로 그릇이 채워지면 여현 역시도 당장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렸다.
여현은 영원을 품에 안고, 잠시 더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
같은 시간.
서울에서도 각종 사건에 빠르게 대응하고 있었다.
심영원 가이드의 상상을 초월한 미친 힘으로 사태가 대강 정리되나 했는데, 조지나의 위치가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뜬금없는 곳에서 포착되었다. 이 급보는 공무원들의 휴식시간을 단번에 앗아갔다.
그다음에 A급 게이트가 만든 차원의 균열이 확대된 것도 큰 몫을 했다.
이제 휴식시간은 물론 식사시간까지 싹 사라졌다.
―지금 S급 쌍둥이 게이트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앞에 센터 연합 게이트 대응반이 임시 사무소 차렸습니다!
마이크를 통한 모든 소통은 엄청난 데시벨로 이루어졌다.
이쪽에서도, 반대편에서도 반쯤은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앞에서 대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백율 부장님도 도착해 계십니다!
―그리고 유럽 소요 사태는 베이징에서 그레이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고 해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요!
―더한 폭동이 일고 있답니다! 각성자들이 완전히 미쳤대요!
속속 들어오는 소식에 의하면, 아시아의 동쪽만큼이나 유럽 대륙도 난리인 듯했다. 그쪽은 오로지 사람이 만들고 있는 재난이라는 점이 약간 다르기는 해도.
―젠장! 대륙을 불문하고 지구 위에서 난리가 나 있지 않은 곳이 없다니!
XX 같은 욕설이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는 이들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안에 심각한 표정을 한 윤희유 교수도 있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영원에게서 돌아올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답이 왔다.
―여현이 그릇 다 채웠습니다.
―전담님이랑 이제 동쪽으로 갈게요.
그러자 윤 교수가 안도한 얼굴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아…….”
그레이 딘하우스가 쏘아올린 포탄의 잔해가 온 지구를 덮은 상태였다.
다음 포탄도 있을 터였다.
달칵. 달칵.
윤 교수는 책상 위의 마우스를 움직여 올라오는 각종 뉴스도 주기적으로 확인했다.
그레이의 공격이 여기서 멎을 리가 없었다.
그레이는 아직도 엄청난 수의 S급 각성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전체 전력을 생각하면 영원이 영구히 능력을 못 쓰게 만들어버린 에스퍼들을 잃은 게 엄청난 손실은 아닐 터였다.
‘공개적인 망신을 당했고, 앞으로 세력 확장이 어렵게 된 정도. 그레이가 떠안은 문제는 그뿐이야.’
대대적인 선전은 베이징 사태 전에 이미 그레이가 원한 만큼의 성과를 낸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국가원수는, 영원의 힘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레이의 편에 서기로 노선을 정하기도 했다.
―한 나라의 수반이, 자신이 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다수의 국민을 노예로 만들겠다니 미친 거 아냐? XX새끼!
윤 교수는 어느 장관의 험한 욕설에 내심 동의했다.
그러나 정상이 아닌 게 그 국가원수 하나뿐만이 아니라서,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지금 이 지구 위에 미친놈들이 어디 한두 명이어야지.’
어쨌거나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일단 동아시아 쪽의 국가들은 동맹체를 구성하기는 했어요.
국가 사이의 정의에 대한 호소.
평화 유지에 대한 굳은 의지.
아직, 그 명분은 대외적으로 들어 먹혔다.
센터 본부나 UN 역시도, 나름대로 상식에 부합하는 결정을 차례로 내렸다.
[속보: 센터, 딘하우스 제명]
[속보: 그레이 ‘테러세력’ 지정]
[숙보: UN안보리… “그레이대對 각성자 연합군 출격 고려”]
쾅!
그리고 윤 교수가 의자에 깊게 기대어 잠시 쉬어가려는 틈에, 갑자기 모니터 룸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아. 헉.”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 안으로 들어온 건 의총이었다.
그는 창고에서 나와 던전석 도난 상태부터 확인하려고 우선 사무실에 돌아갔다가, 블라디보스토크의 현 상황을 확인하고는, 곧장 미친 듯이 이리로 달려왔다.
환성이 의총을 창고에 가둘 때 통신기기를 싹 빼낸 덕에 보안 라인을 잃어서, 급한 정보를 전하려면 직접 이곳으로 뛰어와야만 했다.
“하아. 비상, 비상입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뛰어온 의총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의총 가이드님? 무슨…….”
“연결, 연결이요.”
“네?”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누구든, 빨리!”
삑. 삐삐빅.
의총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백율과 화연의 인이어에 대고 소리쳤다.
“당장 나오세요!”
―갑자…….
“미친 조지나가, 여기서 훔쳐 간 S급 던전석들을 퍼부어서, 거기의 모든 게이트를 하나로 합치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도난?
S급 던전석을 훔쳐?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모두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이창결 부장님부터 빨리 나오게 해요! 당장!”
달력을 확인해도, 오늘이 만우절인 것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