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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76화 (76/142)

꽃밭의 중심에 선 백율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찬찬히 설명했다.

괴이한 현상을 만들어낸 생소한 힘이 무엇인지.

“지금, S급 가이드의 물리력이 에스퍼들을 제어하는 중입니다.”

가이드의 물리력?

어떤 사람들에게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힘이었다.

언뜻 들어본 적 있다 해도 자세히 아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다들 율의 설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S급 가이드들은 현실에서 가이드의 힘으로 외력을 행사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이를 ‘가이드의 물리력’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생중계되는 영상, 그리고 현장에 설치된 음성 증폭기를 통해 멀리 퍼져나갔다.

“이 힘은, 에스퍼의 그릇을 향하여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오랜 훈련을 거치면, 그 그릇을 변화시킬 수도 있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숨죽이고 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화면 너머에 있었다.

현장에는 주변에 있던 각성자들이 다 달려서 도망친 터라, 백율의 가까이에 있다고 할 만한 사람은 뒤에 선 화연뿐이었다.

“그 구조 자체에 힘을 가하여, 그릇에서 힘이 빠져나올 수 없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게 말이……!”

상당히 떨어진 위치에서 외국어로 절규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달려가다 쓰러진 에스퍼였다.

인이어가 그가 말한 문장을 곧장 통역했다.

“됩니다.”

백율은 단호하게 문장을 끊고 답했다.

“으…….”

쓰러진 에스퍼는 백율의 설명대로,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음을 느껴가고 있었다.

그로서는 그녀의 설명을 믿고 싶지 않았다.

“에스퍼의 그릇에 회복력이 있기는 하죠. 그래서 보통의 경우,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해 그를 막아보았자 며칠만 지나면 에스퍼는 다시 이전처럼 힘을 쓸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사용된 힘이 약한 경우였다.

“하지만 그릇의 변형이 일정 정도를 넘어간다면?”

그다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물체에는 탄성한계라는 것이 있다. 외부의 힘을 받아 일어난 변형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물체는 본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

이 정도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카강!

순간, 난데없는 개입으로 백율의 말이 끊겼다.

그녀가 서 있던 꽃이 깔린 대로의 중앙부가 거대한 낫과 철퇴의 충격으로 갈라졌다.

쿠쿵.

옆에 있던 건물까지 그 충격에 흔들렸다.

콰직. 쩌적.

건물과 도로가 그 진동에 시차를 두고 갈라졌다.

붉은 일색의 옷을 입은 사신 같은 남자와 검은 점프수트를 입은 여자가 백율과 마주 보고 섰다.

백율과 화연이 예상했던 대로, 베이징 밖에서 달려온 방해자였다.

크루즈에서 보았던, 스페이드 팀에서 나름대로 눈길을 끌던 비선별 환상계 에스퍼 두 명.

두 사람은 그레이에게 동조해 가장 정신 나간 비선별 각성자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율과 화연이 그들에 대해 추가로 알고 있는 건 두 가지였다. 그들에게 벌써 환상 구현을 극대화하기 위한 낫과 철퇴라는 전통적인 무기가 있다는 것. 그러나 잠재력이 있다 해도 아직은 상당히 미숙하다는 것.

착지한 위치부터가 그들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포에버는 어디에 있지?”

붉은 남자가 백율에게 물었다.

그는 영어를 사용했지만,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

“답해. 어디에 있는지.”

그레이 측은 에스퍼들의 그릇에 힘을 가하는 게 영원이라는 사실은 파악한 모양이지만, 영원의 위치는 찾아내지 못한 듯했다.

당연히 백율은 나서서 알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탁.

타닥.

금방 붉은 남자의 뒤로 다른 남자 둘이 착지했다.

맨투맨을 입은 남자 하나와 앞머리를 가리도록 후드를 푹 뒤집어쓴 남자 하나. 둘은 각자 손에 핸드캠을 들고 있었다.

역시 미숙함을 드러내는 합류였다.

맨투맨은 30대, 후드 쪽은 10대 소년 정도로 보였다.

