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79화 (79/142)

화연은 백율이 만든 커다란 꽃에 앉아서 영원에게 날아갔다.

“영원 가이드님!”

꽃밭에 누워 서서히 회복해가는 중인 영원의 가까이에 착지한 건 금방이었다.

“옷에, 피가……!”

화연은 붉은 얼룩이 잔뜩 진 영원의 가이드 정복을 보고 당황했고, 영원은 상체를 천천히 일으킨 다음 별거 아니라며 화연을 안심시켰다.

“이제 괜찮아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두통과 울렁거림마저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역시 나의 대단한 먼치킨력.’

그래도 근육통은 여전히 극심해서, 부축 없이 땅을 짚고 일어날 수는 없을 듯했다.

“부축만 좀…….”

화연이 급히 가까이 와 영원이 일어나는 걸 도왔다.

영원은 화연에게 기대어 이동한 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거대 꽃에 앉았다.

사락.

영원이 위에 앉음과 동시에 꽃잎이 편안하게 영원을 감쌌다.

화연은 영원을 걱정하면서도, 정말로 얼떨떨한 기분으로 꽃잎에 기대어 쉬는 영원을 바라보았다.

‘정말 해내신 거지.’

‘미친 짓이었어. 게다가 그걸 해내고도, 별 타격 없이 멀쩡히 숨 쉬면서 말하고 계셔.’

‘가능할 수도 있다고 기대는 했지만…… 믿을 수 없어.’

화연은 영원이 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번만은 원하던 결과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너무 기대하면 또 실망하게 되잖아.’

이제 작은 의심마저 완벽히 지워졌다.

‘정말 세상이 지옥이 되지 않게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리 큰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화연은 그레이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뿌리고 다니는 끔찍한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안기는 자극은 화연에게도 강렬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하겠지.’

불쾌하지만, 분명 각성자들을 강렬하게 유혹할 것이다.

‘그레이가 일으킨 것만큼 대규모는 아니지만, 유사한 사건들은 과거에도 많았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세계 전체로 확대하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자잘한 사건들은 정말 많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국가에서도, 개인 단위의 끔찍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

화연은 각성자들의 우월함을 주창하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직접 검거한 적도 있었다.

끔찍했었다.

‘이제 그 더러운 욕망의 민낯을 모두가 보고서, 다 함께 지옥에 들어갈까 봐 걱정했는데…….’

화연은 사력을 다하여 악인들의 미친 짓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러한 욕망이 낳을 피해를 전부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체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미쳐가고, 게이트와 던전은 갈수록 더한 시련을 이 세계에 쥐여주기만 하는 것 같아서.

오색문어의 던전에서도 화연은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

난도가 정말 너무 높아졌다고. 우리가 이 이상을 감당해낼 수 있겠냐고.

물론 화연은 겉으로는 그 비관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확신했지. 난도가 이렇게 심각해지는 건 절대로 S급 던전만은 아닐 거라고.’

‘게이트도 있고, 상대해야 하는 그레이의 힘도 있고.’

앞으로 게이트 웨이브도, 그레이 딘하우스도 더욱 큰 재난을 일으킬 게 뻔했다.

‘하지만…….’

어쩐지 괜찮을 거란 생각이 일었다.

“영원 가이드님.”

“……네에, 쌤.”

영원은 이 대단한 일을 해내고서도 조금도 우쭐해지지 않은 태도로 화연을 대했다.

“감사해요.”

화연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백율 부장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뿐 아니라, 전담 에스퍼의 마음까지 포함한 감사의 말을 영원에게 건넸다.

“……뭐가요?”

“……그냥, 뭐 별 건 아니고요. 아무튼, 그래서 백율 부장님은 지금 저쪽에서…….”

화연은 화제를 전환해서, 백율 부장님은 체포 등의 후속 처리 때문에 아직 현장에 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당링링이 방금 합류했어요. 그래서 부장님이 중국 센터 쪽으로 꽃밭에서 생포한 에스퍼랑 가이드를 전부 넘겨주고 있어요.”

중국 센터의 수장인 당링링은 상하이 쪽에서 그레이 측 비선별 S급 에스퍼 세 명과 맞붙었다.

그녀 역시도 주어진 일을 잘 끝내고 이쪽이 정리될 때에 맞추어 온 듯했다.

“현재 체포해야 하는 에스퍼만 해도 2천 명이 넘고, 가이드까지 포함하면 4천 명 가까이 되기는 하는데, 부장님이 최대한 빨리 인수인계 마치고 여현 에스퍼님, 이창결 부장님 도우러 가자고 하시네요.”

베이징에서의 검거는 센터 멤버가 아닌 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게이트가 발생한 쪽으로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는 말에 영원도 동의했다.

“일단 저희는 안전가옥에 가서 부장님을 기다리죠. 잠시 회복할 시간은 있을 거예요.”

영원은 고개를 끄떡였다. 회복이 정말 필요하기는 했다.

영원은 느릿느릿 꽃 위에서 옆으로 이동해 화연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영원이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누군가가 가까이에서 신음을 냈다.

“윽. 으윽!”

아까 지나가는 비각성자를 붙잡았던 비선별 에스퍼였다.

영원은 화연이 지정해준 위치 근처에서 남자를 쓰러뜨린 후, 그가 너무 하찮아서 그 이상 뒤처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깨어나서, 고개를 들어 영원과 화연을 발견하고는 하얗게 질렸다.

“……!”

영원뿐 아니라 화연 역시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S급 에스퍼, 백율의 전담인 S급 비선별 가이드.

“으! 뭐, 뭐야!”