프론트 가이딩을 할 겸, 그들이 운영하는 동영상 채널에 업로드할 콘텐츠를 촬영하러 가까이 온 가이드들인 듯했다.

‘두 가이드도 아마 다 S급.’

‘어린 쪽은 오색문어 때는 못 봤어. 둘 다 여러모로 실전경험이 부족해 보이고.’

백율의 뒤편에 선 화연은 새로이 등장한 비선별 가이드 두 명을 빠르게 훑었다.

“위치를 알려주면, 멈출 수는 있을 것 같나?”

백율은 붉은 남자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백율, 네가 안 알려줘봤자 결국 굴복해서 말하게 될 거야.”

붉은 남자는 대단한 자신감을 보였다.

백율은 그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연을 한 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쾅!

붉은 남자는 험악하게 생긴 거대한 낫을 또 휘둘렀다. 그러면서 마법 주문 같은 것을 읊었다.

“뇌우.”

파파박.

“폭우.”

콰광!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쏟아졌다.

“악!”

광범위하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전기의 폭우에, 한참 멀리 있던 같은 편들마저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전기가 갈수록 더 거세져, 금방 폭포수처럼 흘렀다.

그다음엔 검은 점프수트를 입은 여자의 차례였다. 그녀의 철퇴 주변으로 기름 같은 꾸덕한 검은 무언가가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아아악!”

멈추지 않는 번개의 폭우 속에서도, 백율과 화연은 동요 없이 무표정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모든 것이 그 둘만은 비껴가고 있었다.

화연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인이어를 매만졌다.

톡. 톡.

“영원 가이드님.”

저편에서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잠시라도 대화 가능하시면, 응답해주세요.”

화연이 인이어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비선별 에스퍼 둘은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다 여겼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인을 보냈고, 여자가 화연을 향해 기름 같은 것이 응축된 철퇴를 휘두르려고 했다.

“철…… 억!”

다만 그 공격은 시작도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하기 전에, 온몸이 통제되지 않는 공포에 빠졌다.

백율 에스퍼의 통제력이 발휘되었다.

네 명의 각성자들은, 잠깐 동안 시선마저 원하는 곳으로 돌릴 수 없었다.

쿵.

몸이 의지에 반해 쓰러졌다.

퍽.

붉은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몸은 이미 바닥에 완전히 쓰러져 꽃들에 결박되어 있었다.

다른 S급 에스퍼나, 프론트 가이딩을 위해 온 가이드 둘도 똑같은 상태였다.

“무…… 무……!”

“뭐ㅇ…….”

S급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갑자기 무력감에 압도됐다.

그 역시 백율의 통제였다.

파스슥.

그들이 들고 있던 무기나 카메라는 다 저 멀리 떨어져 꽃밭 속에서 바스러지고 있었다.

‘뭐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방금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들 자신이 사실상 무적이라 믿고 있었다.

거슬리는 인간은 누구라도 곧장 처리할 수 있었고, 그 외에도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백율과 강화연이라고 해도, 자신들 4명을 한꺼번에 당해낼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몸을 사려.’

그래서 조지나의 충고도 듣지 않고 튀어나온 것이었다.

‘백율이나 이창결 정도만 해도 너희들 몇 명쯤 혼자서도 가지고 놀아.’

자존심이 상했다.

무시를 견딜 수 없었다.

조지나나 그레이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무모한 도전을 부추겼다.

그들은 설령 조지나의 말처럼 백율과 화연이 그들보다 강하다고 해도, 둘의 혼을 빼놓을 공격을 퍼부어서 전세를 역전할 생각이었다. 한번 승기를 잡으면 같은 편인 다른 S급 에스퍼들, 조지나 스피넬, 다수의 A급, B급 각성자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백율을 끝장낼 수 있을 터였다.

성공만 하면 화려한 공치사를 받을 거라 믿었다.

그레이의 조직에서 그의 곁에 앉은 간부가 되는 꿈도 꾸었다.

“대체 무…….”

그러나 그런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격 시도는커녕, 사지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파슥.

백율이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그들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긴.”

“우윽!”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짓눌렸다.

헛구역질하여 속을 게워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니들이 내 꽃밭 정중앙에 제 발로 떨어져서 생긴 일이지.”

백율은 매우 어이없는 기분으로 그들이 한 짓을 되짚어보았다.

이들 4명은 전부 자신이 펼쳐놓은 필드 정중앙에 제 발로 뛰어내렸다.

대단한 자만 없이는 할 수 없을 일이었다.

민간인들을 괴롭혀 온 지난 시간이, 많은 이들이 댓글로 달아준 정신 나간 피드백이, 이들에게 어떤 왜곡된 세계관을 불어넣었을지 생각만 해도 역했다.

‘정말 세상이 이 지경이라니.’

그리고 때마침, 영원의 답이 백율과 화연에게 전해졌다.

―네.

억눌린 목소리였다.

고도의 통제하에서, 겨우 숨을 쥐어 짜내어 답한 게 분명했다.

다소 거친 영원의 숨소리가 이어서 잠시 들리기도 했다.

화연은 그래도 영원과 대화가 연결된 틈을 놓지 않고 물었다.

“S급 에스퍼 둘, 여기서 통제하고 있겠습니다. 이쪽도 같이 해보실 수 있을까요?”

비선별 에스퍼 두 명은 화연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화연이 대체 누구를 향해 질문을 던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금방 그 맥락을 짚어내게 되었다.

“아냐, 아냐!”

“악!”

둘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듯 저항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목청껏 비명이나 지르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더는 들어줄 가치가 없다는 백율의 판단하에, 목소리조차 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그들의 음성이 비워진 곳에 백율의 목소리가 채워졌다.

“힘을 앗아가는 처치가,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

“근데 그건 너희들 입장입니다.”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백율은 그녀가 카메라를 찾아 그 앞으로 온 이유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 그녀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고, 아직 그레이의 편으로 돌아서지 않은 각성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이쯤에서 끝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충분히 더 끔찍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

“알아두세요. 너희들만 잔인하게 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

“그냥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에서 멈추게 도와주는 걸.”

백율은 울 것 같은 얼굴의 두 사람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그레이에게 동조한 이들은 그들의 발아래 둘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백율 자신도 이들에게 일말의 동정 비슷한 것도 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눈빛으로 보이는 억울함이 우스웠다.

상당히 역겹게도 느껴졌다.

“역지사지가 안 된다면, 현실 파악이라도 잘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같잖은 힘 위에 누가 있는지. 당신들이 평생 발버둥을 쳐도 근처까지도 올 수 없는 자리에, 누가 있는지.”

이들의 죄는, 멍청함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각성자들이 지배하는 완벽한 미래를 원한다고?”

“…….”

“미안한데, 너희들은 그런 미래로 나아갈 일 없습니다.”

그다음의 말은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이들의 행동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각성자들이 많다는 걸 압니다.”

사람들이 모두 욕망의 노예인 것만은 아니니.

평화와 존중, 이해, 함께함의 가치가, 그저 타인의 인간성을 말살한 뒤 그를 굴종시키는 것보다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세계엔 분명히 많을 터였다.

타인을 지배하지 못할 만큼 나약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지 않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아직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만큼 모두 악마인 것은 아니다.

“이 에스퍼들이 도착할 곳은, 각성자들이 지배하는 미래가 아니라, 각성자로 각성하지도 못했던 과거입니다.”

“…….”

“평범했던 과거.”

이들은 그들이 경멸하고 말살하려고 했던 바로 그 존재로 돌아갈 것이다.

이 장면이 계기가 되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얻든, 백율은 부디 더 많은 사람이 그레이에 동조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시, 긴 시차를 두고 영원의 희미한 답이 돌아왔다.

―네.

‘이 S급 두 명을 통제하고 있을 테니, 그들의 그릇도 함께 막을 수 있겠냐’는 화연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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