이어서 그는 자신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꽃을 보고 놀랐다.

벗어나기 위해 힘을 써 보려 했으나 힘이 그릇에서 빠져나오지도 않았다.

꽃밭의 마술사의 힘에 포박당한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릇에서 힘을 뽑아내지 못하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뭐…….”

그는 여러 가설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몸이 공포에 덜덜 떨렸다.

점점 동요가 거세졌다.

그는 뭐라도 설명해달라는 눈으로 영원을 보았다.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힘 못 써요. 앞으로.”

그를 향해 영원이 확인사살을 던졌다.

“제, 제발…….”

영원에게 애원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법정에 가서 애원해야 할 처지였다.

“감옥에 가실 거예요. 한국으로 범죄자 인도, 안 될 수도 있어요.”

“…….”

영원은 더 설명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 이상 에너지를 쓰는 건 낭비 같았다.

“부장님, 저희 안전가옥으로 보내주세요.”

영원의 의사를 파악한 화연이 인이어에 대고 백율에게 말하며 영원의 곁에 앉았다.

화연과 영원이 앉은 꽃이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그렇게 영원은 스스로 피를 토한 것만을 제외하면 다른 유혈사태 없이 임무를 끝냈다.

완벽하게.

S급 2명마저 죽을 때까지 에스퍼의 힘을 그릇에서 꺼낼 수 없을 터였다.

그것은 영원 자신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심히 엄청난 일이었다.

툭.

그리고 영원과 화연이 떠나간 자리.

영원이 가이드의 물리력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계속하여 근처 건물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고 있던 이가 입을 가렸다.

아까 비선별 에스퍼에게 붙잡혔다 구조된 비각성자였다. 가이드의 물리력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따고 있는 영원의 성덕.

‘……나의 영원 님.’

‘미쳤어…….’

‘영원 님!’

그녀는 영원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을 힘겹게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베이징의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핸드폰을 켰다.

그 이후에는 백율의 생중계 화면과 영원을 수없이 번갈아 가며 보았다.

기현상을 일으키는 사람은 분명 영원이었다.

‘이거, 이 현상.’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연구해야 해.’

‘삶을 걸어볼 만한 과제야.’

윤희유 교수의 뒤를 이어, 각성자 연구로 엄청난 권위자가 될 석학.

그녀가 남길, 역사에 길이 남을 박사 논문 주제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당장 모든 자료를 긁어모아서 연구를 시작해야 해.’

앞으로 그녀는 ‘비선별 가이드의 물리력’에 관하여, 세기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위대하다고 평가될 역사적인 논문을 쓰게 될 터였다.

심영원이 실제로는 비선별이 아니라는 점만을 제외하면 완벽한 내용만이 담길 논문의 저자가 품에서 노트를 꺼냈다.

팔락.

그녀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영원은 상공을 날아가면서 가이딩 밴드를 다시 확인했다.

쓰러진 다음 곧장 보낸 메시지에 여현이 답을 주었을까 생각하면서.

오타 가득한 메시지를 분명 확인했을 텐데,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읽씹?’

‘마상…….’

‘바쁜가?’

혹시라도 위급하다는 연락이 오면 몸이 회복되거나 말거나 그에게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런 영원의 옆에서 화연과 율이 인이어를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화연아. 여긴 금방 정리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로 가야 해.

백율 부장의 목소리를 영원도 함께 들었다.

―조지나가 S급들을 끌고 그곳으로 간 것 같아. 뭔가 난리를 치려고.

―그리고, 역삼 본부와도 뭔가 소통에 문제가 있어. 박의총 가이드와 연락이 안 돼.

―서시용 시장과는 연결이 잘 되는 걸 보면, 서울에 엄청난 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고.

그리고 그 말이 끝날 때쯤, 역삼 본부에서 영원, 화연, 율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대 A급 게이트 3개 소멸]

[잔여 A급 게이트 21개 이상현상]

[S급으로 변화 가능성 있음]

[SS급 가능성 있음]

SS급 게이트라니.

영원은 질린 얼굴을 했다. 화연의 표정도 함께 굳어갔다. 저 너머에서 당링링과 협업 중인 백율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 정도면 거의 무지성 재해 남발 아닙니까?’

‘대체 이딴 식으로 재난을 퍼부어대도 되는 거임?’

‘역시 미친 하드코어 현판.’

‘내가 만약 이딴 내용이 쓰인 현판을 읽었으면 주인공 심히 동정했을 듯.’

‘대체 사건과 개고생이 끝나지를 않아…….’

커다랗고 포근한 꽃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안전가옥으로 돌아가 잠시라도 쉬는 일정이 방금 계획표에서 삭제된 모양이었다.

―화연아, 가자.

“네.”

백율이 이제는 화연이 아닌 영원에게 말을 건넸다.

―영원 가이드님, 일단 저랑 화연이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합니다.

“네, 그럼 저는 여ㅎ…….”

영원은 말을 이어가며 혹시 몰라 가이딩 밴드를 다시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가이딩 밴드가 강한 세기로 진동했다.

드드드드드.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현에게서.

[와주세요]

영원은 어떤 망설임이나 지체도 없이, 연금술의 힘을 사용해 상공을 날아갔다.

여현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정복에 묻은 핏기를 연금술로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이 여현에게로 가고 있을 때, 세 개의 사건에 관한 뉴스가 동시에 온 세계로 퍼졌다.

[그레이, 베이징 실패… S급 2명 포함 2,000명↑ 에스퍼 능력 잃어]

[김여현, S급 게이트 홀로 소멸시킨 듯]

[블라디보스토크… 역대급 재해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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